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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가난과 부유함”_2024.6.30. 나해_연중13주일

James Chae 2024. 6. 30. 05:48

 

2024.6.30. 나해_연중13주일

사무한 1:1, 17-27 / 시편 130 / 2고린 8:7-15 / 마르 5:21-43

 

 

진정한 가난과 부유함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탈도 많고 말도 많은 헌금에 대해 오늘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귀한 지혜를 전해줍니다. 먼저 사도 바울로의 물질관을 살펴보기 전에 과연 하느님께서는 부와 가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살펴보길 원합니다.

 

부자 청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주님을 따르라고 했더니 부자 청년은 고민하며 갔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를 멀리하고 가난을 사랑해야 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부를 경멸하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두 하느님의 축복으로 부유함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이야기는 거지 나자로가 단지 가난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부자로부터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사후에 위로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가 아브라함 곁에 있을 있었던 것은 그가 살아생전에 가난했지만,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신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것은 그가 부유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를 자기 자신만을 위해 독점했고 그것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가 나쁘고 가난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부나 가난이나 모두 하느님 앞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소유가 중요한 아니라, 존재가 하느님 앞에 불경하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서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2 독서에서 우리는 고린토 교회의 상황을 유추해 있습니다. 아카이아 속주에 있는 고린토는 로마와 그리스, 그리고 소아시아를 잇는 무역과 상업의 요충지였습니다. 고린토 교회는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과 문화의 혜택을 받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여유로운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가난한 마케도니아 교회의 헌신에 대해 고린토후서 8 1-7절에 칭찬을 합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로가 보기에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라고 언급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헌신은 많은 교회의 본이 됐습니다. 그러나 고린토교회는 전에 가난한 이스라엘 교회를 위한 봉헌을 서원을 하고도 아직도 헌금을 모금하는데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헌금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에 가져갈 이방인 그리스도 교회의 사랑과 믿음을 증명할 봉헌금이었습니다. 고린토교회는 이를 티토와 함께 작정했지만 아직도 인색하게 망설였던 같습니다. 그래서 6절에서 사도 바울로는 마케도니아 교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티토를 고린토 교회에 다시 보냈다고 설명합니다. 이때 티토가 들고 편지가 오늘 우리가 읽은화해의 편지”(2 고린 1~9)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인들을 이상 책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서원했던 봉헌금에 대해서 그들을 윽박지르거나 채근하는 대신 7절에서 그들의 믿음과 헌신을 먼저 추겨 세워주며 다시 한번 고린토 교회의 믿음을 보여달라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인색하지 말고 후한 인심을 가지라고 격려한 것입니다. 고린토 교회보다 훨씬 가난한 마케도니아 교회의 본을 본받으라고 조심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의 신자들은 매우 가난했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부유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드리려 깨끗한 양심으로 봉헌을 했고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들의 극심한 가난은 이미 모든 교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결코 가난하지 않아 후한 인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 머물면서 고린토 교회의 신세를 전혀 지지 않으면서도 마케도니아 교회들 특히 필립보 교회의 후원은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부자 교회의 도움은 피하는 대신 가난한 교회의 도움은 적극적으로 받은 것이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로가 벼룩의 간을 빼먹는 사람처럼 느껴지시나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세속적 지식에 충만했던 고린토 교회에 대해서 기가 죽어서 그렇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는 마케도니아 교회의 후한 인심이 그리스도의 사랑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들은힘닿는 정도가 아니라 이상을 봉헌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사도 바울로의 사역에 힘이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신자들은 베풂으로써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입니다. 아마도 티도 편에화해의 편지 받은 고린토 교인들은 많은 도전과 반성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도 바울로는 물질과 봉헌에 대해 가지로 자신의 주장을 폅니다. 그의 주장은 전혀 강압적이지도, 강요도 아닌 매우 정제된 언어로 그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육신과 자기 비움, 케노시스 그리스도론을 봉헌의 근거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유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분의 가난으로 우리가 부유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풍족한 영적 풍요를 누리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분께서는 풍성한 자신의 신성을 내려놓으시고 가난한 인성을 덧입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분의 충만한 신성으로 이끌고자 하신 하느님의 뜻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이에 대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성탄절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이 완전한 선물을 받을 자격 있는 이들로 만드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시고 아버지와 동등하신 그분께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우리와 같은 이가 되셨고 우리를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새로이 만드십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성탄절 설교문] 중에서

 

 

예는 이미 언급한 마케도니아 교회들입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물질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있었습니다. 낮아짐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높아짐입니다. 가난함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부유함입니다. 죽음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자신을 비워 가난해지신 것처럼 우리도 먼저 가난해져야만 그분의 풍성함을 물려받을 있습니다. 가난이 어디 물질적인 가난만이겠습니까? 인색함이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모두 하느님 앞에 불경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욕심과 인색함을 내려놓을 마케도니아 교회처럼 풍성한 영적인 은총을 얻을 있습니다. 빌립피, 데살로니카, 베레아 , 사도 바울로가 개척한 마케도니아 교회들은 물질적인 가난보다 영적인 가난을 두려워한 교회였습니다.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것이므로 세상의 물질적 소유에서 자유해집니다. 그들의 자유함이 이렇게 영적인 풍성함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번째는만나 예를 통해 사도 바울로는 봉헌금의 정당성을 설명합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2 고린 16:18 (출애 16:18)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중에 아침 일찍 해뜨기 전에 광야로 나가야 만나를 거둘 있었습니다. 욕심을 부려 많이 거둔 자가 있었지만, 다음날이 되면 구더기가 생겨 먹지 못하게 됐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출애 16) 그러니저마다 먹을 만큼 일용할 양식의 분량만큼만 모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하루 생활하기에 적절한 양만을 거두도록 하느님은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건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은 만나의 은총의 기쁨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에 그것을 매일 거두러 나가는 것조차 힘들어했을 겁니다. 종국에는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만나밖에 없다니,”(민수 11:6)라고 하면서 모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달라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자족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 허망한 욕망으로 더욱 허기져 갔습니다. 

 

인간은 은총도 남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많이 받아야만 감사할 아는 존재들입니다. 남들보다 내가 하느님의 복을 받아야만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분량의 은총을 받으면 그것을 은총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모두가 받는 것은 하나도 감사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보편은총에 대해 금방 실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공기가 사라져봐야 공기의 귀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건강이 나빠져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안정된 삶이 무너져봐야 일상의 안정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깨닫습니다. 자족하는 마음대신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마음을 키우면 어떠한 은총으로도 만족되지 않습니다. 남보다 많이 만나를 거둬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보편은총 만족하지 못하고특별 은총 간구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하느님께 인정받은 사람처럼 느껴지고 자기만이 하느님의 복을 독점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소유로써 은총의 가치를 치환시키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진정한 가난은 이러한 탐욕스러운 마음, 인색한 마음, 옹졸한 마음, 감사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그러할 인색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풍요하신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의 맛을 우리는 진정으로 누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많이 가졌다고 자랑할 것이 없고, 적게 가졌다고 의기소침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은총을 받았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고 적은 은총을 받았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달란트 받은 자나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하나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만나를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많이 거둔 자는 적게 거둔 자와 나누고 적게 거둔 자는 많이 거둔 자에게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무상으로 받았으니 무상으로 나누는 것이 만나의 경제관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난한 사람이 풍요해지면 그것을 다시 갚을 날이 겁니다. 이러한 상호 나눔을 통해 인간은 탐욕을 버리게 되고 자족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께 인색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린다면 우리의 곳은 또한 그분이 다시 채우십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웃과 나누면 것만큼 하느님께서 채우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의 총량은 공평합니다.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모두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자신의 풍성함을 포기하고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풍성함으로, 하느님의 풍성함으로 초대하시기 위해 성육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을 내려놓고, 우리의 인색한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후에 그분의 가난함 속에서 풍성한 그분의 신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 내어드릴 자리가 없는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먼저 비워야만 채울 있습니다. 웅켜쥐고 있으면 새로운 것을 얻을 없습니다. 더러운 것이 가득하면 성스러운 것이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습성을 쓰레기처럼 과감하게 버려야만 새로운 습성, 새로운 인격, 그리스도의 인격을 담을 있습니다. 고린토 교회처럼 인색해지지 말고, 마케도니아 교회들처럼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관대한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가난함 가운데서도 풍성하게 나눔을 실천했던 마케도니아 교회처럼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기도하며 함께 서로를 세워가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연중13주일 (나해) 1

 

본기도

그리스도여, 주님은 어려움 중에 있는 우리를 보살펴주시나이다. 비오니, 어떤 처지에서든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기도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얻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1독서_사무하 1:1, 17-27

1 사울이 죽은 뒤였다. 다윗이 아말렉 군을 쳐부수고 시글락에 돌아와서 이틀을 묵고, …
17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가를 지어 18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노래는 야살서(고대 시들을 모은책으로, 여호 10:13에서도 인용) 기록되어 있다.
19  
이스라엘의 영광이
.    
위에서 죽었구나.
.    
, 용사들은 쓰러졌구나.
20  
소문을 갓에 알리지 말라.
.    
아스클론 거리에 퍼뜨리지 말라.
.    
불레셋 계집들이 좋아하고,
.    
오랑캐 계집들이 좋아 날뛸라.
21  
길보아 산악에는
.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고,
.    
소나기도 쏟아지지 아니하리라.
.    
거기서 용사들의 방패는 더러워졌고,
.    
사울의 방패는 기름칠도 않은 버려졌구나.
22  
요나단이 한번 활을 쏘면
.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    
살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
.    
사울이 한번 칼을 휘두르면
.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    
칼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
23  
사울과 요나단은
.    
살았을 그렇게도 정이 두텁더니,
.    
죽을 때도 갈라지지 않았구나.
.    
독수리보다도 날쌔고,
.    
사자보다도 힘이 세더니.
24  
이스라엘의 딸들아,
.    
주홍색 옷을 입혀주고 옷에 금장식을 달아주던
.    
사울을 생각하고 통곡하여라.
25  
, 용사들이 싸움터에 쓰러졌구나.
.    
요나단이 위에서 죽었구나.
26  
나의 , 요나단,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    
형은 나를 즐겁게 해주더니.
.    
형의 남다른 사랑,
.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없었는데.
27  
, 용사들은 쓰러지고,
.    
무기는 사라졌구나.

 

 

 

성시_시편 130

1,2 주여,
.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     주여, 부르는 소리 들어주소서.
.     애원하는 소리, 기울여 들으소서.
3    주여,
.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     감당할 누구이리까?
4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5    나는 주님 믿고 믿어
.     나의 희망 말씀에 있사오니,
6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옵니다.
7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     이스라엘이 주님을 기다리옵니다.
.     인자하심이 주님께 있고
.     풍요로운 속량이 그에게 있으니
8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2고린 8:7-15

7 여러분은 모든 일에 뛰어났습니다. 믿음이나, 언변이나, 지식이나, 열성이나, 우리에 대한 사랑에서 여러분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은혜로운 모금 사업에 있어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8
이것은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일에 열성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러분의 사랑은 얼마나 진실한가를 알아보려는 것뿐입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10 구제 사업에 대해서 의견은 이렇습니다. 일은 전에 여러분이 먼저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자원해서 일이니 여러분이 완성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1 이제 일을 마무리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에 품었던 의욕을 실천에 옮겨 자기 힘이 자라는 대로 일을 완성하라는 말입니다. 12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가진 것에서 얼마를 바치든지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13 내가 지금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해주면서 여러분에게만 괴로운 부담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평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14 지금 여러분이 넉넉하게 살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때에는 또한 여러분의 궁핍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공평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15 이것은 성서에,
.   “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   
 출애 16:18
기록된 대로입니다.

 

 

 

복음서_마르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다시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계셨을 때에 22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와서 예수를 뵙고 앞에 엎드려 23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집에 오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서 수께서는 그를 따라 나서시었다.
24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갔다. 25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두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26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심해졌다. 27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여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손을 대자마자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있었다. 30 예수께서는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군중을 둘러보시며누가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은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보시며 옷에 손을 여자를 찾으셨다. 33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 드렸다. 34 예수께서는 여자에게여인아,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 예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께 폐를 끼쳐드릴 필요가 있겠습 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는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회당장에게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사람들이 울며불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떠들며 울고 있느냐?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코웃음만 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내보내신 다음에 아이의 부모와 제자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탈리다 .” 하고 말씀하셨다. 말은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는 일어나서 걸어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광경을 사람들은 놀라 마지않았다. 43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