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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일치・화해”_2024.7.21. 나해_연중16주일

James Chae 2024. 7. 21. 06:52

 

 

2024.7.21. 나해_연중16주일

사무하 7:1-14 / 시편 89:20-36 / 에페 2:11-22 / 마르 6:30-34, 53-56

 

 

평화・일치・화해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노무현의 죽음’, ‘박근혜의 탄핵 우리나라 정치사에 커다란 상처와 나쁜 흔적을 남겼습니다. 노무현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시민들은 안타까움과 분노를 보수체계에 대한적개심으로 분출했습니다. ‘촛불의 혁명이라 불리는 시민 혁명의 근저에는 이러한적개심 뿌리 깊게 깔려 있습니다. 결과 보수의 아이콘이라 여겼던박근혜의 탄핵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박근혜를 지지하는 보수층에게 또다시 적잖은 좌절과 분노를 안겼습니다. 결과보수의 적개심 탄생합니다. 이후 우리 사회는 좌우진영으로 나뉘어 신냉전체계를 유지하며 서로에 대한 경쟁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분노로적개심의 정치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에 대한 수사나 공격이 전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여론의 향방이 정책 논쟁과 토론보다도 상대에 대한적개심 더욱 부추기는 행태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정은 무능력해진 오래이고, 좌우로 나뉜 양진영은 끊임없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무기로 상대를 뭉개고적개심 표출하는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국민들의 생활은 날로 피폐해가기만 합니다. 민생을 위한 정책은 실종되고 당쟁과 진영싸움만 만연합니다. 언론은 이미 중재와 견제의 역할을 잊은 오래이고, 대신 언론기업의 입맛에 따라 여론을 생산해 내기 바쁩니다. 곳곳에서 자영업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많은 실업자들과 구직자들의 눈물과 한숨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서민들의 소리와 요구는 좌우대립의 포화 속에서 점점 묻혀가고 있습니다. “평화, 일치, 화해라는 말은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유치원생들이나 초등학생들의 다툼보다 유치한 정국을 보면서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자괴감마저 듭니다. 과연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적개심의 장벽, 휴전선보다 높고 길게 쳐진 장벽을, 우리는 과연 허물 있을까요? 정의는 실종되고, 사법기관의 공정성도 바닥에 떨어진 시국에서 우리는 과연평화와 일치, 화해 말할 있을까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처음에는 유지했습니다. 십일조와 안식일, 율법 준수, 조상들의 율례 준수, 할례 준수 등을 초기에는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모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유대교에서 기다리던,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아직 예수를 존재론적으로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역사적 예수 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하느님의 아들이란 이름을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성을 말해주는 이름으로 인식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는하느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신 으로, 하느님의 전권을 받으신 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 또한 공생애 기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복음을 전하셨고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돌렸고 역사적 예수보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와 상반된 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와 초대교회의 차이는 점점 벌어져갔습니다. 그러한 어색한 관계는 아마도 서기 70 8 29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이후에 급격하게 멀어졌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제 이스라엘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자신들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박은 이스라엘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묵은 백성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유다계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자신들을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유대인들은 핍박했고, 결국에는 서로가 영원히 다른 길로 가게 됐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차이와 다름에서 오는 적개심을 극복할 없었습니다.

 

이렇게 유대교와 갈등을 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와 결별 후에 이제 새로운 갈등에 직면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다계 그리스도인 간에 갈등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서신에도 언급됐듯이, 할례와 우상제물에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는 그룹 간에 매우 심각한 문화적 충돌을 가져왔습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파는 대부분의 고기들은 모두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니 우상숭배의 혐의를 받게 것입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점을 지적했고, 할례를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서신들은 이러한 갈등을 풀기 위한 그의 진솔한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입으로 들어간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로도 음식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음을 고린토전서 8장에서 논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고기를 먹는 행위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선언합니다. 우상이나 고기가 문제가 아니라 형제 사랑이 방해받는 것이 문제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사랑에 어떠한 장벽도 허용되지 않듯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어떠한 장벽도 허용되어서는 된다는 사도 바울로의 결의가 읽힙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개역성경의 문체가 결의에 있어서 개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 8:35-39 / 개역성경

 

하느님과 우리, 우리 형제들과 형제들 사이에 어떠한 것도 하느님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벽이 없음을 사도 바울로는 선포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을 끊을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형제 우리의 관계도 아무도 가로막을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에페소서도 이러한 사도 바울로의 생각을 정확히 반영합니다. 그것은 서로 상종할 없었던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있다는 희망의 선포입니다. 에페소서는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비교해서 세상에서 하느님도, 희망도 없던 이방인들이 이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됐다고 말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율법이나 규범, 할례 등은 이제 이상 사이를 가르는 장벽이 없음을 말합니다. 에페소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경륜을그리스도의 신비라고 말합니다. “신비 감추어졌고, 드러나지 않는 모든 현상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경륜.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하느님의 백성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신비의 일부가 계시 됐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끝까지 불순종했습니다. 하느님께 불순종한 대가는 참으로 가혹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의 시대까지 구약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배반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신비와 경륜에 순종하여돌아오라외쳤지만, 이스라엘은 결국에 그들이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메시아조차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의 원가지인 이스라엘이 잘려나간 자리에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을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에페소서가 말하는하느님의 신비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라는 말은 유대묵시문학의 산물입니다. 에페소서는 이러한 감추어졌던 하느님의 신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서로를 가르는 적개심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하느님의 백성 되는 은총이 주어진 것입니다. 신비를 감당할 힘을 새로운 하느님의 공동체인교회 위임하셨다고 에페소서는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하느님의 경륜에 대한 서사가 마치 동화나 소설같이 느껴지십니까? 진실만을 말하면 아무도 믿고 진실에 거짓말을 교묘히 섞어야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는데, 정말 이러한 서사가 진실과 거짓이 섞인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세상은 그렇게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을하느님의 신비라고 고백합니다. 

 

20세기 인간 사유에 포스트모던이란 새로운 지평을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바람에 인간은 이상 하느님과 교환할 가치를 상실한 상환 불능의 상태에 놓이게 됐다고 말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마치 상거래의 가치를 말해주는교환가치 설명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과 인간이 상호 교환하는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은 자체로 아름다우며, 자체로 가치를 지니며, 그것은 아무런 교환할 등가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교환가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교환가치는 사랑 자체입니다. 사랑의 등가물은 오직 사랑 자체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사랑에 대응하는 등가물은 없습니다. 사랑에 교환가치기 주어진다면 그것은 교환 조건이 됩니다. 조건이 주어지는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반증할 뿐입니다. 사랑은 단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속에서만 감지됩니다. 사랑에 대한 등가물이 없기 때문에 사랑은 인간의 사유의 영역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움직임 속에서, 어떤 행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한 희생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고 아껴주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가운데만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등가물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상대에게 다시 돌려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느님께 속하며 그분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이렇게 이해될 있습니다.

 

평화의 기쁜 소식

사랑은 평화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들은하느님의 평화 말해왔습니다. 메시아가 등장하시면 진정한 이스라엘의 평화가 도래한다고. 그러나 평화는 모든 갈등과 갈라진 것이 먼저 화해되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서로의 앙금을 풀고, 서로의 갈등을 풀고, 서로에 대한 미움을 진정한 평화는 도래합니다. 그러므로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해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가르는분리된 벽과 적개심 허무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적개심 미움이 극에 달했던 십자가에 그분이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적개심과 분노는 십자가에 벌거벗겨져 매달린 33살의 청년에게 집중됐습니다. 그를 향한 적대자들의 기소의 내용은 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많은 불가촉천민들과 식사를 하시고, 성전을 파괴할 음모를 꾸몄다는 것입니다. 그는 심판받는 내내 침묵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란 죄목도 적대자들이 입에서 먼저 나온 것입니다. 지나친 고문으로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금방 쓰러지실 것같이 지친 그분을 그들은 무자비한적개심과 분노 채찍질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성서의 예언은 조금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신들의적개심과 분노 하느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며 그를 십자가에 박은 것입니다. ‘적개심과 분노 이렇게 사람을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적개심과 분노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없어서, 자기의 것이 중요하고 남의 것을 무시하는 풍토에서 우리는 이러한적개심과 분노 보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 않으면 결코 상대의 말에, 상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적개심과 분노로 가득한 것은 우리 근현대사의 깊은 심연에서 흐르는 상호대립의 관계 때문입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충성한 자들과 독립운동을 자들, 미국을 추종한 사람들과 소련을 추종한 사람들, 군부독재를 옹호한 사람들과 독재에 저항한 사람들, 자본주의에 순응한 사람들과 자본주의에 대항한 사람들, 환경파괴를 옹호한 사람들과 이를 반대한 사람들우리 사회는 양분된 가치를 가지고 서로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극명하게 대치해 왔습니다.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는 사람들이나, 촛불을 드는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민족이지만 우리는 각자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며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분출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문화가 실종된 우리 사회는 서로의 다름과 차이 때문에 서로를 적으로 규정합니다. 자기에게 이로우면 자기편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적이 되는 사회. 그래서 심지어 교회에서 조차도 신자들은 목회자를 가르기를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면, 자기에게 대해주면 좋은 목회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무능한 목회자가 됩니다. 모두가 자기의 취향, 자기의 생각, 자기의 경험을 하느님보다, 역사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역사조차도 자기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취사선택을 하니 세상을 반쪽만 수밖에 없습니다. 인터넷과 유튜브의 검색 알고리즘은 더욱 이러한 성향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좌편향적인 사람들이나 우편향적인 사람들이나 인터넷에 접속을 하면 검색 알고리즘에 의해 자기가 보고 싶은 기사와 콘텐츠들에만 계속 노출이 됩니다. 그러니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보고 느끼게 됩니다. 거기에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이해의 여지가 완전히 실종됩니다.

 

평화, 일치, 화해

오늘 에페소서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중요한 가치들을 다시 하느님 안에서 깨닫게 합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유대교 입장에서나 그리스도인 입장에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하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나 민주주의나 모두 자본주의 앞에서는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구소련을 붕괴시킨 힘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모한 자본주의의 힘입니다. 이제 자본주의는 중국의 사회주의와 공모하여 새로운 국가 체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팍스 아메리카나 자본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있다는 착각에 우리를 빠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이 바로 맘몬을 숭배하는 것임을 압니다. 우상숭배는 반드시 평화의 명목으로 그에 상응하는 등가물을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세상은 이미 교환가치를 상실한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자본에 의해 마치 세계에 평화가 깃든 착각하지만, 자본의 지배 아래 있는 국가나 기업, 개인들도 모두 부채로 살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자와 화폐의 교환가치가 있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 부채와 빚이 모든 실물경제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부채가 현대 문명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빚의 규모는 313 달러, 41 원이라고 합니다. 지구의 무게만큼이나 상상이 가지 않는 숫자입니다. 실물경제는 사라지고, 자산경제가 활성화되는 이러한 현상은 더욱더 사회를 교환불가능의 사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환불능 상태에 놓인 현대인들은 노동시장에서도 금융시장에서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노동이란 교환가치는 이제 AI 의해 조금씩 대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평화, 일치, 화해 과연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닐까요? 우리는 정말 우리와 생각과 세계관,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보면 불가능에 가깝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본주의적인 생각이고, 하느님의 관점에서 에페소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에페 2:16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다라고 에페소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의 공모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불가능한 교환의 자본으로 세상이 움직여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불가능한 교환의 사랑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자식을 위해 희생할 부모님들이 있고, 친구와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사람들이 아직 있습니다. 인본주의와 자본주의는 하느님의 십자가를 무의미로 만들었지만, 그들이 버린 돌은 하느님의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은 셈이 될 것입니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내십시오. “ 로마 12: 20~21

 

말씀은 우리 모두가 상대를 판단하는 자리에 앉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형제를 판단할, 타자를 판단할 권위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자세. 다름과 차이가 상대를 적으로 만드는 작금의 세태에 대항하여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자세. 이러한 결의가 없다면 우리는 무의미와 불가능한 교환이 판을 치는 세대를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인본주의의 공모는 매우 치밀합니다. 그것은 모든 하느님의 가치들을 무의미로 만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만든 자신들 만의 평화를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안일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가치를 알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실천할 결기가 부족함을 부끄럽게 느낍니다. 다름과 차이는 이상 우리를 가르는분리된 벽과 적개심 없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가르는 장벽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미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상 우리는 서로를 가르는 어떠한 장벽도, 우리의 평화와 일치를 깨는 어떠한 적개심도 허용해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 나오는 우리를 삼킬으르렁대는 사자 우리 도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다름과 차이에서 오는 적개심에 속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함께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평화, 일치, 화해라는 하느님이 주신 귀한 선물을 함께 지켜나가길 빕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고 우리는 그러한 일을 하도록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세상을 감당할 힘을 주님께서 주시길 시간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연중16 (나해) 1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의 우리 생명의 시작이며 끝이 되시나이다. 비오니, 세상의 모든 유혹과 고통중에서 우리를 인도하시어 영원한 평화를 주시는 주님께 이르도록 지켜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무하 7:1-14

11야훼께서 사면의 원수를 물리쳐주셨으므로 다윗 왕은 궁에서 마음놓고 살게 되었다. 2 그렇게 되자 왕은 예언자 나단에게 말하였다. “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렇게 송백으로 지은 궁에서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모셔둔 그대로 있소.” 3 나단이 왕에게 아뢰었다. “야훼께서 함께 계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4 , 야훼의 말씀이 나단에게 내렸다. 5너는 나의 다윗에게 가서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일러라. ‘내가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6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던 때부터 지금까지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녔고, 안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7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동안, 백성 이스라엘을 맡겨 보살피게 어느 영웅에게 어찌하여 나의 집을 송백으로 지어주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8 너는 이제 나의 다윗에게 만군의 야훼의 말이라 하며 이렇게 일러주어라.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내다가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9 그리고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들을 앞에서 없애버렸다. 세상에서 이름난 어떤 위인 못지않게 이름을 떨치게 해주리라. 10 나는 백성 이스라엘이 머무를 곳을 정해 주어 곳에 뿌리를 박고 전처럼 악한들에게 억압당하는 일이 없이 안심하고 살게 하리라. 11 지난날 내가 위정자들을 시켜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던 때와는 달리 너희를 모든 원수에게서 구해 내어 평안하게 하리라. 야훼가 왕조를 일으켜 너희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리라12 네가 만큼 살고 조상들 옆에 누워 잠든 다음, 몸에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터이니 그가 국권을 튼튼히 하고 13 나에게 집을 지어 바쳐 나의 이름을 빛낼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를 영원히 든든하게 다지리라. 14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아들이 되리라.

7:1-29 1역대 17장을 참조하십시오.

 

 

성시_시편 89:20-36

20  나는 나의 다윗을 찾아내어
.     나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주었다.
21  내가 손으로 그를 돕겠고
.     팔로 그를 강하게 하리니
22  원수가 그를 당해 내지 못하고
.     간악한 자도 그를 괴롭히지 못하리라.
23  내가 그의 면전에서 그의 적들을 짓부수고
.     원수들을 쳐부수리라.
24  나의 진실과 사랑이 그의 곁에 있으리니
.     그가 이름으로 뿔을 높이 들리라.
25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뻗치게 하고
.     오른손을 강에까지 뻗게 하리니
26  그는 나를 불러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     구원의 바위이십니다하겠으며,
27  나는 그를 맏아들로 삼아
.     세상 임금 중에 가장 높은 임금으로 세우리라.
28  그에 대한 나의 사랑, 영원히 간직하겠고
.     그와 맺은 나의 계약, 성실하게 지키리라.
29  길이길이 그의 후손 이어 주리니,
.     그의 왕조는 하늘이 무너지기까지 이어가리라.
30  그러나, 만일 그의 자손이 나의 법을 저버리고
.     계명을 따라 살지 않으면,
31,32  명을 어기고 정해 법도를 지키지 않는다면
.     나는 죄를 채찍으로 다스리고
.     잘못을 매로써 치리로다.
33  그러나, 사랑만은 거두지 않으리라.
.     성실만은 지키리라.
34  맺은 계약 틀림없이 지키고,
.     입으로 말한 변경하지 않으리라.
35  나의 거룩함을 걸고 한번 맹세하였거늘
.     어찌 다윗을 속이겠느냐?
36  그의 후손은 길이길이 이어지고
.     그의 왕조, 앞에서 태양과 같으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에페 2:11-22

11 이방인으로 태어난 여러분, 지난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단지 몸에다 사람의 손으로 행하는 할례를 받은 소위 할례자들로부터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12 여러분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이스라엘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세상에서 희망도 하느님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13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15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나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칠십인역 이사 57:19, 52:7; 즈가 9:10 18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시민이며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21 건물은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22 여러분도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 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_마르 6:30-34, 53-56

30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 3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쉬자.” 하고 말씀하셨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예수의 일행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 33 그런데 사람들은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러 동네에서 모두 달려나와 육로로 해서 그들을 앞질러 곳에 갔다. 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주셨다민수 27:17(1열왕 22:17; 에제 34:5 참조) …

53 ¶ 그들은 바다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고 55 근처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병자들을 요에 눕혀가지고 예수가 계시다는 곳을 찾아 그리로 데려왔다. 56 마을이나 도시나 농촌이나 어디든지 예수께서 가시기만 하면 사람들은 병자들을 장터에 데려다 놓고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사람은 모두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