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_2024.6.9. 나해_연중10주일

James Chae 2024. 6. 9. 05:42

 

 

2024.6.9. 나해_연중10주일

사무상 8:4-11, 16-20 / 시편 138 / 2고린 4:13-5:1 / 마르 3:20-35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2 고린 4:13

 

사도 바울로는 시편 116 10절을 인용하여 사도로서의 자신의 사명과 역할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에서 우리는 그가 무엇을 믿었고 무엇을 말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로서의 그의 사명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었던 것은 역사의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고, 그가 증언한 것은 이러한 믿음을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는 고린토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믿음의 정신으로 이를 믿었고 선포했다고 말입니다. “믿음의 정신 믿음의 같은 입니다. 영은 고린토교인들 안에 있는 성령이시고, 성령으로 자신도 믿었고 또한 복음을 선포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믿음과 복음 선포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성령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고린토인들에게 선포한 희망은 예수를 일으키신 자신을 비롯하여 고린토 교인들도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믿음과 고린토 교인들의 믿음이 내면에서 증거 하여 이를안다라고 표현합니다. 믿음이 단순히 감정과 느낌이 아니라 깨닫는 지혜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같은 믿음과 같은 희망 위에 사도 바울로와 고린토 교회가 함께 있음이 여기에서 강조됩니다. 둘은 하나의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이러한 편지를 것은 고린토전서에서 언급한 대로 사도 바울로가 세운 고린토교회가 바울로를 배척하고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나 분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교회에 보낸 개의 서간 번째에 해당하는 편지의 부분입니다. 고린토전서는 바울로의 번째 편지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번째 편지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린토후서 1장에서 9장까지가 바로 번째 편지인화해의 편지부분입니다. 고린토교회에 보낸 바울로의 책망을 담은 고린토전서를 읽은 고린토교회는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을 쫓아내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도 바울로와 화해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기쁨에 넘쳐 응답한 것이 바로 오늘 읽은 편지의 부분입니다. 그는 고린토 교인들을 다시 세워주고 격려하며 사도 바울로와 고린토 교회가 같은 믿음, 같은 희망 가운데 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리고 번째 편지에는 그의 기쁨과 격려를 담았습니다.

 

사도로서의 바울로의 믿음의 통찰은 현재의 고난과 부활의 희망을 말하는 16절에서 18절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영혼과 육신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사도 바울로는 여기에서 그리스인들의 통념에 빗대어 자신의 생각을 전개합니다. 아마도 고린토교인들을 염두에 발언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외적 인간내적 인간” , “환난과 영광”, “보이는 보이지 않는 ”, “유한성영원성. 이러한 이분법적 대비를 통해 자신이 바라보는 지점을 고린토 교인들에게 환기시킵니다. 오늘 본문 독서에서 읽지 않은 부분인 5 2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2 고린 5:2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드렸습니다. 갈망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이를신음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신음하며 희망을 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존 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고난 또한 함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켜지는 기대하는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현재를 신음하며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죽을 것을 바라며 신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죽음은 생명을 능가할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인내의 은사또한 필요합니다. 믿는다고, 안다고 그러한 것이 견디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인내는 그러한 믿음을 마지막까지 견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인내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인내 없이 얻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추구해 사람들은 것입니다. 씨를 뿌려도 우리는 싹을 나게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단지 심고 물을 주고 거름과 비료를 주는 것뿐입니다. 자라게 하는 것은 결국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명을 삼켰던 시간이 있었다면 죽음이 결코 호락호락 우리를 생명에게로 내어주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가족, 형제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 함께 지내며 먹고 마셨던 예수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행동을 하니 그들은 예수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 아래에 놓여 있는 자들은 생명 안에 있는 사람을 이해할 없어 오해하고 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바라보는 지점이 다르고, 삶을 느끼는 결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의 모양과 사회적 신분, 출신, 성공 여부에 집중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의 외형이나 조건들 보다는 사람 안에 있는 생명에 집중합니다. 생명이 충만한 사람은 영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가족들이 기껏 생각해 것이 예수의 이상한(?) 말과 행동에 귀신 들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미쳤다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정상이 아닌 것이지요. 

 

고린토교회를 세우고 에페소로 떠난 사도 바울로를 고린토 교회는 금방 잊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와서 그들을 속이고 현혹했는데 그들은 하루아침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바울로의 산고로 태어난 믿음의 자식들이 그를 배반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도 아니요, 신앙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믿음이 바라보는 희망의 결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한 믿음은 부활의 때까지 자라나고 성장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세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가르쳤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면서 많은 윤리적, 양심적 죄를 묵인했습니다. 그들은 교회 내에서 누가 높으냐를 따졌고, 지식에 있어서 자만하여 연약한 지체를 넘어지게도 했습니다. 결국 신앙 안에서의 그들의 자유와 어설픈 지식들이 서로를 넘어지게 것입니다. 자유가 남을 해하는 것이라면 사도 바울로는 그러한 자유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고린토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고린토 교회의 세속화는 정확하게 사도 바울로가 말한 믿음을 세속적으로 적용한 경우입니다. 그것은 세례로 깨끗해진 몸이 다시 죽을 몸을 덧입는 것일 뿐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 기독교도 고린토교회처럼 세속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없음을 봅니다. 성공주의와 기복신앙이 서로 결합되어 교회는 성공과 축복을 추구하는 집단처럼 여겨집니다. 기도의 대부분은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취업과 입시의 문제, 자녀들의 문제 등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기도 중에 믿음의 충만과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갈구하는 기도는 점점 줄어들고, 남을 사랑하기 위한 은총을 구하는 기도도 없습니다. 정의를 세우는 기도, 고통받는 자들을 품는 기도, 하느님 나라를 위한 기도는 점점 줄어들고, 대신 개인의 성공과 안녕, 교회의 교세 확장과 성장이 주요 기도제목이 됐습니다. 과연 거듭나고, 복음의 열정이 충만한 교회는 사람의 수가 많음으로 증명될까요? 사람들이 몰리는 교회들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헌금도 넘쳐나며 교세확장의 열의도 넘쳐나지만 정말 그들 안에 진정한 복음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대형교회가 믿음이 충만한 교회라면 그곳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변혁이 일어나 우리 사회의 변혁을 이끌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사교집단처럼 여겨집니다. 광화문을 가득 채운 극우기독교 단체의 집회는 정확하게 복음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덥지도 차지도 않은 우리 성공회 교회가 잘하고 있다는 뜻도 물론 아닙니다. 극우적 그리스도인들은 열정은 있지만 복음적 열정과 복음적인 삶이 없고, 우리는 복음에 대한 열정도, 복음적인 삶도 미약합니다. 그래서 가끔 신기한 생각도 듭니다. 과연 우리 성공회 안에는 어떤 믿음이 있는 걸까? 차지도 뜨겁지도 않으니 교세도 고만고만하고 전도의 열정도, 헌신의 열정도 없으니 모두가 밋밋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성공회는 몇몇 사람의 희생과 헌신 위에 가까스로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헌신하는 몇몇 사람들이 지쳐 넘어지면 새로 들어온 열정적인 사람들이 나타나 성공회라는 물레방아를 겨우 돌립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복음의 물레방아는 종종 멈춰있기도 합니다. 성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복음적인 삶을 실천하는 신자조차 드뭅니다. 복음적 삶도, 복음의 전파도 없으니 물론 성장도 없습니다. “오직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살리라 히브리서 10장의 외침이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히브리서 말씀은 믿음이 우리의 생명을 견인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보다는 다른 것을 의지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영이 살아야 정신이 살고, 정신이 살아야 육체도 생명력이 넘치는 것입니다. 영이 병이 들면, 정신도 병이 들고, 정신이 병들면 육체도 병이 드는 법입니다. 스트레스가 현대인의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는 말은 그냥 헛말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가 건강을 준다면, 마음의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취업입니까? 어떤 것을 성취해도 성취감이란 감정은 하루 이틀을 지속하기가 힘든 법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충만함은 영생을 약속합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어떤 주택의 깨진 유리창 장을 방치하면 잠시 후에 다른 유리창도 깨질 확률이 높다는 이론입니다. 마치 길을 가다가 누군가 일회용 컵을 놓고 가면 다른 사람도 자리에 일회용 컵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방치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온전했던 것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법입니다. 우리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거나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압니다. [하인리히 법칙] 하나의 대형 참사에 1 29 300 비율을 말합니다. 하나의 대형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사소한 사고가 300, 중대한 사고가 29건이 발생한다는 재난 통계 이론입니다. 세상의 모든 재난과 참사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는 연구결과입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전조 증상이 있다는 뜻입니다. 뜻은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면 모든 참사를 미연에 방지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론일 , 현실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지나친 통제와 격직성으로 이어질 여지 또한 큽니다. 안전 불감증이 문제이지만, 안전에 대한 강박증도 문제 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재난에도 이렇게 다양한 전조 증상이 있는 하물며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정말 안전합니까? 믿음에 대한 불감증도 문제이지만, 믿음에 대한 강박도 문제입니다. 발란스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 성공회가비아 메디아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비아 메디아는 차지도 덥지도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양극단도 포용할 있는 우리의 열정입니다. 우리는 좌측에 치우친 것도, 우측으로 치우친 것도 모두 중간으로 이동시키려 노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고 토론하고 함께 우리의 믿음을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갑지고 뜨겁지도 않은 믿음으론 부족합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있는 호연지기의 열정과 유연성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은 결코 혼자서 세우는 믿음이 아니라 사도 바울로와 고린토 교회가 함께 바라봤던 믿음의 희망을 가질 가능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때까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자라 가야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곁에 있는 신자들이 소중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성당이 소중하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소중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기도로 세워주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격려하고 믿어주는 그런 교회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길 바랍니다. 복음의 열정으로 모든 치우친 것들을 바로 세워 하느님 앞에 온전하게 만드는 작업을 모두 함께 나가길 바랍니다. 이러한 열정과 믿음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연중10주일 (나해) 1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알려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희망을 견고히 붙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상 8:4-11, 16-20

4 그러자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이 곳에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5 건의하였다. “당신은 이제 늙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르지 않으니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 6 사무엘이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주시오.”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야훼께 기도하니 7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8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이후 이날이때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해왔다. 너한테도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다. 9 그러니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주어라. 그러나 엄히 경고하여 왕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일러주어라.”

10 사무엘은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에게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낱낱이 일러주 었다. 11 사무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 주겠다. 그는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것이다. … 16 너희의 남종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와 나귀를 끌어다가 부려먹고 17 양떼에서도 십분의 세를 거두어갈 것이며 너희들마저 종으로 삼으리라. 18 때에 가서야 너희는 너희들이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날에 야훼께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19 사무엘이 이렇게 말해 주었건만 백성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20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줄 ,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시_시편 138

1    주여,
.      마음 다하여 감사기도 드립니다.
.     당신을 모시고 있는 이들 앞에서
.     당신을 찬양합니다.
2    거룩한 당신의 궁전 향하여 엎드려
.     인자함과 성실함을 우러르며,
    당신의 이름 받들어 감사기도 드립니다.
.     언약하신 말씀,
.     당신 명성보 크게 퍼졌습니다.
3    내가 부르짖을 당신은 들어주시고
.     힘을 한껏 북돋우어주셨습니다.
4    주여,
.     당신의 언약 말씀을 듣고서
.    세상의 모든 왕들이
.     당신께 감사노래 부릅니다.
  그들이 주께서 밟으신 길을 찬양하며
.    영광 크시다노래합니다.
6    주여,
.     당신은 높이 계셔도 낮은 사람 굽어보시고
.     멀리 계셔도 거만한 아십니다.
7    내가 고생길을 걸을 때에 살려주시며,
.     손을 드시어 살기 원수들을 치시고
.     오른손으로 붙들어 구해주십니다.
8    주여,
.     모든 나를 위해 하심이오니,
.     이미 시작하신 일에서 손을 떼지 마소서.
.     당신의 사랑 영원하시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2고린 4:13-5:1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시편 116:10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말합니다. 14 그것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그분 곁에 앉히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것은 모두 여러분을 위한 것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하느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17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것입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5:1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주시는 집입니다.

 

 

 

복음서_마르 3:20-35

20 예수께서 집에 돌아오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21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도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2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다 놓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있겠느냐? 24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나라는 제대로 없다. 25 가정이 갈라져 서로 싸우면 가정도 버티어 나갈 없다. 26 만일 사탄의 나라가 내분으로 갈라진다면 나라는 지탱하지 못하고 망하게 것이다. 27 누가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가려면 그는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집을 있을 것이다. 28 나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용서받을 있으나 29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30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더러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비방했기 때문이다.

31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냈다. 32 둘러앉았던 군중이 예수께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예수께서는누가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34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사람들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