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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전시장가요~! (2)

James Chae 2011. 9. 2. 11:10

 

 

아빠, 전시장가요~! (2)
-전시관람은 이렇게 해보세요-

 

채창완

 

 

 

조소희作

 

 

   지난 번에는 전시관람 예절에 대해 말했고, 오늘은 관람 방법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는 전시장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임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잃지 않아도 무방할 것 같다. 여기서 제시하는 방법은 순전히 필자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어디까지나 참고하는 차원에서 읽어주길 바랄 뿐이다.


   처음 전시장을 들어서면 안내 데스크가 대부분 먼저 눈에 띈다. 사람이 드문 전시장에 작가나 큐레이터들이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을 경우 제일 먼저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몇몇 갤러리들은 관람자들의 시선을 작품으로 곧바로 유도하기 위해서 안내 데스크를 없애기도 하지만 이는 아주 극소수의 전시장에 제한된다. 처음 전시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오히려 마음 편할 텐데 그 데스크에 누군가 앉아 있으면 부담이 되게 마련이다. 마치 감시라도 받는 듯 그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갤러리를 찾은 아이들

 

 

   그런데 어떤 방향부터 가야 할까? 오른쪽? 왼쪽? 망설이다 보면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몇몇 전시회에서는 바닥이나 벽면에 관람자를 위해 화살표를 붙여두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이런 안내를 하지 않는다. 그럴 때는 가장 먼저 보이는 작품 쪽으로 방향을 옮겨 차츰 다음 그림으로 발걸음을 옮겨라. 혹 먼저 입장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따라 움직여도 무방하다. 만약 안내 데스크에서 방향에 대해 안내를 해주면 그리로 가면 된다. 원칙은 없지만 각 갤러리 마다 나름대로의 편안한 관람 동선을 가지고 있다. 가장 원활한 동선이 나오는 방향이 대부분 우측 방향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관람객이 움직이기 쉬워 보이는 곳으로 움직이길 추천한다. 갤러리에 들어가면 그런 느낌(?)이 올 것이다.

 

 

 

김병철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작품을 하나 하나씩 둘러 보고 다시 갤러리 중앙이나 현관 또는 전시장 사방 코너에 서서 전체를 보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이와는 반대로 전체를 본 후에 그림 하나 하나씩을 보는 방법이 있다. 둘 다 복합적으로 혼용해서 하는 것이 좋다. 어느 방법을 먼저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핵심은 나무도 보고 숲도 보라는 것이다. 작품 하나 하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과 전시장 각 코너나 중앙에서 돌면서 전체를 보는 아름다움은 분명 다르다. 이 둘을 모두 봐야지 작품과 전시회를 즐길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전시회 만의 독특한 “아우라Aura”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그 작품을 전체와 비교해서 보고 또 그 작품 하나 만을 집중해서 보길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 그 마음에 드는 작품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먼저 ‘이해’하려 말고 마음으로 ‘느끼려’ 하라. 그런 다음 이해를 위해 전시 안내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평론이나 전시안내문이 있으면 가능하면 그 전시장 내에서 읽기 바란다. 인쇄물을 가지고 나와서 읽는 것 보다 그 곳에 서서 읽어 보며 다시 작품을 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물론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그렇게 하길 바란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서로의 생각을 나눠라. 특히 아이에게 “이건 뭘 그린 건지 말해봐” 라는 질문은 삼가 하라. 가능한 아이의 상상력과 그림에 대한 이해를 존중해줘라. 현대미술은 이미 대상의 재현을 떠났으므로 더 이상 그림 속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하지 말기 바란다. 아이들이 작품에서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이 더 작품에 가까울 경우가 많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 비해 너무 많이(?) 안다. 그만큼 고정관념이 많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런 면에서 작품 감상할 때 보다 자유롭다. 그래서 그들의 얘기는 늘 신선하다. “나는 핑크색이 쪼아, 나는 파란색이 쪼아, 아냐 나는 빨간색이야” 그리곤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의 그림 앞에서 열광한다. 때론 작품에 그려진 것이 무엇인지 어른들보다 더 잘 이해하기도 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작가와 맞닿아 있을 때가 많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존중해 주기 바란다. 그림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딱지/어린이 작품

 


   그리고 만약 작가나 큐레이터가 현장에 있다면 작품에 대해 설명을 부탁해보라. 관람객은 그럴 권리가 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면 더욱 그러하다. 자신 있게 자신의 궁금증을 물어보기 바란다. 무식한(?) 질문이 될 수도 있지만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더 무식한 것이다. 전시감상도 배우면서 늘기 때문이다(혹 작가로부터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말기 바란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잘 안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보다는 큐레이터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

 

 

신문을 보는 아빠/어린이 작품

 

 


   처음엔 낯설고 뭐가 뭔지 모르지만 꾸준히 전시관람을 하다 보면 점점 자신의 취향을 알게 되고 작품들이 더욱 정감 있게 느껴질 것이다. 친숙해지는 만큼 더 잘 보인다. 미술적 감흥은 음악과 달리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짧은 시간에 하나의 작품은 우리의 시지각을 통해 많은 정보(?)를 전달해줄 수 있다. 물론 해독 불가능한 감흥이겠지만 작품은 스스로 우리에게 얘기해 온다. 이것은 내 얘기가 아니라 이미 하이데거가 말한 것이다. 작품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 정립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는 작품이 진리를 우리에게 말한다는 것이다. 작가나 작품의 대상이 아니라 ‘그림 자체’에 진리의 근원 같은 뭔가가 있다는 거다. 그러나 이에 반해, “작품의 진리는 존재하면서 부재한다”고 한 데리다는 존재하는 것은 “기표의 놀이”라는 “유희”뿐이라고 했다. 누구의 얘기가 맞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작가와 대상에 중요성을 둔 모더니즘 미술과 달리 현대미술에서는 ‘작품 자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만은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누구의 말이 맞을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듯싶다. 왜냐하면 현대미술에서는 감상자도 주체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작가의 창작이라면 전시회는 ‘큐레이터’의 창작이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에 따라 똑같은 곡이 전혀 새롭게 해석되는 것과 같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곡을 재창조해내는 것 같이 큐레이터도 전시회를 통해 작가의 작품을 새롭게 창조해낸다. 그리고 전시회는 작품을 통해 작가가 사회와 소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여기서 말하는 ‘소통’은 의미와 개념의 소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내의 여러 조직간의 관계성과 관련한 것이다). 물론 반대로 대중도 전시회를 통해 작품을 만나고 작가와 소통한다. 이런 관점에서 전시회는 예술 소통의 중요한 사회적 시스템이다. 현대미술은 이러한 전시 시스템 조차도 전복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전시장을 대안 할 방안이 나오기 까지는 이 시스템은 좋으나 싫으나 현대 사회에서 존속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전시장을 방문하는 수고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전시장에서 느끼는 독특한 ‘아우라’는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렵다. 전시회 관람보다 영화 관람을 더 선호하는 대중의 취향을 뭐라 비판할 수 없지만 전시장을 찾는 대중의 발걸음이 늘 아쉽다. 기성 세대야 너무 바빠서 그럴 시간을 낼 수 없거나, 기회가 없어서, 혹은 무관심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만큼은 예술을 감상하고 느끼고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 나갈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여기에는 현 학교 교육 시스템의 문제도 있지만 여기서 거론할 마음은 없고 먼저 가정에서부터 이러한 기회를 조금씩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학교 교육과 연관된 (방학 숙제나 미술 숙제 등) 이유로 전시장을 찾는 것은 아이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방학 때 마다 우후죽순으로 열리는 대형 전시회나 이벤트성 전시회 또한 그러하다. 예술적 교양을 쌓는 것은 결코 일회성 이벤트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과 친숙해지려는 작은 노력과 습관이 결국 예술에 대한 교양을 키우는 지름길임은 자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