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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랑의 극진한 표현”_2024.5.26. 나해_성삼위일체 대축일

James Chae 2024. 5. 26. 04:51

2024.5.26. 나해_성삼위일체 대축일

이사 6:1-7 / 시편 29 / 로마 8:12-17 / 요한 3:1-17

 

 

하느님 사랑의 극진한 표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아이들에게 교육을 어떤 아이는 한번 말하면 알아듣는데 어떤 아이는 여러 번을 말해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인내를 가지고 설명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입니다. 이해 한다고 윽박지르고 자존심을 깎아 내리는 말을 하는 순간 아이는 영원히 학습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의 덕목은 인내가 아닐까 새삼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는 교사로서의 예수님의 진면목을 요한복음을 통해서 있습니다. 유대교의 산헤드린 회원이면서 엘리트인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교사로서의 예수님의 인내심을 보여줍니다. 영적인 것을 육적으로 이해하는 니고데모의 무지와 몰이해, 그리고 인내로써 영적인 것을 설명하시는 교사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의 대화는 시종일관 묘한 긴장감 속에 진행됩니다. 하나는 무지와 몰이해로 일관하고, 다른 하나는 무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진심을 다해 인내하며 말씀하고 계심이 느껴집니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계속해서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Ἀμὴν  Ἀμὴν” 번이나 반복해서 자신이 하는 말을 강조합니다. 짧은 대화에서 무려 번이나 주님께서는아멘, 아멘 반복하십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인간의 무지의 간극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이 아닐 없습니다. 이미 요한복음 기자는 니고데모가어두운 예수를 찾아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가지 함축적인 의미를 암시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는 그가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움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요한복음의 주제인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온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가지 의미가어두운 이란 말에 중의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어떤 이유이든 그가 부담 속에서도 예수께 나아온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없습니다.

 

니고데모의 생각과 시선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 땅에서 느끼고 이해될 있는 것에 머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위로부터 나지 않으면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를다시 나지 않으면이라 번역했지만, 직역하면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이란 뜻입니다. 말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뜻합니다. 이런 이해가 없었던 니고데모는 끊임없이 인간이 과거로 소환되어 어머니의 태에 다시 들어가는 것만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니고데모와 같은 유아기적 생각은 하지 않지만, 우리도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지만, 우리의 몸과 생각과 느낌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예식을 통해 경건함을 느끼고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것이 특별하지만, “위로부터 태어남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기 받은 에도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 그냥일뿐입니다. 새로운 이름인신명 주어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세례 받기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니고데모와 똑같이 모르는 형편에 놓여있습니다. 우리 또한위로부터 태어남 대해 무지와 몰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남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통해 완성되어 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것이 바로 자기(self) 자아(ego)입니다. 자기( self) 남과 구분되는로서 존재의 중심입니다. 자기는 단지있음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자아 인격은 다릅니다. 자아는 내가임을 인식하는 기제입니다. 자기는 변하지 않지만 자아나 인격은 여러 외부적, 내부적 요인에 의해 변화 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인격을 나로 인식하는 것은 그러한 변화가 매우 서서히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충격과 외부적 자극에 의해 인격에 균열이 가면 우리 내면에서 급격한 인격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건이나 사고 이후에 깊은 트라우마를 겪고 인격의 분열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격 변화와 관계합니다. 우리의 인격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가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성장의 과정에서 환경과 상황에 따라 조금씩 인격은 변화됩니다. 회사에서 과장으로 있던 사람이 승진하여 부장이 되면 사람들은 사람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람이 상을 받거나 성취감을 느끼면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의 분비가 증가하여 성품에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과장의 인격에서 부장의 인격으로 인격이 달라짐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은 일상 속에서 점증적으로 변화를 하기 때문에 이전의 인격과 인격의 충돌이 없이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인격은자기라는 존재와 관계하면서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성장해 갑니다. 우리가 세례 시에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육적인 과거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덧입음을 뜻합니다. 과거의 인격이 죽고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重生, regeneration) 의미입니다. 하나의 자기가 바로 하나의 인격이라 생각하면 이러한 인격의 변화를 도저히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러니 니고데모는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찾아온 이유는 그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들을 보고 그가 그리스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것입니다. 안에는 이미 성서가 예언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믿음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오해와 몰이해는 그가 아직 예수가위로부터오신 분이심을 믿지 못하는 있습니다. “위로부터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천상적, 신적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이란 말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늘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자체의 생명력을 내면에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생명은 오직 성령을 통해 드러난다고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요한 3:8

 

이로써 오늘 읽은 요한복음은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의 역할을 통해 삼위일체를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요한복음에는 정확하게 삼위일체란 말은 없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각각의 활동과 역할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아들을 보내신 으로, 예수는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으로, 성령은새로운 생명 주시는 분으로 각각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삼위일체의 활동은 다음의 말씀에서 절정에 이룹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말씀은 요한복음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는 중심 구절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많은 인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세상은 죄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려 생명을 잃었지만,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는 그분의외아들 하늘로부터 땅에 보내셔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으로부터 외아들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으로 생명 주셔서영원한 생명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의 원대한 계획입니다. “보내신 (성부)” 계시고, “보냄을 받은 (성자)” 계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 계십니다. 이를 요한은삼위일체 직접적으로 명명하지 않았지만, 교회는 그렇게 전통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부들이 끊임없이 이단들을 향해 삼위일체를 주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단순히 하느님에 대한 신론이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 구원의 계획과 하느님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라 있습니다. 한갓 풀잎처럼 시들어 사라질 유한한 인간을 하느님께서 이토록 사랑하셨다는 점이 삼위일체 속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가 바로 관계성의 새로운 이름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오직 하느님 사랑의 가장 극진한 계시가 아닐 없습니다. 삼위일체를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면 교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존재론적, 신학적 진술 밖에는 없습니다. 삼위일체가 존재론적이고, 신학적인 진술 속에 갇히는 순간 그것은 사랑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으로 옮겨집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담론은 아리송한 것으로 우리에게 인식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통해 표현된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생명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멸망 선택할 것인가를 말입니다. 삼위일체를 통해 우리 인간에게는 이렇게 선택의 갈림길이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이냐 아니면심판이냐. 삼위일체는 인간이 오로지보내심을 받은 외아들 믿음으로써만 하느님의 소외로부터 벗어나 구원받을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완전한 자기 사랑의 계시임이 판명됩니다. 역사상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게 극명하게 표현된 적이 없습니다. 율법이나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은 이제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대체됐습니다. 극진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린 문제로 남았습니다. 삼위일체는 이상 어려운 신학적 담론이 아니라 하느님의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임을 우리는 그분을 향해 진심으로 감사를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관계성 속에서 표현되듯이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오늘 삼위일체를 기념하는 우리 모두에게 지금으로부터 영원이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 삼위일체주일 (나해)

 

본기도

찬송 받으실 삼위일체 하느님, 주님께서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지극한 영광과 권능을 경배하며 찬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6:1-9

1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2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다녔다(스랍은 천상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천신 가운데 하나로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의미). 3 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    
만군의 야훼,
.    
그의 영광이 땅에 가득하시다.”

4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 5 내가 부르짖었다.

.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가지고 날아와서 7 그것을 입에 대고 말하였다.

.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8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것인가?”
.   “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9 주께서 이르셨다.

.   “너는 가서 백성에게 일러라.
.    ‘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

.    “마라대신에못하리라 옮길 수도 있음

 

 

 

성시_시편 29

1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영광과 권능을
.     주님께 돌려 드려라.
2     이름이 지니는 영광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거룩한 두르신
.     주님께 머리를 조아려라.
3    주님의 목소리가
.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     영광의 하느님께서
.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
4    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     목소리는 힘차시고
.     목소리는 장엄하시다.
5    주님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6    레바논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     시룐산이 들송아지처럼 뛰게 하신다.
7,8 주님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     광야가 흔들거린다.
.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린다.
9    주님의 목소리에,
.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     숲들은 벌거숭이가 된다.
.     모두 주님의 성전에 모여
.     한결같이 영광을 기린다.
10  주께서 거센 물결 위에
.     옥좌를 잡으시고
.     영원히
.     왕위를 차지하셨다.
11  주님의 백성들아,
.     그에게서 힘을 얻고
.     복을 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8:12-17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빚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에 빚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복음서_요한 3:1-17

1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사람이었는데 2 어느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 그러자 예수께서는정말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또는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4 니고데모는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5 “정말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9 니고데모는 다시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0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11 정말 들어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너희는 내가 세상 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