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中 ‘3.1운동과 한국기독교’ (pp.335 ~ 355),지식산업사,1992>를 읽고…
교회의 사회참여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능성
-3.1운동과 한국기독교-
채창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계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주는가? 3.1운동에 참여했던 자랑스런(?) 한국교회의 역사가 이후 교회의 친일행각에 의해 왜 과소평가되고 있는가? 이는 ‘3.1운동과 한국기독교’의 올바른 평가가 등한시 되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연구로 이만열 교수는 이 논문에서 3.1 운동에서 기독교가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 참여의 동기를 ‘기독교인인 동시에 억압 받는 한민족의 구성원’으로서의 당시 초기 식민지 시대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신앙의 측면과 민족적 양심의 측면’에서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당시의 개신교 교회가 선교사들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그 시작부터 ‘사회개혁’과 ‘민족주의’의 진원지 였음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천도교와 더불어 일제 식민지 하에서 유일하게 전국적,국제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가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또 민족독립운동가들의 활동거점을 제공한 사실은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에서 새롭게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임을 이 논문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3.1운동 준비와 전개 과정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기독교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왜 3.1운동을 기점으로 한국교회사에 변화가 일었는지에 대한 원인을 선교사들에 의한 ‘정교분리 및 전통주의적 신학교육’을 받은 교회지도자들의 ‘소극성과 회의주의’에서 찾고 있다. 교회지도자들의 소극성은 민족대표에 참여한 기독교인 중 4명이 거사 당일 늦거나 불참했던 일, 또 천도교와의 제휴를 신앙적 이유로 처음에 꺼려했던 점등을 이만열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그는 3.1운동 이후의 교계 지도자들의 ‘회의주의’는 결국 정교분리를 가속화하고 식민지 통치체제에 협력하며 ‘현세부정적 내세지향적’ 성격으로 한국교회를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 속에서도 이만열 교수는 한국의 기독교가 3.1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며 이 논문에서 통계자료를 예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전체인구의 1.3% 밖에 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이 3.1운동 주동세력의 25~38%를 차지했고, 피체.투옥자의 17~22%를 차지했다는 사실과 당시 기독교인들 중 부르주아 지배층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부분이 소시민과 지식인 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독교계의 3.1운동 참여를 민족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새롭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우리 민족에 대한 업적(?)들이 오늘날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3.1운동이후에 일제에 협력하게 된 기독교에 그 1차적 책임이 있으며 또한 해방 후 친미 정당이나 군부독재정부에 순응했던 한국교회에 2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이와 연관하여 두 가지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는 평신도 중심의 민족자족적으로 시작된 한국 교회가 왜 3.1운동 이후 급격하게 반민족적인 정교분리주의로 나아 갔는가 란 문제이다. 둘째는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민족공통의 문제’를 놓고 천도교와 불교등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유대가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오늘날의 에규메니칼 운동에 어느 정도 연관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첫번째 문제에 대한 원인을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적 정통주의 신학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3.1운동 이후 심화되는 일제의 종교탄압 속에서 기독교가 생존할 유일할 방법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는 결국 한국교회가 한국민족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을 회피하고 결국 개인구원에 치중하는 잘못된 길을 가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만열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인 16인도 ‘교회나 교단적인’ 참여가 아니라 민족구성원의 하나로서 개인적인 신분으로 참여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선교사들의 영향 하에 있었던 한국교회가 3.1운동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을 회피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한국교회는 3.1운동 이후 더 이상 민족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이 될 수 없었고 반민족적, 친일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한국초기의 신학이 민족의 문제를 아우를 수 없는 정통주의적 신학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 정통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한국 교회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자들의 눈을 지상이 아닌 저 하늘의 천국(?)을 바라보게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양한 현대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정통주의 신학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을 전공한 크리스천으로서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할 때 마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이는 작게는 나의 책임이며 나아가 모든 한국의 기독교인들,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책임감과 한국교회의 각성이 여기에 필요한 것이다. 다양한 신학의 발전은 결국 현대사회에서 교회의 존속과도 분명히 직결될 것이 분명하다. 텅 빈 교회당이 늘어가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교회들의 문제가 결코 그들만의 문제에 머물지 않을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종교계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차원에서 새롭게 접근할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민족공통의 문제에 대해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민족의 구성원의 하나로서 함께 제휴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당시 교계지도자들이 ‘정통주의 신학’의 한계를 넘어 민족적 거사에 대해서 타종교와의 연합문제로 ‘기도’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면 이는 현대의 종교간의 대화도 민족의 당면 과제의 중요성 여하에 따라 가능하지 않을까? 당시의 보수정통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목사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신학에 뿌리를 둔 오늘날 한국 교회들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특히 남북통일문제, 환경문제, 인권문제 등은 종교의 영역을 넘어 우리 민족적인 차원에서 반드시 함께 의논해야 할 문제들이다. 세계화의 시대 속에서 더 이상 국수주의적인 자세는 허용될 수 없으며 민족의 고유한 특성을 지키면서 모든 민족의 공통적인 문제에, 특히 환경과 인권문제 등에 한국 교회가 앞장 서야 할 때가 아닐까? 개인의 구원과 개인의 축복도 온전한 사회적, 환경적 바탕 위에 가능하다는 것을 한국 교회가 깨닫는 다면 ‘기도’와 아울러 적극적인 사회 통합의 대화의 자리에 교계가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정통주의 신학’에 머물러 있는 한국 교회와 신학자들의 자성의 노력이 필요하며 현대사회에 필요한 대안적인 ‘성경의 새로운 해석’ 즉 ‘새로운 신학’이 요구된다. 이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닌 한민족을 거점으로 하며 아울러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두 가지 모두 ‘신학적’ 문제로 귀결된다. 신학이 없이 신앙만 있는 교회는 머리는 텅 비고 가슴 만 있는 사람과 같다. 복잡해 지는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보수주의적인 정통주의 신학이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자명하지만 한국 교회는 이를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날로 늘어가는 동성애 문제, 유전자 문제, 환경문제, 인권문제 등과 같은 복잡한 현대사회의 질문에 교회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여 답변을 줄 것인가? 이것이 현대 신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기독교가 번성(?)한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의무가 아닐까? 한국 사회에서 교회와 다양한 신학의 만남은 과연 불가능한 과제일까? 여기서 나는 한 정통주의 교단이 구호로 외치는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희망적인 가능성을 가져본다.
“내게 능력주신 자 안에서 내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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