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3. 나해_모든 성인의 날/연중31주일
이사 25:6-9 / 시편 24 / 묵시 21:1-6상 / 요한 11:32-44
“경건의 자리”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우리의 전례력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실현에 초점을 맞추어 성서의 서사들을 시각적으로 전례화했습니다. 이러한 전례력을 따라가는 것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과 최후 심판이라는 일련의 역사로의 초대입니다. 마지막 때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을 묵시문학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수고하고 고생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위로와 하느님의 영원한 현존이 인간과 함께함을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전례력의 끝인 11월 마지막 주일을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봉헌하며 이 세상 전능의 왕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άτω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써 역사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전례를 통해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전례력을 대림절과 함께 다시 시작합니다. 이러한 루틴은 매년 반복되며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자연스럽게 각인되도록 기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례력을 따라 한 해를 지내본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매우 체계적이고 신학적이며 또 매우 실제적이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반복은 우리 안에 강요된 단순한 교리의 세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같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구체적으로 상징화되어 전례 속에 육화 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경건의 자리”입니다.
묵시록의 말씀을 현실적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마치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처럼 신비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묵시문학을 단순히 이야기 또는 상징이나 비유로 치부를 합니다. 그러나 실제라는 것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가 가진,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러티브가 지닌 실제입니다. 어떠한 이야기에도 늘 시대의 삶의 자리가 반드시 반영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현실을 복제하는 가상과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내러티브입니다. 묵시록의 기자가 경험한 것은 이 세상의 언어로 결코 담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인지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는 현상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모든 시각적, 음성적 모티브를 가지고 기록될 수밖에 없습니다. 표현의 한계를 분명히 한 것이지요. 거두절미하고 애매한 모든 표현들을 제외시키고 나면 그래도 핵심적인 것들이 남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약속, 그리스도인에 대한 위로와 명예 회복, 죄인의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 한마디로 창세기의 창조와 같은 새로운 순간이 다시 온다는 것이 묵시문학의 핵심 내용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의 삶의 자리에서 이러한 묵시문학의 이야기들은 많은 신자들에게 가장 큰 힘과 위안을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장렬하게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이유도 이러한 종말에 대한 희망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하는 실제를 단순하게 치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의 내러티브에는 ‘경건의 자리’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신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날’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하느님께서 모든 신자들을 부활시킨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다음에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이 부활합니다. 이것이 “모든 성인의 날”과 그다음 날인 11월 2일 “모든 별세자의 날”이 전례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전에 모든 악마와 악령들이 어둠에서 놓여나서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믿음에 따라 사람들은 핼러윈데이에 흉측하고 무서운 가면을 만들어 액땜을 하는 축제가 생긴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대 혼란을 우리는 아마도 미리 이렇게 경험하며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제 초월과 내재를 구분하는 경계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장막이, 하느님의 현존이 인간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출애굽 사건의 예언 성취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나의 있을 자리를 정하고 너희를 저버리지 아니하리라. 나는 너희 가운데 살며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레위 26:11-12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갈망했던 일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종말의 때에 성취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약속을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믿는 신자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신자들이 교회에는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요한묵시록은 가장 논란이 되는 성서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탄생한 것도 바로 묵시록의 말씀을 무리하게 실제 세상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을 등가물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계시록에 나온 모든 것들을 문자적으로 현상의 세계에 적용하는 순간 초월의 실제성은 상실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묵시록의 기자는 자신이 본 환상을 표현할 어떠한 재료도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과 유사한 말과 표현을 찾는 것. 그래서 그는 “구름 같은”, “햇빛 같은”, “인자 같은”, “~같은”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한 것입니다. 정확한 등가물이 없는 대상을 표현하는 것은 신비이고 그것은 ‘경건의 자리’에서만 믿음으로 인지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의 오감에 의존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각자가 자신이 가진 감각기관으로 이 현상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느끼고 인지합니다. 그래서 동물과 인간이 똑같은 세상을 보지만, 세상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비춰지게 마련입니다. 심지어 우리 인간들도 똑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각자 자기 주관적으로 그것을 인지하고 기억합니다. 보이는 세상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지각하는 것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실제가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철학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지각이 이러하다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지각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존합니다.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것은 분명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그것은 초월적인 것에 종속되게 마련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할 길은 없습니다. 오직 보이지 않는 편에서 보이는 편으로 내려오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몸을 입은 성육신 사건이 생긴 이유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통해 드러난 이 사건은 하느님의 ‘자기 비하’로만 가능합니다. 이를 우리는 “케노시스κένωσις”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완전하신 분이 자기 스스로를 비웠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자리는 이러한 자기를 비우는 ‘자기 비하’ 즉 “케노시스의 자리”입니다. 비우기 전에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초대 교부들이 광야에서 극한의 수련을 통해 이러한 자기 비움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헤시카즘ἡσυχασμός”, 즉 “침묵과 고요” 속에 머물렀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영성은 이러한 케노시스와 헤시카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비움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인 경건의 전례 속에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광야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자리에 말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전통은 오랜 시간 전례의 영성을 담당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 입당하면서 세속의 모든 것들을 비우고 하느님의 현존과 고요 속으로 나아가는 일을 매주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의 상징인 말씀과 성찬례를 통해 요한묵시록의 예언들을 미리 재현하고 경험합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으로 무장하여 세상으로 파송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각인되는 우리 전례가 지닌 경건의 자리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함께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주일 설교를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한 위로만을 구하고자 오는 것도 아닙니다. 삶에 허덕이고 지친 사람들이 이러한 경건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경험하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당부터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갈급함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자에게 경건의 자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건의 힘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주님 오실 때까지 견딜 힘과 용기 그리고 위로를 줍니다.
경건은 하느님 앞에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삼가 그분을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비난을 받은 것은 이러한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내심의 진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례와 예배가 경건의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한 우리의 삶의 양식과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선물을 받아보면 알 수 있듯이 마음이 담긴 선물과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선물은 쉽게 구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이렇게 상대의 본심을 느낄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어떠시겠습니까? 경건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행동을 온전히 주님 사랑 안에 완전히 침잠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9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내 바위, 내 구원자이신 야훼여,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시편 19:14
이러한 경건은 삶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는 자리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경건은 단순히 심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이 땅을 밟고 호흡하며 움직이는 매우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이 바로 우리 삶과 전례 속에 녹아날 때 우리의 전례는 이러한 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은 이곳에 있으면서 생각은 다른 곳에 있다면 우리는 경건의 자리에 온전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례력을 따르는 예배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거룩한 직무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 또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전례를 통해 표현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우리가 받는 위로와 은총이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께 향한 우리의 경건의 마음이 먼저입니다. 이러한 경건이 없는 “전례”는 단순히 교회의 연례행사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온전한 경건 속에서만 우리는 “모든 성인의 날”이 가진 진정한 의미에 도달하게 됩니다. 마지막 날의 희망 가운데 머무는 것은 이러한 전례력 속에서 반복에 의한 경건의 체화의 과정을 거치며 가능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일상이 너무나 세속적인 것에 쉽게 반응을 하기 때문에 주기적인 경건의 훈련 없이는 그러한 경건의 자리가 좀처럼 우리 일상에 만들어지기가 어렵습니다. 몸을 생각해서 하는 운동도 처음에는 서툴지만 무한한 반복을 통해 몸이 적응하고 운동의 기술들이 체화되듯이 경건도 부단한 반복을 통해 우리 몸에 체화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총이지만 경건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경건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말이나 행동, 경건한 기도문을 읽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경건의 말과 기도문이 우리 안에 체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육화된 증거가 바로 경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경건의 모양이 다른 것입니다. 경건의 분량도 다릅니다. 믿음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경건은 가시적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야고 1:27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이라 공동번역이 의역한 부분을 직역하면 “하느님 앞에 순결하고 더러움 없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형용사 “ἀμίαντος에미안토스”는 “더러워지지 아니하고 때 묻지 아니한 것, 사물의 성질을 변형시키거나 저하시키거나 그 힘과 활력을 손상시키는 않는”의 뜻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기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같은 경건한 사람도 하느님을 대면할 때 두려워 떨었는데 이러한 경건이 우리에게 가능할지는 저도 의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향이 우리에게 설정되어 있고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그러한 방향으로 성화의 길을 각자 나름대로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각각 다른 경건의 자리를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과정이 결코 우리 힘만으로는 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마르 10:27
구원의 완성도, 경건의 자리도 모두 하느님의 힘으로만 결국에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경건에 대한 의지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순종과 헌신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하는 몫은 우리 개인들의 몫입니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겠지.라는 말을 우리 한국사람들은 쉽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에게 “인연”이란 말은 참으로 생소합니다. 불교에서는 인연이 단순히 인과율에 의한 집착을 드러내게 하기 때문에 끊어버려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 인연을 어떤 운명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인할 인因, 인연 연緣”. ‘인’은 어떤 사건이 생기는 직접적이고 내적요인이고 ‘연’은 외부적인 요인입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의 성질이 유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외부의 바람입니다. 이것이 “연”입니다. 인연은 단순히 사람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우리 현상의 세계의 모든 관계성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하는 약속은 “인연”의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약속 위에 선 우리는 하느님과 질긴 인연의 관계성 속에 놓입니다. 우리의 약속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인’에서 비롯됩니다. 그 약속에 ‘연’을 이어가는 외부적 요인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전례와 전통을 통해 이러한 인연의 끈을 이어가며 매년 그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절기력의 막바지에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느님과 깊은 인연을 가진 우리로서 새로운 절기력을 준비하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분 앞에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절기력의 마지막 시기에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늘 못 미치는 경건을 보여도 우리를 인내로 참으시는 그분을 생각하면 늘 부끄러운 마음과 감사의 마음이 동시에 생깁니다. 세상적인 달력보다 한 달을 먼저 시작하는 새로운 전례력을 준비하며 우리의 소망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모든 성인의 날”부터 시작하여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까지 우리의 경건의 자리를 잘 보듬고 새로운 전례력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진심과 경건의 능력이 우리 삶 한가운데 깊이 자리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11.1. 모든 성인의 날 (나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인들의 믿음과 헌신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앞서간 모든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아 주님의 진리를 이 세상에 증거하고, 마지막 날에 성인들과 더불어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25:6-9
6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을 잘 익히고
.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7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8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주시리라.
.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
9 그 날 이렇게들 말하리라.
.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 구원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 이분이 야훼시다.
.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야훼시다.
.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는 지혜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있어서
.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2 미련한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재앙으로 생각될 것이며
3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 의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이 받는 고통은 후에 받을 큰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 그들이 당신 뜻에 맞는 사람들임을 인정하신 것이다.
6 도가니 속에서 금을 시험하듯이
.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 그들을 번제물로 받아들이셨다.
7 하느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 그들은 빛을 내고
. 짚단이 탈 때 튀기는 불꽃처럼 퍼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다스리고 백성들을 통치할 것이며
. 주님이 무궁토록 그들의 왕으로 군림하실 것이다.
9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안에서 살 것이다.
.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뽑힌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성시_시편 24
1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 모두 주님의 것, ◯
.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 모두 주님의 것
2 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
. 이 땅을 그 물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3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산에 오르랴? ◯
.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4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
.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이다.
5 이런 사람은 주님께 복을 받고 ◯
.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6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
.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7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 싸움에 용맹 떨치신 주님이시다.
9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 만군의 주께서 영광의 왕, 그분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묵시 21:1-6상
1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5 그 때 옥좌에 앉으신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하고 말씀하신 뒤 다시금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6 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묵시 21:3 – 레위 26:11-12; 2역대 6:18; 에제 37:27; 즈가 2:10.
묵시 21:4 – 이사 25:8.
복음서_요한 11:32-44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찾아가 뵙고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34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 하고 말하였다. 37 또 그들 가운데에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38 예수께서는 다시 비통한 심정에 잠겨 무덤으로 가셨다. 그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39 예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자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40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시자 41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2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43 말씀을 마치시고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시자 44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모든 성인의 날은 10월 30일과 11월 5일 사이에 오는 주일로 옮겨 지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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