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18. 나해_연중20주일
열왕상 2:10-12, 3:3-14 / 시편 111 / 에페 5: 15-20 / 요한 6:51-58
“믿음의 실재와 가상현실”
영성체와 성육신의 영성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디지털, 너무나 익숙하고 흔한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를 디지털 시대라고 말하는데 과연 디지털이 무엇입니까?
대부분 아날로그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디지털은 아날로그와 상반된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늘 아날로그적입니다. 즉 끊김이 없이 시간과 장소와 운동이 연속적으로 관계성 안에서 구성되고 작동됩니다. 그러므로 아날로그의 세계를 정보로 기록하는 것은 매우 많은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어 도서관의 방대한 정보의 양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전자도서관은 단순히 프로그램 안에서 디지털로 정보가 기록되고 보관되니 거기에는 장소도 필요 없고 정보 처리의 시간도 매우 단축됩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디지털은 아날로그 세계를 0과 1이라는 이진법으로 단순화시켜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과거 정보를 전달하던 봉화를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그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빠르게 달려가든지 아니면 파발마를 타고 그 정보를 전령이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봉화라는 새로운 방식은 정보처리를 디지털화된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이 산에서 봉화를 올리면 저 멀리 산에서 그 봉화를 보고 이어서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산과 저 산 사이에 이동의 필요가 없어져서 정보 처리 속도가 매우 신속하게 이뤄집니다. 파발마로 달려가면 물을 건너고 언덕과 숲도 지나고, 가다가 쉬기도 하고 물도 마시고 하면서 이뤄지던 정보처리의 모든 과정들이 생략됩니다. 한마디로 봉화는 중요한 정보만 전달하고 저 산과 이 산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소한 사건들과 불필요한 정보는 무시됩니다. 시간과 거리가 단축되고 노동력도 줄었습니다. 디지털로 기록된 CD나 음악파일들은 이와 같이 0과 1로써 필요한 정보만 기록함으로써 그 이외의 잡음은 모두 제거합니다. 그래서 전하고자 하는 정확한 악기의 원음만을 골라 기록할 수 있는 것입니다. LP판의 지지직하는 잡음의 정겨움이 CD나 음악파일에서는 사라집니다. 파발마를 타고 열심히 정보를 전달했던 말과 전령의 노력과 정성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은 디지털 세계에서는 완전히 필요 없는 것이 됩니다. 디지털 세계에는 이렇게 이 아날로그 세계의 다양한 소소한 것들이 중요한 정보에 의해 완전히 간과되고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 만큼 인간의 삶의 소소한 것들이 전혀 “쓸모없는 기능”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디지털의 세계는 아날로그의 세계를 0과 1이라는 두 가지의 수 안에 모두 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간소화되어 인간의 노동력은 이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점점 필요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날로그의 객관적인 실재는 모두 디지털화되어 전류의 흐름과 끊김에 따라 기록됩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지만, 우리는 디지털화된 정보를 읽고 사용할 수 있는 기기들 덕분에 전혀 불편함 없이 아날로그의 세계 속에서 디지털화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디지털이 가져다준 많은 편의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나 휴대폰은 디지털로 처리된 정보를 우리가 아날로그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변환해 주는 기기들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기가 곧 디지털의 세계는 아닙니다. 0과 1로 처리된 정보를 아날로그식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늘 이를 해독하는 프로그램과 이를 작동시키는 기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보는 디지털인데 우리가 사용하는 방식은 늘 아날로그적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AI라는 인공지능은 디지털을 아날로그로 변환시킬 필요가 없이 직접 디지털 신호를 디지털로 이해하고 처리합니다. AI는 아날로그 세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AI는 오직 디지털화된 세계만 이해합니다. 그것은 아날로그적인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것은 보들리야르가 20세기에 예언한 대로 “가상현실” 즉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세계인 것입니다. 시뮬라크르의 관점에서 이 아날로그의 세계는 전혀 의미가 없는 세계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세계가 0과 1로 변화됩니다. 0과 1 사이의 무한수가 존재하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 생략됩니다. 0에서 전류가 흐르지 않고 1에서 전류가 흐르는 이 단순한 전류의 흐름에 따라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이 시뮬라크르의 세계는 전혀 아날로그의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현실”만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가상현실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실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철학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고, 0과 1 이외의 무한은 무시되며, 초월에 대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디지털의 세계는 분명히 이 아날로그 세계와 다른데 우리는 많은 프로그램과 기기들 때문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뿐입니다.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봉화를 통해 전달된 정보만 중요하지 파발마를 끌고 정보를 전해준 사람의 삶과 노동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봉화를 밝히는 데 스위치 역할을 하는 사람 하나만 있으면 족합니다. 컴퓨터의 스위치를 켜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인간에게 노동이 사라지니 결국 인간의 존엄 또한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여기에는 땀 흘리는 육체가 쓸모없는 것이 되고, 세상의 고통과 아픔, 삶의 의미를 찾는 철학적 사유도 전혀 쓸모없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프로그램화되고 인간의 사고와 기술도 모두 프로그램화되어 처리됩니다. 모든 것이 정보화되고 프로그램화되고 나면 생각하는 인간에게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인간은 이렇게 단순히 스위치를 켜는 끄는 존재일 뿐일까요?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디지털의 세계에 대해 말씀을 드린 것은 이 디지털의 세계는 분명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과 비슷한 모종의 음모까지 느껴집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이러한 디지털의 세계를 절대로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디지털의 세계는 프로그램으로 처리되고 이를 판독하는 기기가 없으면 우리도 인지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단지 전류의 흐름과 끊김의 반복일 뿐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처럼 우리가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사유로 사고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가상현실의 관점에서는 인간은 단순히 스위치를 켜고 끄는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은 지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디지털의 모든 신호도 이를 판독하는 프로그램과 기기가 없으면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단순히 가용할 전기만 사라져도 없어지는 세계입니다. 정전 때를 생각해 보시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 세계는 분명 아날로그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이 아날로그 세계를 디지털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디지털이 구축한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유사한 듯하지만 실은 이 실제 세계보다 더 실제 같은 세계입니다. 현실이 사라지고 오직 가상현실만이 남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아날로그적인 시간이 사라지니 이제 “실시간(temps réel)” 이 모든 시간을 대체합니다. 디지털의 실시간은 우리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현재”와도 다릅니다. 디지털의 실시간은 정보가 처리되는 실제 시간뿐입니다. 거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전류가 흐르는 시간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디지털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 간에 모종의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디지털의 세계는 자신이 가상현실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프로그램화하고 그것을 처리하여 아날로그화 시키는 디지털 기기들 덕분에 우리는 디지털 세계를 아날로그 세계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디지털의 세계가 여기에 존재하는 듯 착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세계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는 디지털처럼 처리되는 프로그램도 없고 그것을 인지하고 가용할 수 있는 기기도 없습니다. 있다면 성찬례라는 프로그램이고, 빵과 포도주라는 기기가 있을 뿐입니다. 그 안에서 처리되는 정보는 아날로그적이지만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영적”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믿어지고 인지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것은 우리가 컴퓨터를 사용하듯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래서 디지털 세계와 영적인 세계는 둘 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큰 차이를 보입니다. 디지털의 세계는 ‘기술’이란 과학의 힘으로 이 현상의 세계에 존재를 드러냅니다. 영적인 세계는 오직 교회 시스템에 의해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과학에서 배제된 교회의 주장은 과학에 의해 미신으로 취급됩니다. 전류의 흐름을 읽고 기록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기기를 만든 과학은 자신들이 만든 가상현실이 실제 하다고 우리에게 주장합니다. 그것이 영원하고 인간의 진보를 가져다준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모든 디지털화된 세계가 어떤 사건이나 재앙에 의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그때 우리는 어디에서 이 디지털화된 가상현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전기를 사용할 수 없으면 디지털의 세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됩니다. 전기 에너지를 가용하지 못하는 세계가 도래하면 그 세계는 더이상 이 아날로그적인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디지털 세계를 가상현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하는 것도 결국은 과학의 힘에 의해서 뿐입니다. 과학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디지털로 창조된 가상현실은 오직 전기의 흐름에 의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과학을 후원하고 지지하는 맘몬이 있기에 이 디지털화된 세상은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행동합니다. 실재 속에서 더 실재 같은 가상현실을 이미 현상의 세계 속에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실재는 이제 흔적만 남고 가상현실이 그 실재를 대체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AI는 모든 아날로그를 디지털 신호로 대체하면서 아날로그의 세계를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 인간의 사유가 사라진 곳에는 전류와 디지털 기호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의 흔직이지 결코 실재는 아닙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요한 6:52
오늘 복음서에서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살과 피를 아날로그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디지털 시대에 살았다면 그것이 가상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함을 인지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디지털적인 변화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실재적 변화, 즉 성변화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를 0과 1로 처리하는 디지털 방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마술적 변화도 아닙니다. 그것은 보이는 세계가 영적인 세계에 의해 간섭을 받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는 가상현실과는 다른 실재 안에, 실재와 함께 존재합니다. 단지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없을 뿐입니다. 디지털 세계처럼 그것을 읽어낼 프로그램과 기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영적인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 쉽습니다. 관측되고 계산되지 않으면 없다는 것이 과학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가장하지 않습니다. 성변화는 빵이 주님의 살이 되고, 포도주가 주님의 피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문학적 은유의 수사도 아닙니다. 이를 단순히 은유라고 말한다면 주님의 실재성도, 기독교 역사의 실재성도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 쓸모없는 것이 어떻게 2천 년 동안 존속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아날로그적 실재의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상의 빈 공간 안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실존은 만유에 편재(omnipresence)해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공간적 표현입니다. 그 공간은 하느님 안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가 정확하게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 안에 창조되었으며, 이 세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총으로 새로운 성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지는 새 창조는 포도주가 주님의 피가 되고, 빵이 주님의 살이 됩니다. 그것은 그분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써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나가 된다는 성변화에 대한 강력한 표징입니다. 이것이 성찬례가 지닌 실재의 신비입니다. 그것은 은유도 비유도 마술도 생각도 가상현실도 아닌 우리 안에 믿음으로 가능한 믿음의 실재입니다. 이러한 성변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의 세계를 거룩함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실재 현실과 가상현실에서 소외되는 모든 인간의 영혼을 보듬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빵입니다.
디지털이 만든 가상현실에서 소외될 운명에 처한 우리 인간은 지금 심각한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찰은 이미 숫자적 의미로 대체된 지 오래입니다. 1만 원짜리 지폐 한 장과 1만 원으로 기록된 통장의 숫자 간에 지금은 가치의 관련성이 존재해서 큰 불편을 겪고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이 디지털화가 되고 나면 더 이상 아날로그적 지폐는 완전히 교환가치를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거기에는 카드가 있었는데, 이제는 핸드폰 안의 어플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교환가치는 이미 실재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디지털화된 세계에서는 정보가 생산되는 과정, 즉 파발마를 타고 정보를 전달하는 인간의 노력과 땀이 전혀 쓸모없습니다. 노동력을 상실한 인간은 정말 잉여인간 취급을 받으며 폐물로 몰락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라 여기십니까? 이미 인간은 유전자 염기 서열로 기호화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라진 곳, 인간의 몸이 사라진 곳에는 오직 유전자 염색체와 디지털 신호만 남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성도 인간적 사유의 필요성도 사랑의 가치도 모두 “쓸모없는 기능”이 됩니다. 우리의 불안증은 바로 이러한 인간성과 인간 노동의 실재가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일자리는 점점 없어지고 디지털화된 세계를 켜고 끄는 인간만 존재하는 세상. 인간의 사유와 노동이 쓸모없는 대우를 받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살과 피.
아마도 우리 교회는 이러한 가상현실 속에서도 유일하게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실재를 인정하는 시스템으로 남을 것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는,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현실에서는 쓸모없는 기능으로 푸대접받을지도 모를, 모든 실재의 흔적들을 실재화하는 힘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는 결코 디지털화된 기호와 신호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한번 대체된 디지털 신호들과 기호들은 불가역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살과 피는 끊임없이 우리의 실재 속에서 우리를 원래 왔던 기원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그 선한 목적에 합당하게 말입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성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희망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시라면 그 빵을 먹는 우리도 그분처럼 하늘의 거룩함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분이 거룩해지셨으면 우리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셨다면 우리도 부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가 우리를 일깨우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가상현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실재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 오실 때 무로 돌아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성변화될 것을 요한묵시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현실로 이 세상이 대체되어도 우리는 끊임없이 실재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이길 힘은 오직 그리스도의 힘 밖에 없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요한 6:57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신 것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이 세상을 이깁니다. 그리스도의 실재 안에서 가상과 가현실의 이단을 이기는 힘은 오직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디지털의 세계 안에 안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보를 주고받으며 그 과정에서 전해지는 땀과 인간 노동의 가치와 상호관계성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효율성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하느님께서 효율성을 따지셨다면 아마도 노아의 때처럼 인간을 모두 몰살하고 소수를 통해 새로 시작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홍수의 효율성은 전혀 인간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음이 판명됐습니다. 홍수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다시 하느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관계성은 0과 1로만 표현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1에서 10으로 이어지는 아날로그적 연속성 속에 있습니다. 1에서 10까지 가운데 숫자 하나라도 빠지면 10진법의 관계성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달리는 파발마의 노력과 그 위에서 말을 모는 전령의 피와 땀과 노력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정보가 가치가 있는 것처럼 그 전달방법 또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좀 불편해도 관계성을 함께 세우며 만들어가는 존재들입니다. 효율성, 신속성, 정확성보다 진실성, 관계성, 유연성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남의 실수도 우리는 용납하고 감당해 줄 수 있습니다. 0과 1 사이에는 전류가 흐르고 안 흐르는 관계성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영지주의의 가현설과 이분법적인 세계에 다름 아닙니다. 관계성에서 모든 존재를 소외시키는 것은 오직 고립만이 남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와 살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관계성 안으로 초대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하느님 안에, 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그리고 우리 서로가 서로 안에 있음을 더 자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실재”가 우리 안에서 느껴지고 체험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0주 (나해) 1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살아있는 빵으로 우리에게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성체를 나눌 때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며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열왕상 2:10-12, 3:3-14
2:10 다윗은 선조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안장되었다. 11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햇수는 사십 년이다. 헤브론에서 칠 년,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다스렸다. 12 솔로몬이 선왕 다윗의 왕좌에 앉았다. 그는 왕위를 든든히 굳혔다. …
3 솔로몬은 야훼를 사랑하였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따라 살았다. 다만 한 가지, 그는 산당에서 제사하고 향을 피웠다. 4 기브온에는 큰 산당이 하나 있었는데 솔로몬은 늘 그리로 가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은 그 제단에 번제물을 천 마리나 바친 적이 있다. 5 야훼께서 그 날 밤 기브온에 와 있던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솔로몬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는 저의 아버지인 당신의 종 다윗에게 한결같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제 아버지가 당신의 면전에서 성실하고 올바르게, 또 당신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살았다고 하여 당신께서는 그에게 한결같은 은혜를 베푸셨고 또 오늘 그에게 주신 이 아들로 하여금 그의 왕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7 나의 하느님 야훼여, 당신께서는 소인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으로 삼으셨습니다만 저는 어린 아이에 지나지 않으므로 어떻게 처신하여야 할 지를 알지 못합니다. 8 그런데 소인은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살고 있는 몸입니다. 9 그러하오니 소인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감히 그 누가 당신의 이 큰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10 이러한 솔로몬의 청이 야훼의 마음에 들었다. 11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장수나 부귀나 원수 갚는 것을 청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옳은 것을 가려내는 머리를 달라고 하니 12 자, 내가 네 말대로 해주리라. 이제 너는 슬기롭고 명석하게 되었다. 너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13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지 않은 것, 부귀와 명예도 주리라. 네 평생에 너와 비교될 만한 왕을 보지 못할 것이다. 1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이 내 길을 따라 살았듯이 내 길을 따라 살 아 내 법도와 내 계명을 지킨다면 네 수명도 길게 해주리라.”
성시_시편 111
1 알렐루야!
. 정직한 이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
. 내 마음 다 쏟아 주님께 감사하리라.
2 주께서 하시는 일들 하도 장하시어 ◯
. 그 일들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 깊이 생각한다.
3 그 하신 일 영광스럽고 찬란하여 ◯
. 그 정의는 영원히 남으리라.
4 그 놀라운 일들을 기념토록 남기셨으니, ◯
. 주께서는 자비롭고 인자하시다.
5 맺으신 계약을 길이 잊지 아니하시고 ◯
.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6 뭇 민족의 땅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주시고 ◯
. 그 위력을 당신 백성에게 보여 주신다.
7 하시는 일은 정의와 진리이시며 ◯
. 그 모든 법은 진실 그 자체이시니,
8 영원히 흔들리지 않도록 ◯
. 진실과 정직으로 제정되었다.
9 속전을 내어 당신 백성을 구해 내시고
. 영원히 지킬 계약을 맺으셨으니, ◯
. 그의 이름 두렵고도 거룩하여라.
10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치나니,◯
. 주님 찬송 영원히 올려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에페 5:15-20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 16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17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18 술 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19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20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 드리십시오.
복음서_요한 6:51-58
…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2 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53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58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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