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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의 공생의 길”_2024. 9.8. 나해_창조절 2주일_연중23주일

James Chae 2024. 9. 8. 06:22

 
2024. 9.8. 나해_창조절 2주일_연중23주일
 
잠언 22:1-2, 8-9, 22-23 / 시편 125 / 야고 2:1-10(11-13), 14-17 / 마르 7:24-37
 
 

인간과 자연의 공생의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창조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곧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

 
 
독일 하이델베르크 신학 대학의 전임교수였으며, 창세기 1장에서 11장을 주석한 “창조”라는 책으로 유명한 개신교 구약신학자 클라우스 베스터만의 말로 오늘 설교를 시작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셨다고.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분명 창세기 1, 2장에는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창세기는 “그분 보시기에 좋았다”라고만 언급합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뜻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맞게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생명체마다 각기 다른 능력으로 각자도생의 삶을 삽니다. 높은 나무 밑에 있는 작은 나무들은 빛을 못 받아 기를 못 펴고 도태됩니다. 생명체들은 먹이사슬의 관계 속에서 먹고 먹히며 생존합니다. 강한 것은 약한 것을 억압하며, 약한 존재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 만의 방법을 찾습니다. 약한 존재들은 늘 강한 것에 의존하거나 기생해서 살아남습니다. 자연 현상은 더욱 무자비합니다. 무서운 태풍과 산사태는 일순간에 수목을 쓰러뜨리고 땅의 지형조차 바꿔놓습니다. 미국 남부의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모든 것이 혼란과 파괴뿐입니다. 화산과 지진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모든 것을 집어삼킵니다. 거기에는 사랑도 자비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문명을 만들어 이러한 대자연의 무자비함에서 자신들을 보호하며 생존해 왔습니다. 성채를 쌓고 도시를 건설하여 자연재해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했습니다. 또 자연을 연구하고 탐구하면서 모든 재난에 대비하며 인간 문명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인간 문명이 점점 더 발달하며 자연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더욱 많이 축적되면서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라 탐험하고 개척할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의지했던 연약한 인간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며 이제 자연을 “생육하고 번성하고 지배할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18~19세기 서구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에 탐험과 개척, 제국주의가 번성한 이유입니다. 항해술과 배 건조기술의 발달로 이제 더 이상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고 바다 저 건너편은 낭떠러지가 아니라 부를 가져다주는 미지의 세계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개척과 탐험의 시대를 거치면서 서구 사회는 식민지에서 착취한 많은 물자들과 자원들로 인해 막강한 부를 획득하게 됩니다. 키플링의 시에 언급된 “백인의 의무”라는 슬로건 아래, “세계 복음화”라는 성서적 슬로건 아래 철과 막강한 화약으로 무장한 서구문명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대륙을 유린했습니다. 어디 이방민족들만 유린했습니까? 그들은 산업혁명을 기치로 지구의 모든 자원을 채굴하고 착취하기 시작하며 역사상 가장 심한 자연환경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제국주의 팽창시대는 이제 자본주의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소비로 말미암는 자본을 축적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소비가 늘면 자본도 늘어납니다. 그러니 더 막강한 자본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소비를 유발해야만 하는 모순에 빠졌습니다. 더 많은 지구 자원을 남용해야 하고,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해야 하며, 이것들을 소비해야만 작동되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과소비와 과잉개발 없이는 더 이상 자본의 축적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연은 무자비하게 파괴됐고, 자원은 점점 고갈되어 가며, 생태계의 모든 물과 공기, 땅과 바다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제1세계 국가들의 육식을 위해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인간이 아니라 가축들을 먹이기 위한 사료 농장으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이들이 기아로 죽어가는데 제1세계 국가에서는 음식이 남아돌아 쓰레기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는 나눔도 자비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대로만 작동됩니다. 돈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과거 제국주의가 식민지의 부를 착취하던 것에서 더 나아가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착취하는 것으로 더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창세기 1장 28절에 언급된 “번성하고,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명체들을 부리라!”는 하느님의 명령의 완수일까요? 참 의문스럽습니다.
 
창조신학이 단순하게 인간의 타락과 구원에 대한 기초로만 인식된다면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성서의 진리를 반쪽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창조이야기 주석으로 유명한 독일의 개신교 구약신학자 클라우스 베스터만이 언급한 대로 창세기의 진술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태계라는 관계성을 모두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들은 결코 인간 타락과 구원의 이야기만을 전제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개인적이 관계성뿐만 아니라 인간이 처해있는 사회성과 생태계 안에서 자연과의 공동체적 관계성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이면서 동시에 사회와 자연 앞에 선 단독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느님과의 관계성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사랑과 자비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성서를 관통하는 진리입니다. 이와 같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한 그러합니다. 자연은 창세기 1장이 말하듯이 정복하고 다스릴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존이 펼쳐지는 필드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정복하고 착취할 수 없듯이 인간도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이 사랑과 자비에 기초한다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아브라함 이전의 진술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와 노아의 홍수로 인간을 멸하신 이야기는 각각 인간의 운명과 생태계의 시작과 끝을 말해줍니다. 창조가 있으면 멸망도 있습니다. 창조와 멸망, 그 사이에 놓인 것이 인간의 실존임을 창세기 이야기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와 유한성입니다. 그 사이에서 인간은 생존하며 인간과의 관계성을 만들고, 더불어 자연과의 관계성을 만들면서 사회와 문명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번성하고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 원리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를 관리하고 풍성하게 할 사명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큰 나무가 작은 나무의 생육을 방해하면 인간은 자연의 조화를 위해 큰 나무의 개체수와 작은 나무의 개체수를 조절하여 이를 조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강한 동물에 의해 개체수가 줄어든 약한 동물들을 보존하여 개체수를 유지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강이 범람하여 사람과 자연을 파괴하는 일을 막기 위해 인간은 생태계를 위해 물길을 새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관리하고 자연과 관계하느냐에 따라 이 생태계는 인간과 조화를 이루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파멸과 무질서로 치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관리하고 다스리는 임무가 인간의 손에 주어진 막중한 의무입니다. 한 손에 생명(창조)을 다른 한 손에 파멸(멸망)을 인간은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 손에 사랑을 다른 한 손에 미움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야고 2:1

 
 
오늘 야보고서의 “차별”에 대한 경고는 단순히 인간의 관계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관계가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개인과 사회의 관계로 얽혀있듯이 인간의 관계성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태계 자연을 차별 없이 관리하고 조화롭게 하는 것도 인간의 몫입니다. 우리는 동식물을 관리하며 어떤 개체는 살리고 어떤 개체는 소멸시키는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개체수를 조절하여 조화를 추구할 뿐입니다. 나무를 관리하는 것은 모든 산이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지 어떤 나무를 차별하여 배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과학은 자연 착취가 아니라 그러한 조화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현재 인간이 오직 인간을 위해서만 자연을 난개발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의 발동이며 여기에는 어떠한 사랑도 자비의 가치도 없습니다. 무분별한 자연의 파괴 이면에는 무자비한 인간관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존중하고 생명으로 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인간을 차별하고 혐오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자연도 똑같이 혐오하고 착취합니다.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자연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로 서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자연은 단지 아름다운 감동과 자기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저 자연에서 충만한 생명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것과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모두 같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됨을 보여줍니다. 생명에 대한 고귀하고 숭고한 생각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아는 사람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도 사랑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자연도 차별하지 마십시오. 인간이 중요한 만큼 저 들의 나무도 꽃도 바람도 구름도 모두 소중합니다. 인간을 위해 자연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인간에게 고귀한 인권이 있듯이 모든 피조물에게는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의 권리들이 있습니다. 이 피조된 생태계에서 불필요한 생명과 자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창조와 종말 사이에 놓인 각자의 실존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없이 이 문명이 지탱될 수 없듯이, 자연 없이 이 문명이 존속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의인들이 악한 일에 손을 뻗지 않도록 의인들이 차지한 땅 위에서 악인이 그 권세를 휘두르지 못하게 하시리라.” 시편 125: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우리는 이제 세상의 모든 차별을 거부합니다. 이 생태계에 대한 모든 착취와 차별을 거부합니다. 인간과 자연에게 행해지는 모든 차별과 착취를 거부합니다. 모든 생명들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실존의 권위로 말미암아 모두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태계도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자연은 단지 인간이 살아가는 무대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공존할 존재들입니다. 이 생태계를 주님 오실 그날까지 잘 보존하고 잘 관리하는 것은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사랑과 자비에 기초하여 사람과 자연과 우리의 모든 환경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일이 우리의 일상의 소소한 삶에서부터 조금씩 실천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창조절기를 맞이하여 인간과 자연의 공생의 길을 우리 모두 함께 찾아가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3 (나해) 1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하느님 나라의 소망으로 우리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잠언 22:1-2, 8-9, 22-23
 
1.    명예는 많은 재산보다 소중하고
     존경받는 것은 금은보다 낫다.
2    늘 상종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이들은 모두 야훼께서 지으셨다.
     …
8    악을 심으면 재난을 거두고
     홧김에 남을 때리면 그 몽치에 제가 맞는다.
9    남 보살펴 주는 사람,
     곧 가난한 사람에게 제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
22  
     힘없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을 털지 말며
     법정에서 어려운 사람을 짓누르지 마라.
23  야훼께서 그들의 송사를 떠맡으시고
     어려운 사람 등치는 자를 목조르신다.
 
 
 
성시_시편 125
1    주님께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과 같으니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든든하리라.
2    산들이 예루살렘을 에워 감싸 주듯이
     주께서 당신 백성을 감싸 주시리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3    의인들이 악한 일에 손을 뻗지 않도록
     의인들이 차지한 위에서
     악인이 권세를 휘두르지 못하게 하시리라.
4    선한 사람, 정직한 사람에게
     주여, 은혜를 베푸소서.
5    그릇된 길로 빗나가는 자들은, 주여,
     악인들과 함께 그들을 물리치소서.
     이스라엘에 평화 있기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야고 2:1-10, [11-13], 14-17
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2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3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내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자들은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7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8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따라 “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여라. 레위19:18” 한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 하는 일이지만 9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10 누구든지 계명을 지키다가도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11 “간음하지 마라. 출애 20:14, 신명 5:18” 하신 분이 “살인하지 마라. 출애 20:13, 신명 5:17” 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한 사람은 결국 계명을 어긴 자가 되고 맙니다. 12 여러분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법에 따라서 장차 심판받을 사람들이니 그런 사람답게 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십시오. 13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14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복음서_마르 7:24-37
24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띠로 지방으로 가셨다. 거기서 어떤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계시려 했으나 결국 알려지고 말았다. 25 그래서 악령이 들린 어린 딸을 둔 어떤 여자가 곧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그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이방인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27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래도 그 여자는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 하고 사정하였다. 29 그제야 예수께서는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는 자리에 누워 있었고 과연 마귀는 떠나가고 없었다.
31 그 뒤 예수께서는 띠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 때에 사람들이 (청각 장애와 언어 장애를 가진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하였다. 33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34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 하고 말씀 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35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으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 37 사람들은 “(청각 장애인)을 듣게 하시고 (언어 장애인)도 말을 하게 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경탄하여 마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