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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와 단군의 만남?!_이만열의 단군문제와 기독교_2004년

James Chae 2011. 12. 30. 22:11



 *이만열의 단군문제와 기독교 [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운동]을 읽고...

 


야훼와 단군의 만남 ?!

-단군문제와 기독교-

채창완

 

 

모든 언어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훔볼트

 

한 민족의 언어에는 그들 민족의 세계관이 반영되어있다. 언어철학자 훔볼트의 말처럼 누구나 모국어라는 자신의 안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게 되어있다. 출애굽기 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을 부른 하나님이 과연 어떤 하나님인지가 모세에게는 무척 중요했던 것이다. 구약 전반에 나타나는 야훼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두 가지 명칭은 각각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세계관과 신관을 담고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두 이름은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에 그 뿌리를 둔 것이다.


이만열의 [단군문제와 기독교]에 관한 논문은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민족의 신관에 맞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단군신화를 연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 샤머니즘인 단군신앙의 환인,환웅,단군을 각각 창조주Creator,Spirit,Lord로 설명하고, 특히 기독교의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정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서구 기독교가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성서의 하나님의 명칭을 각 언어로 다양하게 번역했는데, 예를 들어, 중국의 상제上帝와 일본의 가미가 그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들도 기독교의 독특한 유일신론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정통보수교단의 초기 선교사들인 게일, 할버트, 언더우드 등이 이러한 명칭문제로 고민했다는 사실을 이 논문은 보여준다. 이는 현재의 한국보수교단의 우리민족토착문화에 대한 반감적인 태도에 비추어볼 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1893년부터 1904년 까지 단군신화의 하나님을 기독교적 하나님으로 변용 채택하고 1906년에는 한글 신약전서에서 이 명칭을 공식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불과 20년의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성과였다. 불교, 유교, 도교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존재, 즉 유일신론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성이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는 것을 초기 선교사들은 간파했고 이러한 하나님이 바로 단군신화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에게 이러한 연구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문명과 역사가 진보하듯이 모든 종교도 기독교로 점점 진보해 간다는 종교하강설과 기독교의 진리가 타민족 문화 속에서도 접촉점과 연속성을 갖는 다는 성취설등이라고 이만열은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우리 한민족에게 예비해두신 신관이 바로 단군신화의 신관이라는 것이다. 초기에 언더우드는 이러한 것들을 종교혼합주의라고 비판했지만 후기에는 종교하강설의 입장에서 이를 적극 수용하여 많은 유일신론적 단군신화의 연구 성과물을 내었다고 이 논문은 밝히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 하나님에 대한 용어 문제와 단군신화의 삼위일체론에 힘입어 한민족에게 쉽게 그리고 급속도로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이 일제와 결탁하여 한국의 기독교를 정교분리의 길을 가도록 하여 한국 교회가 사회문제를 등한시하게 만든 책임도 있지만, 난 이 논문을 통해 그들의 한국 기독교 선교를 위한 또 다른 노력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단군신화에 대한 헐버트나 게일의 연구와 자세는 그들의 노력 위에 서있는 오늘날의 한국교계에 반성의 거울이 된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한민족의 단군전통의 하나님 신앙에 뿌리를 내린 한국의 기독교가 오늘날 서구화, 특히 미국화 되어 가는 것은 왜 일까? 지난 3.1절 기념 구국기도회에서 성조기를 들고 나와 친미를 외쳤던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남유다가 하나님보다 이집트를 더 의지했던 것 같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을 더 의지하는 것 같다. 물론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행태이지만 다수의 침묵하는 기독교인들 또한 그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단군상이나 불상에 물감들을 칠하여 다른 종교의 성상을 훼손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나 미국의 정책을 하나님의 뜻인 양 받아들이는 수구기독교인들이나 우리 민족사적 관점에서 보면 비판의 화살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이다.


유대 땅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헬라 문화 속에서 정착되었듯이 기독교의 복음은 각 민족 고유의 문화 토대 위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한 민족의 하나님 개념에 기독교의 신 개념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가나안의 최고신인 을 야훼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던(물론 학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있지만) 점을 상기하자. 각 민족에게는 그 고유한 언어와 세계관이 있고 이에 근거한 독특한 신관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1:20 (표준새번역 개정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이 모든 만물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사도 바울은 간파하고 이방인 선교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각 민족의 문화 속에는 하나님의 신성을 이해할 열쇠가 주어져 있다. 서구인의 세계관과 정치적 이해가 앞서는 성경 해석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신관에 뿌리를 둔 성경의 해석과 신론이 매우 중요해 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우리의 것만을 주장하는 국수주의적 태도 보다는 타문화와 타종교에 대해서도 더욱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면서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우리 한민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