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1. 나해_여성선교주일_연중22주일
창세 1:17-19 / 시편 104:24-35 / 로마 8:19-22 / 루가 23:27-28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성공회 여인들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 성서정과의 말씀들은 “성공회 여성활동단체협의회”에서 제안한 말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17주년이 된 성공회 여성선교주일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올 해에는 “생태적 여성들의 관점으로 본 기후정의”가 그 주제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후정의에 대해, 성공회 여성 리더십에 대한 우리의 노력들을 다시 돌아보길 원합니다. 특별히 이런 귀한 목적에 따라 “여성선교주일 특별 헌금”은 귀하게 써질 예정이오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성서정과에 제안된 말씀들의 구절들이 짧고 간략하여 전후 맥락 없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생략된 부분들을 염두에 두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상황을 묘사한 상황어 구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공관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십자가를 진 사람은 키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가는 마르코 복음을 참고하면서 이 이야기에 자신의 특수 자료를 삽입합니다. 여성과 가난한 사람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는 루가복음은 “예루살렘 여인”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가슴을 치며 예수의 고통과 죽음을 애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보고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충고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지금 당하는 고통과 고난보다 앞으로 예루살렘에 닥칠 고난이 훨씬 더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자식이 없는 어미가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지 않은 30절에는 “산과 언덕들이 자신들 위에 무너져 죽는 편이 더 낫다”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참상을 겪는 것보다 종말이 오기 전에 차라리 재난에 의해 생매장되는 편이 더 낫다는 표현입니다. 종말의 참상이 일상에서의 재난보다 더 견디기 힘든 상황임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 말은 종말의 고통의 처참함이 지금 주님께서 당하시는 고난보다 훨씬 더 처참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이런 표현을 하신 것일까요? 루가는 무엇 때문에 이런 표현을 기록한 것일까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상황어는 분명히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통이 이 정도라면 하물며 우리 같은 죄인들이 당할 종말의 고통이 어떠하겠느냐는 반어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인즉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맞이하게 될 종말의 고통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예수의 고통보다 더 심각하다는 점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즉 예수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 종말론적인 심판의 고통과 고난의 엄중함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구절 중에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 울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울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말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처럼(시편 126:5) 기도를 촉구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집중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주변의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당할 고통을 생각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애통해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엄중함을 기억하며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과거 개신교의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노방전도며 다양한 전도활동을 통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란 극단적인 표현을 써 가면서 전도에 열을 올렸습니다. 물론 요즘은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전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제 그런 극단적인 표현과 전도 방식이 효과(?)를 볼 수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복음과 심판에 대한 급박함과 절박함이 전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죄에 대한 감수성도 과거보다 무뎌지고 도덕적 부끄러움도 더욱 사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차 문제로 불만을 품고 아파트 단지의 지하 주차장의 입구를 자신의 차로 막고 입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전혀 대수롭지 않게 행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위층과 아래층의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에 대한 개념도 사라져 버리고 이웃이 ‘웬수’가 된지 오래입니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이미 과거에 통용되던 사어가 됐습니다. 저도 지금 공동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사실 옆집과 아랫집에 누가 사는지 저도 잘 모르는 형편입니다. 카톡에서 문자로 주고받는 공동주택 알림방이 저와 이웃의 관계 전부입니다. 이웃은 카톡 속에 만 존재하고 실재 일상에서 이웃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각 세대가 마치 섬처럼 따로 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벽 하나를 두고 함께 살면서 수 천 킬로미터 떨어져 사는 듯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나와 전혀 상관없는 관계들만 넘쳐납니다. 어쩌면 우리는 벌써 지옥과도 같은 종말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관계성이 모든 관계성을 대체하면서 이웃이 사라지고 친구와 가족의 개념도 점점 느슨해지는 상황. 어쩌면 우리는 이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울어주고 기도해 주는 관계성을 전혀 찾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따르며 그의 고통에 함께 울어주던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일 뿐. 남의 고통은 남의 고통일 뿐. 고통은 이제 상호 간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여겨집니다. 아무도 우리 주변의 고통과 아픔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이미 이런 세상을 예견하시고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또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도, 우리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도 아파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존재의 상실, 아픔과 고통에 대한 공감의 상실. 현대는 이렇게 ‘상실의 시대’에 접어든 지 오래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단절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우리 주변의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성도 상실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 8:22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우리”에 지금 우리 자신이 포함되지 않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들었던 모든 피조물들의 신음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통과 신음을 무시하니 모든 관계성의 느슨함을 넘어 우리의 책임 또한 희미해졌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 1:28)는 뜻을 인간만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으로 여겨 우리는 너무나 무자비하게 환경과 생태계를 유린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산들로 우리 위에 덮쳐라”라고 외치지 않아도 이제 무분별한 산 파괴로 말미암아 장마철마다 산사태의 피해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산을 마구 훼손하며 파해진 결과 모든 물길이 막히고, 모든 나무들이 기반을 잃어, 집중 호우가 쏟아지면 물은 자신의 원래길을 트며 무자비하게 인간이 만든 인공물들을 훼손하며 흐릅니다. 집중 호우에 모든 도시의 강이 범람하는 것도 모든 물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연이 자신들의 신음과 고통을 정확하게 인간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언덕들과 산들이 이제 자신들의 길을 찾기 위해 인간을 덮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이 종말에 근접함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후손들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진행된 인간의 번영과 함께 이뤄진 무분별한 자원에 대한 착취와 낭비는 짧은 시간 동안 인류의 모든 자원의 고갈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인간은 자원을 찾아 우주와 화성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인간만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노력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피조물들의 신음”이 예루살렘 여인들의 통곡처럼 우리에게 실제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환경 관련 지표들이 부정적인 수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가역적인 환경 파괴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듯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편리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자연 자원의 무분별한 이용과 착취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대유행일 때 하늘의 오존층이 잠시 깨끗해졌다는 통계 수치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의 하늘 길은 비행기들이 내뿜는 매연들로 오염되고 있고, 자동차들이 내뿜는 배기가스와 인간들의 이동으로 인한 소음들로 이 지구촌은 다시 신음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의 통곡 소리처럼 이제 “피조물의 신음” 소리가 곳곳에서 명확하게 들려옵니다.
오늘 로마서는 이러한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의 회개로 말미암는 구원에 동참하길 간절히 바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보다 먼저 구원의 약속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점을 망각하고 구원의 맏이로서의 역할을 소홀하게 하고 있다는 반성을 이 말씀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양자가 된 우리. 그러나 그 양자로서의 신분과 책임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피조물의 신음”이 더 고조되고 있습니다.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로마 8:21)가 결국 자본주의와 개발주의의 이기적인 자유로 표출되고 왜곡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오히려 세상의 수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본주의와 개발주의에 더욱 열을 올리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본의 최대 이익과 수혜가 마치 하느님의 축복인양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분명 눈물 흘리고 애통해하던 “예루살렘의 여인들”과 다릅니다. 예수의 고통에 눈물 흘리며 공감했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오늘날 우리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 “공감능력과 애통하는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식이 남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자신이 남보다 더 좋은 차와 집을 사야 하고, 남보다 더 좋은 음식과 휴가를 즐겨야 하는 것에 목숨을 건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납니다. 남보다 더 나은 것을 얻어야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은 증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예수께서는 희생을 하셨는데 우리는 희생보다는 오히려 대접만을 받고 싶어 합니다. 예수의 아픔과 고통을 위해서 울어줬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오늘날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자신들을 위해,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도 진정으로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고통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남성들이 아니라 여성들이었습니다. 남성들은, 특히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비록 멀리이긴 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한 것은 모두 여성들이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여자들도 먼 데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마르 15:40
분명 성서는 “여자들”이라 기록했고, 그중에 세 명의 여인들의 이름만을 대표적으로 마르코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했던 것은 남성 제자들이 아니라, “여자들”과 예수를 처음 만난 키레네 사람 시몬뿐이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됐다고 하지만, 십자가를 대신 질 당시에는 예수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길 가던 나그네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남성성의 표징입니다. 여자들은 십자가 근처까지, 당시 여자들에게 허락된 장소까지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며 울었습니다. 도망간 비겁한 남자 제자들과 너무나 상반됩니다. 부활의 첫 증인도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열 두 사도의 이름에 여성들이 빠져있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이것은 교회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수제자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을까요? 예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자이며,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자인 막달라 마리아가 수제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초대 교회의 여성 차별이 분명 있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남성인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로를 각각 교회의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조차도 가부장적 제도의 한계를 벗을 수 없었던 시대의 산물임을 방증해 줍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두 여인의 이름을 기록했고, 또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막달라 마리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부장제를 넘어서 역사적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제는 늘 역사적 진실을 가리고자 했지만, 성서적 진실은 여성들을 늘 교회사의 중요한 위치에 놓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성이 없었다면 우리 교회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역사적 아이러니입니까?
사도 바울로가 언급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에는 ‘가부장제’도, 남녀의 구분이나 차별도 없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자녀”라는 “톤 휘온 투 데우 τῶν υἱῶν τοῦ Θεοῦ”에서 헬라어 남성명사인 “휘오스 υἱός”의 복수를 사용하여 “아들들”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후손들” 즉 “하느님의 자녀”로 번역하는 것이 사도 바울로의 뜻에 맞습니다. ‘아들들’이 아니라 ‘후손’이지요. 이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믿음의 자녀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이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갈라 3:28
모든 피조물이 간절히 갈구하는 인간의 구원은 남자만의 것도, 여자만의 것도, 신분의 차별도, 성적인 구분이나 젠더의 차이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후손, 즉, 하느님의 자녀”에 의한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믿음의 자녀이고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과 혐오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개념은 교회 내에 모든 차별을 반대합니다. 그것은 모든 상하구조의 권위적 위계 체계와 복종도 거부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약속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팔과 다리, 눈과 머리가 모두 하나의 몸이듯이 말입니다. 키레네의 시몬처럼 자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짊어지고 가는 가부장제를 넘어서 예루살렘의 여인들처럼 예수의 눈물과 고통의 의미를 아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점점 더 늘어나길 기도합니다. 오늘날 우리 성공회를 대표하여 교회와 세상을 위해 더욱 활발히 기도와 봉사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모든 성공회의 여성분들의 노고에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처럼”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울어주는 여러분 덕분에 우리 성공회는 더욱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겁니다. “예루살렘의 여인들” 같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넘쳐나는 성공회의 미래를 꿈꾸어 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여성선교주일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갈라섬이 없이 한 마음 된 우리에게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을 맡기셨나이다. 구하오니, 부활의 증인으로 끝까지 주님을 따른 여성 들의 믿음과 용기를 본받아 우리가 서로 화합하며 증인된 삶을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1:17-19
17 하느님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놓고 땅을 비추게 하셨다. 18 이리하여 밝음과 어둠을 갈라놓으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19 이렇게 나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성시_시편 104:24-35
24 주여, 손수 만드신 것이 참으로 많으나 어느 것 하나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고 ◯
땅은 온통 당신 것으로 풍요합니다.
25 저 크고 넓은 바다 ◯ 거기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가 수없이 우글거리고,
26 배들이 이리 오고 저리 가고 ◯ 손수 빚으신 레비아단은 당신의 장난감입니다.
27 때를 따라 주시는 먹이를 기다리며 ◯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을 쳐다보다가
28 먹이를 주시면 그것을 받아먹으니 ◯ 손만 벌리시면 그들은 배부릅니다.
29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어쩔 줄을 모르고 ◯
숨을 거두어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30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 온 누리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
31 주님의 영광은 영원하소서. ◯ 손수 만드신 것, 주님의 기쁨이 되소서.
32 굽어만 보셔도 땅은 떨고 ◯ 다치기만 하셔도 산들은 연기를 뽑는구나.
33 나는 한평생 주님을 노래하리라. ◯
숨을 거둘 때까지 악기를 잡고 나의 하느님을 노래하리라.
34 나의 노래가 주님께 기쁨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그러면 나는 주님 품안에서 즐겁기만 하련만,
35 악인들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려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알렐루야!
2독서_로마 8:19-22
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음서_루가 23:27-28
27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뒤따랐는데 그 중에는 예수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28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을 돌아보시며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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