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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쇠사슬과 습관의 폭력”_2024.6.16. 나해_연중11주일 설교문

James Chae 2024. 6. 16. 06:23

 

2024.6.16. 나해_연중11주일

사무상 15:34-16:13 / 시편 20 / 2고린 5:6-10(11-13)14-17 / 마르 4:26-34

 

 

의지의 쇠사슬과 습관의 폭력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그러나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고린 5:6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 사상에 빠져 있는 고린토 교인들을 위해 속사람과 겉사람을 구분하여 이분법적으로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장막은 영적인 것으로 나아가기에 너무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겉사람은무거운 짐에 짓눌려 신음하고, 주님으로부터 멀리 분리되어 영적인 소외를 경험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영향으로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존재는 떨어진 만큼 존재가 희박해지고, 점점 선의 결핍과 자유의 결핍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빛의 근원에서 멀어지면질수록 빛이 희미해지고 어둠과 친근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어서 주님께로 가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본인 또한 그러한 간절함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신음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인내로써 붙들라고 격려합니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서 주님 곁에 가 있든지 오직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만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2 고린 5:9

 

물론 말은 사도 바울로의 소망입니다. 그는 이러한 소망으로 고린토 교인들을 상대하고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육신을 벗어버리고 부활하여 어서 하느님께 가고 싶은 마음이 절박하나, 그는 이제 육체에 머물든, 주님 곁에 머물든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존재하는 여기에서 하느님을 기쁘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을 접할 때마다, 마치 죄인이 자신을 자책하게 됩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는 열정이 이렇게도 다를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충만한 믿음과 자부심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로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바리사이파의 힐렐 학파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엄격한 샴마이파보다 힐렐 학파는 율법의 해석에 매우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과 자신이 속한 학파에 매우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배운 율법 해석에 따라 따져봐도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은 신성모독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테반 부제를 죽이려는 무리들을 위해 그들의 겉옷을 맡는 일을 자원해서 했습니다. 돌을 던져 스테반을 죽인 사람들은 겉옷을 맡김으로 자신들의 신원을 보증했습니다. 그들은 스테반 부제가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신성모독죄를 저질렀다고 확신했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에 적극적인 증인으로서 참여하기 위해 겉옷 맡는 일을 자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을 핍박했으며,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기 위해 대사제의 허락을 받아 그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의 의지는 철저하게 율법이 만들어 놓은의지의 쇠사슬 붙들렸던 것입니다. 그의 의지는 율법의 노예였던 것이지요. 이를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내 의지가 왜곡되어 육욕(libido)이 생겼고, 육욕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습관 consuetudo)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necessitas)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왜곡된 의지에서 기인한 육욕이 인간의 습관을 좌우하고 결국 그러한 습관이 자기 자신에게 필연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이러한 악순환을 의지의 쇠사슬이라 표현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지적인 회심 하여 마니교와 결별했고, 플라톤철학의 한계도 발견했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빛으로 돌아서지 못하고의지의 쇠사슬 묶인 노예의 상태에 머무는 자신을 보고 괴로워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길 원했지만 육욕은 항상 그의 의지를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그가 무화과나무 밑에서 회심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13 13-14절을 읽고 완전한영적인 회심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회심의 경험은 사도 바울로에게서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눈이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율법의 세계관으로 하느님께 헌신했던 그의 시선과 세계관이 그리스도의 빛을 순간 그의 눈을 완전히 멀게 했습니다. 그의 눈먼 상태는 아나니아를 만나 기도를 받을 때까지 지속됐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해, 이성에 대해, 인간의 경험에 대해, 인간의 육욕에 대해 눈이 멀게 것입니다. 눈이 시간 동안 그는 자신 안의 어둠을 바라볼 있는 새로운 시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눈이 멀었고 은총에 눈이 뜨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붙들고 있는의지의 쇠사슬 정확하게 봤던 것입니다. 율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자신을 봤습니다. 율법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자신의 거룩함과 신실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총에 눈이 뜨이며의지의 쇠사슬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이전에 했던 자신의 모든 것을쓰레기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위대한 것은 그를 붙들고 있던 모든 과거의 망령인습관의 폭력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의 변화가 얼마나 급진적이었던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사도 바울로를 여전히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촉망받던 사도 바르나바가 아니었으면 사도 바울로의 회심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받기 쉽지가 않았을 겁니다. 

 

습관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자유의지와 결탁되어 있습니다. 습관으로 굳어진 것에는 죄책감도 덜합니다. 게으른 습관을 가진 사람은 습관 속에서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한두 잘못한 것들이 반복되면 습관이 됩니다. 습관으로 형성된 잘못된 생각이나 습성은 자기 합리화의 도구가 됩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이 반복되면 무서운습관의 폭력 노예가 됩니다. 사랑의 습관이면 좋으련만 남에게 불편을 끼치고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해를 끼치는 습관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이간질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도 우리는 우리를 붙드는 과거의 습관에 의해 끊임없이 폭력을 당합니다.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기도를 없는 것은 기도하지 않던 습관의 노예가 됐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는 습관이 없는 사람은 말씀을 읽지 않는 습관에 사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예배도 한번 빠지다 보면 습관적으로 교회를 멀리하게 됩니다. 모두 겉사람의 습관에 사로잡힌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회심 전과 회심 후가 너무나 극명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자신을 붙들고 있던 바리사이파의 습성과 율법의 습성을 모두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끊어낼 없으면 습관은 더욱 폭력적으로 우리를 옥죄어 옵니다. 그래서 기도하겠다고 결심하고 나면 더욱 기도하기가 힘든 상황이 전개됩니다. 말씀을 읽겠다고 다짐하면 더욱 말씀을 읽지 못할 상황들이 발생합니다. 예배에 참석해야지 하고 결심하면 주일마다 교회에 가지 못할 일들이 발생하는 법입니다. 그러니습관의 유혹 우리는 너무 쉽게 자기 합리화로 응대합니다. 그러고 나면의지의 쇠사슬 좀처럼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유의지를 붙들고 있는습관 본질을 이해한다면의지의 쇠사슬 타협이 아니라 망설임 없이 끊어버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하게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고린 5:14

 

 

사도 바울로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것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추동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뜨거운 열정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습관을 끊을 열정이 생기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보다 자기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 사랑에 빠진 자신을정신이 나갔다라고 표현합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를 보면 정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 행동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우리를 붙드는 과거의 망령에 눈을 멀게 하고 새로운 습관을 기르도록 우리를 추동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2 고린 5:17

 

 

그리스도 안에서 낡은 습관은 갔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습관, 새로운 인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속박하는습관의 폭력에서 우리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야만 가능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우리를 자유하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애를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생기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영화를 좋아하고 어떤 꿈을 가졌는지상대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고, 상대가 가장 행복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사랑의 친밀감은 서로에 대해 많은 정보들이 쌓여갈수록 더욱 커지는 법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더욱 하느님을 알기 위해 말씀을 읽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더욱 기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사랑의 교제가 형성됩니다. 그러할 우리의 습성을 버리고 새로운 인격으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우리가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인격은 그리스도의 인격임에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사랑으로 인해습관의 폭력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실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과 자신을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자기 자신과 이웃도 사랑할 있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추동이 되어 우리를 옥죄는의지의 쇠사슬 끊고습관의 폭력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장해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연중11주일 (나해) 1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없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을 내리시어 모든 일에서 우리 마음을 이끄시고 다스리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무상 15:34-16:13

34 사무엘은 라마로 돌아가고 사울은 기브아에 있는 궁궐로 돌아갔다. 35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야훼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세우셨다가 후회하신 일을 생각하며 통곡하여 마지않았다.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사울을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서 파면시켰다고 해서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을 셈이냐?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길을 떠나거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에게로 보낸다. 그의 아들 가운데서 내가 왕으로 세울 사람을 하나 보아두었다.” 2 사무엘이사울이 알면 저를 죽일 텐데 어떻게 갑니까?” 하고 여쭙자 야훼께서는, “암송아지 마리를 끌고 가거라. 야훼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면서 3 이새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러면 네가 일을 내가 알려주리라. 너는 내가 지적하여 일러주는 자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성별시켜 나에게 바쳐라.” 하고 이르셨다. 4 사무엘은 야훼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성읍의 장로들은 안절부절못하고 그를 맞으며언짢은 일로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5아니오. 좋은 일로 왔소. 야훼께 제사를 드리러 것이오. 그러니 모두들 목욕재계하고 함께 제사 드리러 갑시다.” 이렇게 일러놓고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목욕재계시킨 다음 제사에 나오라고 초청하였다. 6 그들이 나타나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바로 여기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성별하실 자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야훼께서는 사무엘에게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마라. 그는 이미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 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하고 이르셨다. 8 다음으로 이새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에 나와 서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아들도 야훼께서 뽑으신 아들이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9 이새가 다시 삼마를 보여드렸지만, 사무엘은 그도 야훼께서 뽑으신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다. 10 이렇게 이새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에 나와 뵙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아들 가운데는 야훼께서 뽑으신 아들이 없소.” 하고 11 이새에게 밖에 아들은 없느냐고 물었다. 이새가막내가 있긴 하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사무엘이 이새에게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하고 일렀다. 12 이새가 사람을 보내어 데려온 그는 볼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였다. 야훼께서 말씀을 내리셨다. “바로 아이다. 어서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13 그리하여 사무엘은 기름 채운 뿔을 집어 들고 형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 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 사무엘은 길을 떠나 라마로 갔다.

 

 

 

성시_시편 20

1    주님께 비오니, 우리 임금이 곤경에서 기도하거든
.     야곱의 하느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지켜 주소서.
2    성소로부터 임금에게 도움을 내리시고
.     시온산에서 임금을 붙들어주소서.
3    임금이 바치는 예물을 마음에 두시고
.     드리는 번제를 즐거이 받아주소서.
4    임금의 계획을 이루어 주시고,
.     그의 소원 그대로 채워주소서.
5    임금의 승리를 소리 높여 기뻐하고,
.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 높이 치키리니,
.     주여, 우리 임금의 모든 청원을 들어주소서.
6    이제는 알았습니다.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임금에게 승리 주심을,
.     거룩한 하늘에서 그의 기도 들으시고
.     오른손 힘차게 뻗어 승리 주심을!
7    누구든 병거를 믿고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    
우리는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습니다.
8     사람들은 휘청거려 쓰러지겠지만
.     우리는 꿋꿋이 넘어지지 않습니다.
9    주여! 임금에게 승리를 주소서.
.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들어주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2고린 5:6-10(11-13), 14-17

6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러나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7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8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든든하며 오히려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평안히 살기를 원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서 주님 곁에 있든지 오직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10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우리를 사실대로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12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자랑할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주어 속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있게 해주려는 것뿐입니다. 13 우리가 미쳤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우리가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온전한 것입니다. 14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서_마르 4:26-34

2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놓았다. 27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29 곡식이 익으면 사람은 추수 때가 알고 낫을 댄다.”
3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있을까? 31 그것은 겨자씨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32 심어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크게 자라고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비유로써 말씀을 전하셨다. 34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뜻을 풀이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