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15. 나해_창조절 3주일_연중24주일
잠언 1:20-33 / 시편 19 / 야고 3:1-12 / 마르 8:27-38
“하나의 일, 하나의 의지”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하느님과 세상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도 세상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위-클레멘스
하나의 일에는 하나의 의지가 작동하게 됩니다. 행위에 의지가 둘 또는 셋이라면 어떠한 행동과 행위도 제대로 될리 만무합니다. 만약 하느님의 의지가 하나의 일에 여렷 작동한다면 그것은 혼란을 의미합니다. 인간사의 일도 이와같습니다. 송나라의 주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陽氣發處 金石亦透(양기발처 금석역투)
양기가 발하는 곳이면 쇠와 돌도 뚫을 수 있다.
精神一到 何事不成(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하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양기”는 뜨겁고 밝은 기운입니다. 이는 태양처럼 생명의 원천으로서 우리 안에 “긍정의 힘”을 뜻합니다. 이러한 기운을 가지고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에 분심이 들거나 여러개의 의지가 발동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운동 선수들도 집중력이 떨어지면 급격하게 경기력이 떨어지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세상 이치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분명 이러합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오직 하느님의 하나의 의지만 있었습니다. 모든 만물을 자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잘 아셨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에 순종하여 침묵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좀처럼 하느님의 일 앞에서 두 마음을 품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칭찬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 11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그분의 의지에 합했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 21장에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처음에 싫다고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잡고 아버지의 의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말만하고 실제로 아버지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순종했습니다. 이런 아들 둘이 있다면 여러분은 누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실 그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복잡한 것같지도 않습니다. “네” 할 것은 “네”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자유 의지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않음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베드로는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 솔직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사들처럼 회칠한 무덤같이 속 마음을 숨기면서 자신의 의지를 가식적으로 드러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비록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다가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기는 했지만, 그를 통해 예수께서 가실 길, 예수님의 신원, 그리고 하느님의 의지가 우리 모두에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했던 베드로의 공적입니다. 하느님 앞에 숨김없이 솔직한 것. 이것이 하느님의 의지에 자신의 의지를 맞추는 첫 단계임이 틀림없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데 마지못해 하는 일, 남의 시선 때문에 망설이면서 하는 일,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하는 일. 이러한 일들 모두가 솔직하지 못한 일이고, 하느님의 의지에 우리의 의지를 합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우리가 감춘다고 우리의 속마음을 하느님께서 모르실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억울하다고 하느님께 솔직한 심정으로 호소를 하다가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욥기 40:2)라는 책망을 들었지만, 그런 그의 솔직함을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인정하셨습니다. 욥에게 충고를 했던 그의 세 친구들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책망을 하십니다.
“ 너와 너의 두 친구를 생각하면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구나.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 욥기 42:7
너희는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짊어질 수 없는 짐을 욥을 비난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아는대로, 그들이 배운대로, 그들의 의지대로 절망에 빠진 욥을 더욱 절망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들 자신도 짊어질 수 없는 부담과 원칙을 욥에게 관철시키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회칠한 무덤”이란 책망을 들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사들과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가장 많이 공격한 무리도 바로 유대교 엘리트였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무리도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보다 더 숭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야고 3:1
오늘 야보고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한마디 충고를 합니다. 교사가 되지 말라고.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교사란 직업은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확신하는 것을 자신의 의지에 투영하여 남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의지가 발현되는 통로가 바로 “혀”라고 야보고서는 말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이 제일 간과할 수 있는 문제가 언행의 일치입니다.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것과 가르친 대로 행동하는 문제는 완전히 결이 다릅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것을 남에게 가르칠 때 우리는 솔직하지 못하여 자기의 의지에 양가적 마음이 생깁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자기의 의지를 거슬러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 말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변명만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보다 더 권위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교사란 직업이 아니더라도 늘 자신의 뜻과 의지가 타자에게 관철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권위와 권력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 주고 따라주길 바랍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 위에 선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야보고서는 우리의 의지가 혀와 행위를 통해 발현된다고 말합니다. 혀는 사람의 행위를 견인합니다. 그래서 야보고서의 말씀은 혀가 길들이기에 가장 힘들다고 말합니다. 혀를 길들이는게 힘들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자유 의지가 길들여지기 힘들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행위와 실천을 신앙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야보고서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 의지가 발현되는 혀부터 단속하라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부정적인 의지가 발현됩니다. 나쁜 말을 하면 나쁜 의지가 발현됩니다. 비난하는 말을 하면 결국 비난받을 일을 하게 됩니다.
물론 오늘 말씀은 야보고서가 교회 내 설교 또는 토론 때를 상정하고 말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실상 교회 내에서도 발언권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휘두를 위험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제는 교회 내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말을 하다보면 자기의 의지를 넘어서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말을 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입에서 두 말이 나올 수도 있고, 한 말과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깊이 생각한 후 말하지 않고 너무 즉흥적으로 말할 때도 있습니다. 한번만 해도 될 말을 반복해서 할 때도 있고,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나면 참 제 자신이 부끄럽고, 이러다 구원받기는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제나 중요한 봉사직을 맡은 사람들이나 교사들의 책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야고보고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실수가 없도록,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를 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늘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많이 아는 것으로 자신이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간과하는 것같습니다.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말, 감당할 수 없는 말, 자랑하는 말, 남을 세워주지 못하는 말 등은 교회 내에서 정말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야보고서의 말씀은 사제인 저에게 하는 말로 들립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묵상을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자기의 의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의지의 힘이 벌현됩니다. 자신이 하는 말과 생각, 행동이 모두 옳다는 전제가 없다면 자신감을 가지기 힘들 겁니다. 여기에서 작동되는 기제가 바로 “인간 중심주의”와 “자기 중심주의”입니다. 인간 중심주의와 자기 중심주의가 아니면 인간은 좀처럼 자기 확증을 가지기 쉽지 않은 존재입니다. 알 수 없는 것에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낍니다. 불확실성에 인간은 매우 불안과 불편함을 느낍니다.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것은 자기 확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확증성이 약한 사람은 늘 정신증에 시달릴 확율이 높습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에게 의지가 약한 사람이 가스라이팅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을 약간 다른 표현으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마다 자기 의지가 옳다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의 일에 여러 개의 의지가 작동하게 된다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을 아실 겁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할 때 “저마다” 자기 의지와 주장만을 한다면 어떠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내가 아는 만큼이 아니라 내가 알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수나우라 테일러) 진정으로 타자와 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나의 의지, 나의 말이 모두 “잠정적”임을 인정할 때, 이러한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나의 의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의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실증적이지 않고 확증적이지 않은 일이라도 유연성을 가지고 보면 세상은 또 다르게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치를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남에게 가르치려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경험치를 보편화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좀더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창조절기를 보내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줍니다. 창조질서의 회복에는 오직 하나의 일, 하나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창조질서의 보존과 자연환경의 회복”은 자기 의지로 똘똘 뭉친 우리 인간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우선 내려놓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에 합할 때,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그분의 마음에 합한” 하나의 의지에 하나의 일이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란 생각; 인간이 모든 피조물과 공생하는다는 생각보다 이를 다스리고 군림한다는 생각; 모든 피조물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 인간이 모든 피조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와 자연의 의지에 반하게 합니다.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와 자기 중심주의가 매우 취약하고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는 하느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의지에 모든 피조물들은 순응하고 순종합니다. 그래서 자연은 생성과 파멸을 반복하면서도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분의 의지대로 계속해서 존속되고 생존하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들의 잠정성을 인정합니다. 소나 돼지는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 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유한하고 잠정적이며 취약한 의지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자연에 대한 우리의 폭력은 결코 줄어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의 발현이 지금까지 하느님과 자연에 반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우리의 의지를 온전히 그분께 돌려드릴 때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복잡한 생각들을 내려놓고 우리의 의지를 하나로 합할 때입니다. 자연과 시간은 우리를 더이상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하나의 의지, 하나의 일, 하나의 마음으로 우리 앞에 당면한 환경 문제와 우리 각 개인의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레독서_연중24주 (나해) 1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구하오니, 우리를 도우시어 서로 용서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잠언 1:20-33
20 지혜가 거리에서 외치고
⋅ 장터에서 목청을 돋우며
21 떠들썩한 네거리에서
⋅ 소리치고 성문 어귀에서 말을 전한다.
22“철부지들아, 언제까지 철없는 짓을 좋아하려느냐?
⋅ 거만한 자들아, 언제까지 빈정대기를 즐기려느냐?
⋅ 미련한 자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거절하려느냐?
23 내 훈계를 듣고 돌아서면
⋅ 내 속마음을 부어주고
⋅ 내 속엣말을 들려주련만,
24 너희는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25 나의 온갖 충고를 물리치고
⋅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아
26 너희가 참변을 당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내가 비웃으리라.
27 두려움이 태풍처럼 덮치고
⋅ 참변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 들이닥치면,
28 그제야 너희들은 나를 부를 것이다.
⋅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29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30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
31 사람은 제가 맺은 열매를 먹고
⋅ 제가 꾸민 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법,
32 어리석은 자들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가 자멸하고
⋅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놓았다가 나둥그러진다.
33 내 말을 들어야 마음 편히 살고
⋅ 변을 당할 걱정 없이 평안히 살리라.”
28절: “너희들은” – 히브리 본문은 “그들은”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시_시편 19
1 하늘은
⋅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
. 창공은
⋅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줍니다.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
.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줍니다.
3 그 이야기도 그 말소리도 ◯
.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5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주시니,
. 마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
.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
⋅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
.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습니다.
7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
. 주님의 법도는 변함 없어
⋅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준다.
8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
. 주님의 법은 맑아서
⋅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9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
. 주님의 법령은 참되어
⋅ 옳지 않은 것이 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
.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
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
.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
. 모르고 짓는 죄일랑 말끔히 씻어주소서.
13 일부러 죄 지을세라 이 몸 막아주시고 ◯
. 죄의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주소서.
.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
.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내 바위요, 내 구원자이신 주여, ◯
.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야고 3:1-12
1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2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3 말은 입에 재갈을 물려야 고분고분해집니다. 그래야 그 말을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습니다. 4 또 배를 보십시오. 거센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크디 큰 배라도 아주 작은 키 하나로 조종됩니다. 그래서 키잡이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 배를 마음대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5 이와 같이 혀도 인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허풍을 떱니다. 아주 작은 불씨가 굉장히 큰 숲을 불살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6 혀는 불과 같습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세상살이의 수레바퀴에 불을 질러 망쳐버리는 악의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혀 자체도 결국 지옥 불에 타버리고 맙니다. 7 인간은 모든 들짐승과 새와 길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을 길들일 수 있고 또 지금까지 길들여 왔습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휘어잡기 어려울 만큼 악한 것이며 거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9 우리는 같은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11 같은 샘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솟아 나올 수 있겠습니까? 12 내 형제 여러분, 무화과나무에 어떻게 올리브 열매가 달릴 수 있으며 포도 덩굴에 어떻게 무화과 열매가 달릴 수 있겠습니까? 짠 물에서 단 물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_마르 8:27-38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있는 마을들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28 “세례자 요한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고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29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31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32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33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하시며 꾸짖으셨다.
34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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