2024.4.21. 나해_부활4주일
사도 4:5-12 / 시편 23 / 1요한 3:16-24 / 요한 10:11-18
“사랑의 가능성”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누가 사랑을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귀에 인이 박히도록 “사랑하라”는 명령을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최대 가르침은 사랑이라고 만천하가 다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대로 남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할 수 없기에 우리는 사랑하라는 성서 말씀에 대해 다양한 연구와 해석으로 왜 우리가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지를 말합니다. 사랑할 수 없기에 이유가 너무나 많고 변명도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의 연약함, 일방적인 희생보다는 상호 관계성의 중요성, 각자가 처한 상황논리에 따라 너무나 많은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합리화합니다. 때론 사랑보다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마구 상대를 향해 칼날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사랑은 이론도 아니고 보통명사도 아니기에 사랑은 직접 해보기 전에는 결코 사랑이 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관념과 이론 속에서만 사랑을 추구하다 보니 우리는 사랑의 추상성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제대로 하지 않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서로 사랑하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참 난감합니다. 양심의 가책만 매일매일 쌓여 갑니다.
사랑에 대해 강조한 요한계 문서들은 이점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사랑하고 싶지만 그 반대로 상대에 대해 먼저 경계하고 비교하게 되는 것이 인간임을. 인간은 상대에게 먼저 져주고 상대를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기가 참 힘든 존재입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은 이러한 인간 본연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사람은 남의 성공에 대해 칭찬으로 공감하기보다는, 오히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공감을 더 잘한다고 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은 뭔지 몰라도 자기보다 조금은 열등한 상태에 놓인다고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어려울 때 나를 잘 도와주던 사람이 내가 잘 될 때는 갑자기 나와 거리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질투와 비교의 감정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리는 양무리와 매우 유사하다고 합니다. 양들은 무리 짓는 습성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강합니다. 양들은 몇 마리만 모여 있어도 우두머리를 세우고 무리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 짓는 습성도 천적이 없는 상황에서는 느슨해진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위기가 없으며 제각각 잘난 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천적이 나타나면 때론 도망치기도 하지만 대부분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뭉쳐서 천적을 몰아냅니다. 이러한 습성은 철저히 자기 생존본능에 근거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개인주의적인 인간과 매우 흡사합니다. 인간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조직을 형성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매우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때론 무리 지어 엄청난 일을 해내는 인간들이 서로 사이가 나빠지면 싸우고 분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 문서들이 우리를 양으로 예수님을 목자로 각각 표현한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남을 미워할 수도 있고, 남을 사랑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양가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우리는 남과 무리를 지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럴 때는 매우 이타적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서로 내부의 적과 다투고 미워하며 분열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양무리처럼 “선한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한다면 하느님 앞에 떳떳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지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개연성 많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늘 시달리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도저히 사랑이 안 될 때 느끼는 양심의 가책을 경험한 사람은 그 부담감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무리 지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소리를 알고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이타적일 수 있는지 그분은 잘 아십니다. 그분은 한 마리 잃은 양도 찾아다니시는 분이십니다. 그 양이 선한 양이든 악한 양이든 그분께는 무관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양은 “선한 목자”가 이끄는 무리와 함께 있을 때 온전해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 요한 3:19-20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서툰 존재이지만 “선한 목자”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최소한 남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고 이 양무리 교회와 함께하는 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다 양 같아서 제각각 행동하기도 하는 존재임을 잘 아십니다. 생존에 위협을 느낄 때만 뭉치는 존재, 자신에게 이익이 있을 때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 우리는 이러한 양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목자로 섬기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안심인지 모르겠습니다. 양은 목자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걱정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때론 사랑하고 때론 미워할지라도 우리가 이 양무리 속에 거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성육신 하심으로 우리의 심리와 생각을 모두 공유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목자이시니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결코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양무리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혼자 쓸쓸하게 지내기보다 무리 속에서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때론 무리 속에서 상처도 받고, 소외도 당하고, 아픔도 느끼지만, 그래도 우리는 양 같아서 결코 혼자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결국 사람을 통해 위로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혼자 존재하려 하면 우리는 우리의 한계 속에서 깊은 절망과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 함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길 잃은 양이 되곤 합니다. 양은 스스로 목자를 선택하기 힘들지만, 목자는 우리가 무리를 짓도록 도와주십니다. 상호 조직을 만들고 상호 관계성 속에서 공동체의 인격을 함께 만들어 갑니다. 무리 짓고 서로 사랑하고 미워해보지 않고 사랑을 어디에서 배울 수 있을까요? 가족 간의 사랑?, 친한 친구와의 사랑? 모두 사랑이지만 양무리 속의 사랑은 오직 성령에 의해 세워지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인간 본연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은사인 것입니다. 그것은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늘로부터 성령을 통해 옵니다.
“우리가 명령받은 대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1 요한 3:23
요한은 주님께 받은 명령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과 상호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하느님의 계명이라고 말입니다. 받은 대로 전해준 것이지요. 이러한 명령에 대한 선택은 우리의 몫이고 선택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해보지 않고서 사랑을 말할 수 없고, 원수를 용서하려고 노력해보지 않고서 믿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어려운 계명이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하고자 하는 사람은 능히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아주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한 에티 힐레숨. 그녀는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인 1941년 3월부터 네덜란드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기록을 일기로 남겼습니다. 그녀가 쓴 일기와 편지들은 아우슈비츠에서 그녀가 어떻게 죽음과 폭력과 절망을 대면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공포 속에서도 참된 자기를 찾고 하느님을 의지하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놓칠 수 없는 희망을 찾는 투쟁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녀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독일인에 대한 증오 대신 인간 내면의 숭고한 사랑의 가능성을 부여잡았습니다. 그녀의 깨달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닿아 있으며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녀는 포로수용소에서 절망 가운데 “무릎 꿇고” 기도하는 침묵 수행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무릎 꿇는 기도”는 그녀가 자신의 전존재를 하느님의 품에 의탁하는 그녀만의 전례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잔혹한 독일 병사들에 대한 증오를 거두고 그들 안에서도 타오르는 인간의 따뜻한 긍정의 불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했고 두려움 때문에 상실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녀의 숭고한 사랑이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그녀를 구원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걸”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녀의 숭고한 정신은 다음 글에 잘 새겨져 있습니다.
“밤에 수용소에서 판자 침대에 누워 있는데, 주위에서 여자들과 여자애들이 조용히 코를 골거나 꿈꾸면서 소리를 내거나 가만히 흐느끼거나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있다. 그들은 낮에 나에게 ‘우리는 생각하고 싶지 않고 느끼고 싶지도 않아, 생각하고 느낀다면 분명히 미쳐 버릴 거야’라고 자주 말했다. 나는 이따금 한없는 다정함으로 충만해서 몇 시간이고 잠들지 않은 채 누워서…’ 제가 이 막사의 생각하는 가슴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에티 힐레숨-근본적으로 변화된 삶] 중에서
절망과 공포 가운데서 인간에 대한 희망, 즉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젊은 여인의 숭고한 정신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절망하기에 인간은 너무나 아름다운 존재임을 그녀는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정말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그녀의 깨달음이 공포의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는 절망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에티 힐레숨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공포, 비교와 혐오에 우리의 존재를 더럽히기에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점. 물론 우리는 양들처럼 서로 밀어내기도 하고 서로 끓어 안기도 하는 존재이지만 이러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름다운 인간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고 그 힘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이란 결코 식상한 말이 아니라, 결코 실천 불가능한 계명이 아니라, 우리 안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여전히 꿈틀 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요한 일서와 에티 힐레숨을 통해 깨닫는 사랑의 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랑을 서로 나누시길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부활4주 (나해)
본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님은 착한 목자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한 무리로 모아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양 무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도 4:5-12
5 그 이튿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6 그 자리에는 대사제 안나스를 비롯하여 가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사제 가문에 속한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7 그들은 두 사도를 앞에 세워놓고 “당신들은 무슨 권한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다. 8 그 때 성령으로 가득 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9 오늘 여러분이 우리가 불구자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그가 어떻게 낫게 되었는가 하는 경위에 관해서 심문을 하는데 10 불구자였던 저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바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어 된 것입니다. 그 분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입니다. 여러분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11 이 예수는 집 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시편 118:22). 12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성시_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
. 아쉬울 것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놀게 하시고 ◯
.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 그 이름 목자이시니 ◯
.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
.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
.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
.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요한 3:16-24
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18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20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 앞에서 떳떳합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3 우리가 명령받은 대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24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_요한 10:11-18
11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2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5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18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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