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4. 나해_주님의 변모 축일 (연중18주일)
다니 7:9-10, 13-14 / 시편 97 / 2베드 1:16-19 / 루가 9:28-36
“믿음의 엔트로피”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은 물리학과 관련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열역학 제1법칙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바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고립계인 우주 공간에서 에너지는 그 형태가 전환되거나 다른 곳으로 전달될 수는 있지만 새로 생성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일정하게 유지되고 그 총량은 같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선풍기를 틀고 시간이 지나면 모터가 뜨거워집니다. 모터가 뜨거워지는 것은 모터에 공급된 전기 에너지가 일에너지로 변환되면서 모터에서 열이 발생합니다. 여기에서 공급된 전기에너지의 양은 선풍기의 일에너지와 모터의 열에너지의 총량과 일정합니다. 전기 에너지가 열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형태로만 바뀌었을 뿐 에너지의 총량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모든 열의 진행 방향성을 알려줍니다. 모든 열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진행해 갑니다. 이는 모든 에너지가 ‘선형적’으로 변화하고 전달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열역학 제1법칙이 우리 생활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음식으로 섭취한 에너지가 운동이나 일을 통해서 운동에너지로 전환되지 않으면 섭취한 에너지가 몸 내에 그대로 보존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비만이라 부릅니다.
다음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입니다. 이는 에너지의 변환의 방향성과 관련된 이론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얼음은 가만히 놓아두면 자연스럽게 녹으며 물로 변환되었다가 결국에는 증발되어 기화되고 맙니다. 처음 고체상태로 있던 물은 에너지의 변환 없이 안정적이지만 그것이 녹아 증발되면서 그 에너지는 불안정한 상태로 변환됩니다. 그리고 이미 기화된 수증기가 다시 얼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번 변환된 에너지는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립된 세상의 모든 것은 불가역적입니다. 이미 소모되고 변환된 에너지는 다시 원래의 에너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립된 세계의 모든 에너지는 점점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늙어가는 것도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계속 엔트로피가 증가하다가 평형상태인 제로가 되는 것을 우리는 ‘죽음’이라 부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오랫동안 비워두면 이상하게도 집이 망가진다고. 이것도 이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무질서도가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살지 않고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집을 비워두면 집은 점점 낡아지고 망가지는 것입니다. 고립된 우주의 모든 것은 처음 상태에서 끊임없이 무질서도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에너지의 변환이 진행됩니다. 한번 사용되고 변환된 에너지는 다시 처음의 가용 상태로 절대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런 물리적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세례를 받고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이 그대로 보존될 줄로 생각하지만, 우리의 믿음도 이 고립된 세계에서 그대로 두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면 결국 믿음의 죽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이나 우리의 일상은 게으른 사람에게는 참 치명적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엔트로피 지수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에너지의 공급과 변화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청소를 하지 않으면 집은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무질서 상태가 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믿음의 세계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물리적 세계와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우리의 내면이 깨끗이 청소가 되었는데 그것을 방치한 결과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믿음이 제로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흉악한 다른 일곱 영”들이 다시 들어온다고 루가복음 11장은 말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처음 형편보다 나중의 형편이 더 나빠진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엔트로피의 증가는 믿음의 세계에서는 더욱 최악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무질서가 증가하는 것에 더해 더러운 악한 영까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방치한 결과는 처음 믿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쁜 형편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신앙생활을 하려 하면 제대로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취미생활이 아니라 살고 죽는 문제 즉 생명과 관련된 문제라고 기독교는 봅니다. 취미생활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면 되지만, 신앙생활은 영적인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선한 하느님의 에너지로 끊임없이 변화가 진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영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무질서도가 높아지면 질수록 우리는 처음 믿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쁜 형편에 놓일 위험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2 독서인 베드로후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엔트로피 증가에 역행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이름으로 헌정된 문서입니다. 유다서를 참고하여 보완 보충하여 쓴 서간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쓴 것처럼 형식을 취하지만, 이 편지는 베드로 사후 120년 정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베드로후서는 4세기까지 정경의 위치를 교부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교부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정경으로 널리 인정된 문서입니다. 이 글을 쓴 목적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신자들을 현혹시키더라도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을 상기하여 믿음을 지키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 악한 세대를 하느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모든 인간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말의 때에 대해서 베드로후서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하느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그러므로 “주님의 날”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모든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 굳게 서서 믿음의 엔트로피가 증가하지 않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삶을 살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하느님께 충실하고 성실한 삶으로 채워가라고 격려합니다.
베드로후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며 그 증거로 변화산에서의 주님의 변모사건을 언급합니다. 베드로를 위시하여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을 직접 눈으로 봤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장엄한 영광 가운데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기노라”라는 음성도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러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교회는 이 세 사도들의 증언을 진실로 믿었습니다. 이 세 사도의 증언에 의해 구약으로부터 내려온 하느님의 예언이 성취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1 베드 1:19
여기에서 베드로후서는 사도들의 증언을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의 증언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잠정적으로 유효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동이 트는 것”은 바로 재림의 때이고, “샛별”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변모를 믿으며 어두운 세상에서 사도들의 증언을 등불로 삼아 이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의 삶을 살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변화는 믿음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변화를 말합니다. 비록 그 등불이 모든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어둠 속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을 막고 우리에게 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방심하면 악한 영이 우리를 처음보다 더 나쁜 상태로 이끌 위험이 늘 그 길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위험의 어둠 속에는 다양한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 거짓 교사, 탐욕하는 자, “들뜬 영혼”을 유혹하는 자 등. 우리는 사도들이 증언한 등불의 불빛으로 비추는 것 이상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유혹에 빠질 개연성이 큽니다. 우리의 시선은 늘 미시적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믿음의 엔트로피의 상승에 역행하지 않는 한 우리의 믿음이 완전한 무질서의 상태에 놓일 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세속주의의 유혹은 너무나 집요하고 뿌리치기 힘듭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팽창성은 세상의 모든 에너지를 과잉 소비하게 만들며 무질서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늘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환경재앙에 현재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소비는 지구 에너지의 엔트로피를 계속해서 상승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자본주의와 결탁한 과학은 지구의 엔트로피의 임계점을 이미 예측했는지 이제 지구밖 화성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지구 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 과학과 모험, 도전이란 말로 포장되어 우리를 더욱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질서가 상승하는 방향을 막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올바른 변화의 방향성을 획득하는 길 말고는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물리법칙은 엔트로피가 상승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지만, 하느님의 영적인 세계는 그 엔트로피에 역행하여 나아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처음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영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와 영원한 생명에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야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3년을 지근거리에서 그분을 모신 제자들이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참 신기합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은 “그리스도 비밀 사상”이란 관점에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오늘 읽은 변모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루가가 마르코복음을 참고하여 수정, 첨가, 삭제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변모사건의 핵심은 예수께서 초월적 존재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변모사건의 진의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이 이야기의 초점을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논하기에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자료가 없습니다. 혹 그것을 사실로 입증한다고 해도 그러한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현상은 다시 재현이 불가능함으로 예외 현상으로 취급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의미론적으로 접근 해야 합니다. 그 뜻인즉, 주님께서 변화하신 것처럼 우리도 변화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변화는 가역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엔트로피가 증가는 방향의 완전한 역주행이었습니다. 썩어 없어질 몸이 거룩함을 덧입는 변화였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지시킵니다. 주님께서 성육신 하신 것이 우리에게 신화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듯이, 이제 주님께서 변모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육신에서 거룩함으로 변모하는, 변화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하나는 주님을 위해 봉헌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세나 엘리야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배만 드릴 존재들이 아니라 주님처럼 영적인 몸을 덧입기 위해 변화하는 삶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믿음의 엔트로피의 증가를 늦추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공급되는 새로운 믿음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일상 속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습관을 기르는 것입니다. 매일 조금씩 우리의 습관이 달라질 때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점점 더 하느님께서 원래 우리를 창조하신 그 원형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도 주님처럼 “변모”를 통해 조금씩 예수의 인격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변화와 성장이 어디에까지 이를지 우리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믿음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과 역행할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우리를 하느님을 향해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항상 격려해 주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주님의 변모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들이 이 세상의 근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다니 7:9-10, 13-14
9 내가 바라보니
. 옥좌가 놓이고 태곳적부터 계신 이가 그 위에 앉으셨는데,
. 옷은 눈같이 희고
. 머리털은 양털같이 윤이 났다.
.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었고 그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10 그 앞으로는 불길이 강물처럼 흘러 나왔다.
. 천만 신하들이 떠받들어 모시고
. 또 억조 창생들이 모시고 섰는데,
. 그는 법정을 열고 조서를 펼치셨다.
. …
13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14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시편 97
1 주께서 왕위에 오르셨다.
. 온 땅은 춤을 추어라. ◯
.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2 안개와 구름에 둘러싸이고 ◯
. 정의와 공평이 그 옥좌의 바탕이요.
3 불길이 그를 앞서 가며 ◯
. 에워 싼 원수들을 살라 버린다.
4 번개가 한번 번쩍 세상을 비추니 ◯
. 온 땅이 이를 보고 부들부들 떤다.
5 산들도 주 앞에서, 온 땅의 주님 앞에서 ◯
. 초처럼 녹아내린다.
6 하늘이 그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
. 만백성은 그 영광을 뵈옵는다.
7 잡신들을 섬기는 자들아,
. 허수아비를 자랑하는 자들아,
. 창피를 당하여라. ◯
. 모든 신들아 그 앞에 엎드려라.
8 주여, 당신의 재판은 공정하시오니
. 시온이 이를 듣고 즐거워하며 ◯
. 유다의 딸들도 기뻐하옵니다.
9 주여, 당신은 온 세상에 으뜸이시오니 ◯
. 그 많은 신들 훨씬 위에 계시옵니다.
10 악을 미워하는 자를 주께서 사랑하시고,
. 당신을 믿는 자의 목숨을 지켜 주시어 ◯
.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 주신다.
11 바르게 살면 그 앞이 환히 트이고 ◯
. 마음이 정직하면 즐거움이 돌아온다.
12 올바르게 사는 자들,
. 주님의 품에서 즐거워하여라. ◯
.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2베드 1:16-19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알려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우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17 그분은 분명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영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그 분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17:5” 하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는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으므로 하늘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19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복음서_루가 9:28-36
28 이 말씀을 하신 뒤 여드레쯤 지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29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30 그러자 난데없이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32 그 때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거기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떠나려 할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한 말이었다. 34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뒤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버렸다. 35 이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시편 2:7; 이사 42:1; 신명 18:15”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36 그 소리가 그친 뒤에 보니 예수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자기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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