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함께 보는 무신론에 대한 고찰]
신은 정말 죽었는가?
근대문명[1]을 비판한 예언자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
채 야고보
[들어가는 말]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은 존재하던 신이 없어져버렸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독단적,형이상학적 원리로서의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2]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신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그리스•로마의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근거하여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문화적 교양의 발전을 지향했던 인문주의는 모든 천상의 권위를 인간 세상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의 포문을 연 서구문명은 그리스.로마의 합리주의와 기독교의 절대주의에 그 뿌리를 두며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 오고있다. 근래에 자주 사용되는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그 말 뜻 그대로 인간의 자유를 한껏 드높이는 듯 싶지만 그 자유는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계몽주의가 지향했던 자유, 평등 그리고 휴머니즘은 과연 실현이 되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현대 사회 속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부의 불평등과 인권유린, 자연에 대한 파괴 등은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성중심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서구문명이 추구한 자유는 진정 인간의 해방을 추구한 자유였는가? 물론 15세기 이후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교황권으로부터의 인간의 자유는 성취되었지만 그러한 자유가 과연 인간 모두에게 주어졌는가? 자본을 중심으로 한 신흥 계급인 부르주아지가 교황과 왕, 그리고 귀족이 누리던 그 자유를 대신 물려받은 것은 아닌가? 계몽주의가 주장한 이 ‘계몽’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전제됨으로 결국 가르치는 자인 부르주아지와 가르침을 받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구분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이러한 계몽에 의해 더 나은 근대적 인간이 될 수 있었는가? 부르주아지의 사회개혁에 기여한 것이 루터와 헤겔이 아니었던가! 교황권을 견제하기 위해 군주들에게 의지했던 루터나 비왕족 출신의 프랑스 혁명의 영웅인 나폴레옹을 보고 감탄했던 헤겔 모두 ‘부르주아지’의 승리를 믿었던 것이 아닐까?
데카르트의 인간 정신의 혁명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근대서구문명은 인본주의의 승리를 장담했었다.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은 이러한 합리주의적 인본주의의 승리를 보증하는 듯 했다. 그러나 서구문명은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이성중심적 문명에 회의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서구문명의 한계는 양대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세기 전에 이미 몇몇의 예언자들에 의해 예견된 일이었다. 이런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은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 등이며,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근대문명의 근간을 이룬 근대 철학의 해체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비판한 것은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뿌리를 둔 서구근대철학이며 또한 그 문명이었다.
나는 이 글에서 위 세 사람의 철학적 중심사상을 신론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과 연계하여 미술작품을 통하여 그 작품에 반영된 사회문화적 요소들을 검토할 것이다. 이는 이 글의 중심 주제인 ‘신론과 사회사상’과도 연관성을 가지면서, 또한 미술작품과 그 작품에 반영된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는 나의 연구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계몽주의 이후 발전된 서구 부르주아지 문명에 대한 비판을 이들 세 명의 무신론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러한 관점에 반응했던 몇몇 그 시대의 작품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 미술 작품들은 각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으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이들 세 사람이 가한 기독교 비판에 대해 겸허한 자세로 수용하고, 이를 통해 내 자신과 현대 기독교를 돌아보는 반성의 기회를 갖고자 한다.
‘가난한 자[3]’의 혁명을 꿈꾸며 : 마르크스
윌리엄 호가스[4]의 작품 ‘방탕(The Orgy)’은 18세기 부르주아지 사회의 한 단상을 여실히 보여준다.[그림1] 계몽주의에 의해 ‘인간적 자유’를 누리는 부르주아지와, 역설적이지만, 계몽주의에 의해 해방된 인간의 내면 표현의 자유 덕분에 이런 비판적 작품이 가능했던 호가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가? 계몽주의는 전자에게는 부에 넘치는 부르주아지의 자유를 그리고 후자에게는 예술 표현의 자유를 선사했다. 이와 같이 계몽주의 영향 하에서 낭만주의 미술은 때론 부르주아지에 대해 비아냥적인 태도나 찬양을, 때론 자연 만물에 대한 감흥을, 그리고 때론 이국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 등을 표현하며 종교나 사회의 금기에 의해 억눌린 인간 감정의 솔직한 표현을 시도했다. 낭만주의 미술에서 예술 표현이 더 자유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작품 어디에도 부르주아지 체제에 대한 비판은 없다. ‘방탕’이란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도 결국 부르주아지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비판이며 이는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에 의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부르주아지의 이상과 부적합하기 때문에 내려진 비판일 따름이다. 한마디로 이 그림은 부르주아지 위상을 바로 정립하기 위한 윤리교과서적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5] 부르주아지는 새로운 사회의 모범을 보여야지 이렇게 흥청망청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한 이 작품은 더욱 계몽주의적이다.
계몽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또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자. 그는 다름아닌 스페인의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6]이다. 프랑스 혁명의 주역인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때 고야를 비롯한 모든 스페인 시민들은 이 나폴레옹의 군대가 왕정에 억눌린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가져 다 주는 해방군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프랑스 군대의 잔혹성 앞에 무참히 무너졌다.[그림2] ‘5월 3일’이란 이 그림에서 고야는 프랑스 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를 강력하게 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고난은 여기서 두 팔을 벌리며 자유를 외치고 있는 젊은 청년으로 대체된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항쟁의 의지가 시민들의 얼굴에 비친다. 자유를 위해선 결코 죽음도 두렵지 않다. 종교적 숭고함은 종교의 영역을 떠나 이제 계몽된 시민의 품에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 고야의 ‘5월3일’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담은 일종의 계몽주의의 ‘성화聖畵’라고 할 수 있겠다.[7]
그림 2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3일’, 1814-15년, 캔버스에 유채, 2.7 x 4.1m
그러나 이렇게 많은 시민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 과연 누구에게 돌아갔는가? 우리는 다음 작품에서 어느 정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스타프 쿠르베[8]의 ‘돌 깨는 사람들’이란 이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 그 특징이다.[그림3] 부르주아지적 취향의 낭만주의 미술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실주의 미술의 이 작품에는 더 이상 계몽주의에 대한 찬미나 인간 내면의 낭만 등은 찾아 볼 수 없다. 찢어진 옷에 검게 그을린 피부, 그리고 밀짚모자의 어둔 그림자 드리운 얼굴 등은 이들의 삶이 어떠한지 느끼게 해준다. 쉼 없이 일을 해도 결코 형편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채석장 인부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그 배후에 있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판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최대 수혜자가 된 이 부르주아지도 이들 민중의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까지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돌 깨는 사람들’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 속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어떤 저항의 의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에 가려진 얼굴은 그들의 고통스런 얼굴을 감추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저항의 힘까지도 감추어 놓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그림 속에서 밀짚모자를 눌러쓴 인부의 얼굴을, 아니 그 표정조차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아마도 어둠 속에 가려진 얼굴들의 실체가 바로 우리 사회의 민중이며, 너와 나, 또는 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쿠르베가 이러한 그림으로 계몽주의의 모순에 항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19세기 산업사회 속에서 그의 주변에서 목격한 삶의 한 장면들을 보이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쿠르베의 노력으로 우리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눈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림 3 구스타프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The Stone Breaker)’, 1845년(1945년 파손됨), 캔버스에 유채, 1.6 x 2.6m
이제 마르크스로 넘어가자. 우리는 위의 그림들을 통해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의 사회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산업혁명과 계몽주의에 의해 시작된 근대산업자본주의가 한편으론 부르주아지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억압하는 이중적 모순을 드러낸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마르크스의 근대자본주의 비판은 이러한 모순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는 신에 대하여 ‘신은 인간의 투사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9] 이는 포이에르 바하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신의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며 신의 지식은 인간의 자기 지식이라는 것이다.[10]그래서 마르크스는 신에 대해서 보다는 인간과 그 실재에 대해서 얘기한다. 결국 그의 무신론은 인간학이며, 이는 인간의 실존에 접근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는 근대철학의 의식과 대비되는 물질, 주체와 대비되는 ‘대상’이란 개념에서 벗어나 대상을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정의했다. 즉 대상은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정의 된다는 것이다. 중세의 ‘집사(執事)’와 현대의 그것은 분명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세의 집사는 주인에게 종속된 하인이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거취문제를 결정할 수 없는 운명적 존재였지만, 현대의 집사는 직업으로 주인과 상관없이 자신이 스스로 거취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 ‘집사’라는 직업의 대상이 놓여진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가치도 변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는 인간을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여 물질적 사회 조건, 노동과 생산의 역할, 생산 조건 및 전체로 본 사회 조직의 출현에 관해서 분석한다.[11]
마르크스는 실천적 맥락과 무관하게 어떤 대상을 지각하지 않는다. ‘실천’의 맥락에 따라 대상은 다르게 파악되기 때문이다. 즉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 나오기 전까지 중세인들은 여전히 온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것과 같은 예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양식이나 일상적인 실천, 혹은 목적을 갖는 실천 속에서 사물을 지각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은 진리를 입증하여야 하고, 그 진리는 곧 실재와 능력, 자기 사유의 현시성이다’[12]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인간 해방 문제를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며 이념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회 문제로 간주한다.[13] 특히 그는 ‘노동의 착취 현상이 생산 체제에 기초를 두고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도 그 생산 체제가 노동 계급 전체와 자본 계급 전체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 기초를 두고 이해되어야 한다' [14]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인간해방은 자본주의적 체제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또한 마르크스는 인간을 구속하는 불의하고 비인간적인 사회 조건 속에서 종교가 나타난다고 했다.
‘종교는 그 세계의 일반적인 이론이며 그 세계의 도덕, 그 세계의 엄숙한 보완수단, 그 세계가 주는 위안과 정당화의 보편적 원천이다. 종교는, 인간 본질의 참다운 실재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본질의 환상적인 실현이다. 종교에 대항하는 투쟁은 따라서, 간접적으로는 종교가 영적 후광이 되어주는 그 세계에 대항하는 싸움이기도 하다’[15]
여기서 언급된 ‘세계’는 무엇인가? 이는 마르크스가 살았던 세계인 계몽주의 이후 산업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가 성행하던 19세기의 유럽이었다. 나는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이 결국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한다. 산업혁명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열린 새로운 시대는 민중이 해방된 시대가 아니라 신흥 산업자본을 등에 업고 등장한 부르주아지의 시대였다. 이는 왕정 시대의 종말이었으며 또한 신흥 노예제도의 시작이기도 했다. 즉, 산업자본에 의해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계급제도가 계몽주의의 이름 하에 시작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세계’는 그리스의 합리주의와 기독교의 절대주의에 근거를 둔 이 계몽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종교는, 특히 서구 기독교는 민중으로 하여금 자신을 지배하는 세계구조의 악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아편’과 같은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계몽주의의 ‘자유’가 결코 성서가 말하는 ‘자유’와는 판이하게 다른 특정한 사회계급의 자유였다는 것을 기독교는 오랜 기간 침묵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노력한 만큼 특정한 부를 쌓을 수 있다는 생각은 계몽주의가 민중에게 준 달콤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았다. 민중이 노력하면 할수록 결국 잘 살게 되는 것은 부르주아지이고 민중들의 삶은 결코 더 나아지지 않는다. 물론 서구문명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지’라는 정책으로 부의 사회적 재분배를 시도했지만 이러한 제도도 마르크스 이후에 등장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무신론자였다. 그렇다고 그의 종교비판이 결코 터무니 없는 것일까? 그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기는 했지만 ‘소위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 마저 인간들의 개인적인 필요에 대해서 부심하는 대신에 그 사람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참상에는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사회원리들은 고대 노예제를 정당화했고 중세농노제를 찬양했다.’ ‘그리스도교의 사회원리들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서의 분리가 필연적이라고 설명하면서, 피억압자들에게는 지배계급이 자신들에 대해 자비로워질 것을 경건하게 기대하라고 가르칠 뿐이다.’[16] 이러한 마르크스의 비판들은 아직까지도 유용하지 않은가? 로마제국에 우호적이었던 사도바울이 로마서 13장에서 지도자들에게 순종을 강요한 것과 복음서의 산상수훈의 교훈의 상반된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 예수는 이미 산상수훈을 통해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가난한 자’의 축복을 설파했고 아마도 유대인이자 개신교도였던 이 예언자(?)는 이를 간파한 것이 아닐까?[17]
신은 정말 죽었는가? : 니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대성이 회화에 있어서 인간의 시지각에 집착하게 만든 것은 ‘사진의 발명’ 이후부터이다. 19세기 이전까지 부르주아지의 초상을 그리며 그들의 취향에 종사하여 생계를 꾸려가던 화가들은 사진의 발명에 의해 더 이상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술 표현에 있어서도 대상의 사실적 묘사에만 집중하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다. 이 새로운 방법은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그 이상의 사실적 재현을 보여주어야 했고, 또한 그 방법은 철저히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의해 수시로 변화하는 현상을, 즉 빛의 광학현상과 인간의 시지각에 근거하여 빛의 굴절에 따라 변하는 대상의 색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합리주의적이고 과학적인 근대서구문명과 같은 선상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이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추구했으며 내용면에서도 부르주아지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들이 처음 인상주의 작품을 발표할 당시 많은 사회적 저항이 있었지만 그것은 자연주의나 고전주의에 대한 형식에 대한 반발이었지 내용상의 반발은 아니었다. 결국 인상주의는 계몽주의에서 꽃을 피운 합리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서구문명의 또 다른 결과물일 따름이다. 인상주의의 대표화가인 르누아르[18]와 드가[19]의 작품을 보면 19세기 후반의 부르주아지의 삶을 우리는 엿볼 수 있게 된다.[그림4, 5] 미술사에 있어서 그들이 미술양식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들을 제외하고 그들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얼마나 부르주아지의 삶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계몽주의의 투쟁을 담은 고야의 그림이 그려진 지 60여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에서 도시 부르주아지의 삶은 마치 안정성을 찾은 듯이 보인다. 화려한 색깔과 밝은 축제의 분위기. 그것은 현란한 빛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이 심미주의자들의 당연한 귀착점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사용한 핑크 빛 만큼이나 부르주아지의 삶은 진정 인간 해방을 가져 다 주었는가? 반문하고 싶다.[20]
그림 4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Le Moulin de la Galette)’, 1876년, 캔버스에 유채, 130.7 x 175.3cm
계몽주의가 가져 다 준 유토피아가 고전적 과학이론들을 넘어서는 과학적 발전과 발견에 더욱 고무되어 있을 때도 바로 이 19세기 후기였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라고 외치며 이 시기에 근대서구문명의 죽음을 외쳤다. 서구의 합리주의적 이성보다 비이성적인 요소에 강조를 둔 니체의 철학에 반응을 한 몇몇 작가들은 계몽주의가 가져 다 준 공리주의적 미학에 반발하여 비이성적이고 인간 실존에 접근하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이들을 인상파의 이단자들인 ‘후기 인상파’라고 부른다. 물론 니체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아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했던 20세기 초의 미래파 작가들이나 키리코[21]와 같은 작가들도 있지만 여기서는 이 후기 인상파 작가에 국한한다. 왜냐하면 후기인상주의는 귀족주의적인 인상파 미술에 반대한 반 계몽주의적 성격을 띄는 미술이기 때문이다.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작가로 세잔[22],고호[23],고갱[24]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것은 ‘자연이나 인간 그리고 그림 자체에 내재한 구조적 본질이나 그 특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가시적인 실재(reality)보다 비가시적인 실재를 추구함으로써 이들 모두는 현대미술의 대표주자가 된다. 이들로 말미암아 현대미술이 ‘미술을 위한 미술’로 되는 문제도 야기되긴 했지만 이들이 제기한 계몽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림 5 에드가 드가, ‘수석 발레리나(Prima Ballerina)’ 1876년 경, 파스텔, 58.3 x 42cm
세잔의 그림 ‘사과바구니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Basket of Apples)’은 합리주의와 과학주의에 근거한 근대미술의 ‘원근법’이 어떻게 작가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림6] 원근법을 파괴한듯한 [그림4]의 인상주의 작품에서도 작가들은 여전히 합리주의적 원근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잔의 정물 그림은 정물의 구조적 본질, 즉 조형적인 구조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다. 정물이 놓여있는 테이블의 형태는 철저히 원근법을 무시하고 일그러져 있다. 이는 원근법이 주는 보편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반발이며 결국 근대 물질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서구문명에 대한 반대인 것이다. 왜냐하면 세잔의 작품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미학을 우리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치밀하고 계획적인 화면 구도에서 이러한 과학적인 기학적 요소를 볼 수 있다고 혹자는 말하지만(물론 그러한 요소가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세잔이 추구한 것이 이미 보편적인 물질의 이면에 있는 존재에 까지 이르고 있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이다.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증명되기 어려운 물질 각각의 고유한 존재 자체의 근원을 ‘계보학적’으로 그는 찾아 올라 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자연계의 각 대상들의 본질이 구형,원뿔 등과 같은 기하학적인 기본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림 6 폴 세잔,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1890-94년, 78.7 x 61.9cm
고호의 정신이상적인 그림은 세잔의 것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보여진다. 고호가 정신이상의 증상을 보이던 시기에 제작된 이 그림에서 우리는 서구문명에 의해 좌초된 한 인간의 외침을 발견하게 된다.[그림7] 물론 그의 작품이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낭만주의가 추구했던 인간 내면의 감정의 자유와 고호의 내면의 표현은 분명 다르다. 전자가 계몽주의의 선봉에 서서 고전주의적 형식주의 미술을 배격하는 역할을 했던 반면, 후자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멍든 한 인간의 영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회오리 치는 별빛은 더 이상 밤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인간의 소외감과 혼란을 상징하듯 이 그림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소용돌이 치고 있다. [25] 한때 작은 예수로 불리웠던 그가 왜 그러한 광기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감성의 소유자였고 아름다운 인간의 영혼을 가진 그가 인간성을 말살 시키는 근대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 지켜내기란 너무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는 근대사회에 물들지 않았고 또한 근대자본주의는 그를 물들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인간 실존은 그 시대 위에 발을 내려 놓을 수 없었고 그 시대는 그에게 쉴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근대자본주의는 결코 인간 실존의 해방의 여지를 그 자신의 영역 속에 남겨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 7 빈센트 반 고호, ‘별이 빛나는 밤’, 1889, 92.1 x 73.7cm
다음은 고갱의 경우를 살펴보자. 부르주아지의 삶과 인상주의의 광학적 자연주의에 반대한 고갱의 작품은 장식적인 요소와 원색적인 표현으로 유명하다.[그림8]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추상성은 반자연주의적이며 인간내면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그는 세속적인 현대산업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했으며 실제로 남태평양의 타이티라는 섬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원시적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 북서 지방인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을 배경을 해서 그린듯한 [그림8]은 창세기 32장의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가 종교화를 그린 것은 아니다. 이는 브르타뉴 지방을 배경으로 한 것에서 나타나는데 현실과 환상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서적인 사건은 단지 여기서 환상의 세계를 상징하는데 사용되며 그 본래의 성서적 의미는 상실된다. 그림 전면에 위치한 브르타뉴의 여인들은 고갱이 서있는 현실을 상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과 환상의 결합할 수 없는 동거가 그의 이 그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현대미술의 색채표현의 가능성을 열었다. 색채는 대상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고전주의적이고 과학적인 발상을 완전히 뒤집어 고갱은 대상으로부터 색채를 독립시켜서 독자적인 조형의 요소로 만들었다. 결국 자연계에서 색채는 대상에 존속된 어떤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이후 합리주의적이고 자연 재생적인 미술을 고갱은 완전히 포기하고 색채를 통한 반물질주의적인 세계를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인간의 심층적인 내면의 감정과 비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을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26]
그림 8 폴 고갱, ‘설교 후의 환영(Vision After the Sermon)’, 1888년, 92.1 x 73cm
인간의 내면과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니체의 사상에 접근했다. 이들 작품들 속에 보이는 인간성 상실에 대한 외침은 바로 니체 자신의 근대 서구사회에 대한 외침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개신교 목사였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배경에서 성장한 니체에 대하여 러셀은 다음과 같이 평한바 있다. ‘기독교 도덕에 대해 아주 격렬한 반역을 일으키는 대목에서조차도 높은 도덕적 격조 속에 유지되고 있다.’[27] 니체는 그의 계보학을 통해 서양문명의 본질을 파악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발견한 것은 ‘그리스 철학의 합리적 완전성과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28]이다. 이는 서구문명의 커다란 두 기둥이며 이들은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에서 그 꽃을 피운다. 결국 ‘니체 철학은 인간성 비판이며 동시에 문명 비판’[29]인 것이다.
니체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묻지않고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를 물음으로 근대철학에 대해 새로운 문제설정을 시도했다. 이러한 질문은 ‘진리의 예’를 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힘’을 묻는 것이고 결국 어떤 것의 의미를 아는 것은 그 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힘’을 아는 것이다. 니체는 이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니체는 근대 철학에 ‘의미’와 ‘가치’를 도입하고 이와 함께 ‘힘’과 ‘의지’란 개념도 도입한 것이다. 즉, 니체의 철학은 어떤 대상의 가치와 그것이 의미하는 의지를 파악한다. 그는 이러한 ‘비판철학’의 방법론으로 계보학을 제시하는데 이는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대상이 어떤 의지의 산물인지를 밝히게 된다. 그래서 니체는 ‘어째서 진리가 필요한가?’, ‘어째서 진리를 가지려 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진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니체는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30]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니체의 ‘신의 죽음’에 대한 언급은 과연 무신론적 주장인가 아니면 비종교적인가? 이와 같은 ‘니체의 언명은 그가 신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만 니체가 부정하는 신은 기독교의 신을 비롯해서 기존의 허구적 도덕을 소유한 신들이다. 니체는 여러 종류의 신들이 존재하며 새로운 여러 신들의 존재도 가능하지만 소위 유일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31]고 말한 것이다. 즉 ‘허구적 신 곧 노예도덕을 동반하는 신은 부정하지만 힘에의 의지의 표현인 신들은 인정한다’.[32] 이와 같이 니체가 ‘그리스의 신들, 호메로스의 신들을 힘에의 의지의 표현으로 보는 한에 있어서 그는 여전히 종교적이다’[33]라고 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신들은 디오니소스적이며 아폴로적이다. 디오니소스는 취함 곧 음악의 신으로 예술내용을, 아폴로는 조형예술 곧 미술의 신임으로 예술형식을 각각 의미한다.[34] 니체는 이 아폴론적인 요소가 소크라테스 이후 그리스의 합리주의를 낳았으며 그 후 ‘기독교의 절대성과 결합하여 인간의 삶과 세계를 완전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만들고자 했다’[35]고 보고 있다.
결국 니체의 ‘신의 죽음’에 대한 언급은 ‘정적 종교를 해체하고 동적 종교를 새로운 종교로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최상의 가치들을 전도 시키고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를 제시하려는 그의 시도등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36] 니체는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대립은 선과 악의 기원을 이룬다’[37]고 했으며 종교의 기원은 이러한 ‘강한 자와 약한 자 곧 강한 자의 선한 감정과 약한 자의 악한 감정의 갈등에서 비롯된다’[38]고 했다. 결국 신 또한 이러한 갈등 구조의 산물이며, ‘기독교의 도덕적 내지 종교적 개념들은 모두 상상적 원인과 결과의 산물’[39]이 되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힘에의 의지가 몰락하는 곳에는 항상 심리학적 퇴보 곧 퇴폐가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퇴폐’는 ‘허무’를 뜻하며 이는 결국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며 나아가 무화(無化) 시키기 때문에 결국 절대존재로서의 신을 날조하게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결국 니체는 ‘형이상학적 신’의 종말을 말한 것이며 이에 대한 근거로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 이전의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들’의 신을 예로 든다. ‘원래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도덕적 당위나 의욕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생생한 의미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허구적으로 날조된 신 개념에 관해서는 무신론자이지만 그리스의 자연적 신들에 관해서는 유신론자’ 인 것이다.[40]
여기서 우리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이 ‘존재하던 신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독단적, 형이상학적 원리로서의 신이 죽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는 그리스 합리주의와 기독교의 절대주의가 결합한 서구문명의 죽음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41] 그렇다면 니체가 제안한 ‘초인’은 이러한 서구문명에 물들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가진 자’이다. 이 초인은 미래의 인간이며 존재론적 원리인 힘에의 의지의 표현이다. 니체는 이 초인에 의해 퇴폐주의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정신을 해체하고 전이 시킴으로써 건강하고 자유로운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였다.[42] 이는 근대계몽주의와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치료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기독교가 산업자본화되어 가고 인간의 존엄성이 점점 상실되어 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아직도 니체의 예언자적 비판은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는 현대자본주의 사회가 부르짖는 ‘신자유주의’도 결국 그 뿌리가 서구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있기 때문이며 이는 부르주아지의 자유를 위해 프롤레타리아와 약소 국가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과 거리가 먼 ‘자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편승하는 듯한 현대 기독교는 ‘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의 외침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인간 이성의 해체 : 프로이드
니체에 의해 해체된 서구철학의 거대 담론은 이제 여러 가지 담론으로 바뀐다. 니체와 동시대에 살았던 프로이드도 인간의 심층적 자아에 대한 담론을 제기함으로써 서구근대철학을 해체시키는데 한 몫을 한다. 니체의 자기성찰이 근대성(보편필연적인 이성적 자아개념이 대표하는)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역시 자아의식에 대한 회의를 출발점으로 삼는다.[43]
프로이드는 인간의 심층심리 속에 존재하는 ‘무의식’을 발견하는데 이는 정신 안에 있지만 의식되지 않는 영역으로 인간의 사고하고 행동하는 일에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이다. 이는 그 동안의 인간의 ‘사고’에 기반을 둔 근대 철학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것으로 이 무의식이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44]이라 한다. 이 무의식은 ‘꿈’과 연관성을 가지며 인간내면의 감춰진 ‘성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성욕은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 억압되고 감추어지는 것이다. 이 성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여자의 경우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근거한다. 그는 모든 남성의 내면에는 모두 어머니와 성교하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여자의 경우는 그 반대) 이러한 욕망은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고 이 무의식을 프로이드는 초자아(Super ego,도덕적 양심),자아(ego,의식,합리성),원초아(Id, 숨어있는 힘)로 분류한다.[45]
종교와 연관해서 이를 살펴보면, ‘초자아란 종교적 신앙이나 도적 또는 교훈 등이며, 초자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유물로서 원초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지각의식의 체계와 가장 가까운 것은 자아이기 때문에 초자아는 지각의식의 체계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아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46] 프로이드는 모든 종교의 뿌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찾는데 ‘토템종교에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 그리고 후회와 죄의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결과로서 초자아를 형성한다. 종교적 신앙에서 신자의 신에 대한 관계는 신자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결국 그의 신개념은 인간의 심리적 창조물이며 ‘아버지-이상’, 즉 ‘자아-이상’의 변형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개념은 심리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억압’의 결과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47]
프로이드의 신개념은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그 기반을 두고 이러한 관점을 빼면 성립될 수 없는 이론이라는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종교의 기원에 대한 그의 해석은 근대합리주의적 사상에 물든 기독교에 자기성찰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인간 이성에 근거한 서구문명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며 더 나아가 종교의식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48]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철학이 아니면서도 근대 철학의 기본인 ‘이성’을 해체한 것이며 근대서구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이드의 영향은 미술에서 전위적인 작가들에게 흡수되어 전위적인 미술을 태동하게 한 원동력을 제공한다.
근대산업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낸 세계1차 대전 중에 태동한 미술계의 운동인 ‘초현실주의’는 프로이드의 사상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무의식’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 이들 작가들은 이성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을 그들 작품의 근저에 깔고있다. 그들은 순수한 ‘심리적 자동기술법(psychic automatism) [49]’에 의해 인간 내면의 진실한 생각의 요소들을 표현한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 내부의 이성이나 인간 외부의 미적,도덕적 선입관으로부터의 통제를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꿈’과 ‘환상’의 세계를 묘사한다.
여기서는 달리[50]의 그림인 ‘기억의 영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그림9] 그의 그림은 극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어 고전주의적 기법의 연장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고전주의 미술 기법을 도입하여 환상적인고 몽환적인 세계를 창출해낸 것이다. 우리는 세상 어디에도 이와 같은 장면이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마치 꿈에서 본듯한 이러한 장면은 인간의 합리성의 저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그림의 지평선은 더 이상 물질적인 세상의 가시적인 ‘원근법’에 의존하지 않으며 이성의 너머에 존재하는 피안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인간의 기억도 시간에 따라 굴절될 수 밖에 없음을 이 그림의 축 늘어진 시계는 상징하고 있다. 마치 역사가 진보된다는 헤겔의 사상에 반기를 들어 ‘역사는 시간의 굴절과 같이 굴절될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달리의 그림 속에서 어떤 시간이나 역사를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의 인식과 기억도 시간의 죽음과 함께 이 그림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기억의 영속’은 시간적인 요소와 비례 관계에 있다. 결론적으로 이 그림에서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심층심리에 자리한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세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9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영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캔버스에 유채, 24.1 x 33cm
[나오는 말]
나는 이 글에서 이들 철학자들의 사상의 문제점들은 지적하지 않았다. 이는 이들의 사상이 갖는 근대자본주의사상과 합리주의사상에 대한 ‘비판능력’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이들 사상에 대한 비판은 또 다른 나의 연구 과제로 남을 것이다. 다만 질문 하고픈 것은 이것이다. 이들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한낮 광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에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왜 일까?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살아가는 오늘날에 이들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내게 다가오는 것은 왜 일까?
나는 이들의 무신론을 근대합리주의적 이성주의적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점은 앞에서 살펴본 그림들이 모두 합리주의적인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갖고 있으며, 또한 이들 작가들이 적극적이든 혹은 소극적이든 이 세 사람의 사상을 그들의 비판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나는 왜 서구 기독교가 끊임없이 합리주의적 물질주의적 전통을 버리지 못하는지도 짐작하게 되었다. 이는 서구문명의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독교가 그리스의 합리주의 전통과 유대교의 절대주의 전통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계몽주의 이래로 발전한 ‘자유주의’의 실체가 결국은 ‘부르주아지’와 그들이 소유한 ‘자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임을 이들 세 명의 무신론자들은 보여주었다. ‘자유’, ‘해방’, 그리고 ‘휴머니즘’은 근대 서구문명이 추구한 바이지만 또한 이들 세 명의 무신론자들이 추구한 바이기도 하다. 그들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기 보다 인간 개개인의 실존에 더 중요성을 둔다. 물론 마르크스가 인간의 실존을 사회,경제적 역학 구조 속에서 찾으려 했던 점은 그 예외이지만 니체와 프로이드의 경우는 분명 인간 개개인에 중심을 둔 비보편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와 프로이드는 마르크스 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근대 철학의 영역을 해체했다고 할 수 있겠다.
20세기 후반에 마르크스의 이론에 근거한 사회주의가 몰락했지만 그의 자본주의 비판은 아직도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마르크스와 니체 그리고 프로이드의 종교의 근원에 대한 비판도 아직 설득력을 갖는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성서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합리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근대성에 계속해서 머문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명제는 영원히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현대 기독교가 현대서구문명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배양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신은 결국 자본주의의 ‘맘몬(Mammon)’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할 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신의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독교가 이들 무신론자들의 말을 겸허히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또한 더 나아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의식이나 교리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그 정체는 무엇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면 기독교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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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니체와 정신분석학’, 서광사, 2003, 서울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린비, 2004, 서울
B.러셀, ‘서양의 지혜’, 이명숙,곽강제 역, 서광사, 1991, 서울
H.W.Janson, ‘History of Art’, Thames and Hudson, 1995, New York
H.H.Arnason, ‘A History of Modern Art’, Thames and Hudson, 1988, London
한스 큉, ‘그리스도교’,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2002, 경북 왜관
김현화, ‘현대미술의 골고다의 초대’, 숙명여자대학교 출판국, 2004,서울
[1] 니체는 문명과 문화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았다 (강영계, ‘니체와 정신분석학’, 서광사, 2003, 서울, p.221 참조)
[2] 강영계, ‘니체와 정신분석학’, 서광사, 2003, 서울, p.229
[3] 신약성서 마태복음 5장3절
[4] William Hogarth 1697~1764 : 영국의 화가· 동판화가. 영국 근대회화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처음에 동판화가로서 독립한 후 유화(油畵)로 전향하여, 네덜란드의 풍속화에 신랄한 사회풍자를 담은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또 영국 만화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그의 예술정신은 회화보다는 낭만주의 문학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작품에 〈거지 오페라〉 〈방탕아의 편력〉〈최신식 결혼〉 등이 있다. (중앙멀티미디어백과 참조)
[5] H.W.Janson, ‘History of Art’, Thames and Hudson, 1995, New York, pp.608~610 참조
[6] Francisco Goya 1746~1828 : 스페인의 화가.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입 당시 궁정사회의 퇴폐를 개성적인 기법으로 묘사한 근대회화의 선구자이다. 렘브란트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1792년 청각을 잃고 제작의 자유에 눈을 떠서 풍자 정신을 발휘하였다. 99년 이래 스페인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1822년 파리로 이주하였다. '악마적'이라 할 정도로 투철한 사실주의로 날카로운 풍자에 찬 작품을 발표하였다. 초상화· 풍속화· 종교화에 능했고, 동판 화가로서도 뛰어났다. 작품에 〈옷을 벗은 마야〉 〈옷을 입은 마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5월 3일의 처형〉 등이 있다. (중앙멀티미디어백과 참조)
[7] H.W.Janson, ‘History of Art’, Thames and Hudson, 1995, New York, pp.658~661 참조
[8] Courbet, Gustave 1819~77 : 프랑스의 화가. 당시의 낭만주의 회화에 반발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그린 사실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다. 독학으로 루브르박물관의 옛 대가(大家)의 그림을 연구하였다.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이상주의에 반발하여 육안에 비치는 일상적인 세계만을 주제로 하여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였다. 1871년 파리코뮌에 관계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75년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대표작 〈오르낭의 매장〉 〈돌 깨는 사람〉 〈화가의 아틀리에〉 등이 있다.
[9] 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성염 역, 분도출판사, 1994, 경북 왜관, p.321
[10] Ibid.,pp.283~288
[11] Ibid., p.322과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린비, 2004, pp.178~200 참조
[12] 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성염 역, 분도출판사, 1994, 경북 왜관, p.323
[13] Ibid., p.323
[14] B.러셀, ‘서양의 지혜’, 이명숙,곽강제 역, 서광사, 1991, 서울, p.395
[15] 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성염 역, 분도출판사, 1994, 경북 왜관, p.325
[16] 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성염 역, 분도출판사, 1994, 경북 왜관, p.356
[17] 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성염 역, 분도출판사, 1994, 경북 왜관, pp.310~311 참조
[18] Renoir, Pierre Auguste 1841~1919 : 프랑스의 화가. 13세 때부터 도자기 공장에 근무, 도자기 그림을 배웠고,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다. 초기에는 쿠르베와 마네의 영향을 받았으나, 여기에서 모네· 시슬레와 알게 된 뒤 그들과 함께 인상파전(展)을 창설하였다. 인상파 작가로서 화단에 나갔으나, 훗날 프랑스 미술의 전통에 이어지는 독자적이고 청신한 작풍을 확립하고 풍부한 색채를 구사, 관능미 넘치는 많은 가작을 남겼다. 만년에는 색채가로서의 천성을 살려, 생명감이 약동하는 나부(裸婦)· 꽃 등을 그려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작품에 〈뱃놀이에서의 점심〉 〈목욕하는 여인들〉 등이 있다.
[19] Degas, Hilaire Germain Edgar 1834~1917 : 프랑스의 화가. 초기에는 J. A. D. 앵그르를 스승으로 하여 역사화를 많이 그렸으나, 차츰 색채가 풍부해지고 제재도 근대생활에서 구하게 되었다. 인상파 그룹에 참가하였다가, 인상파를 떠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였다. 나부(裸婦)· 세탁녀· 무희 및 서커스의 연예인 등을 화려하게 또는 사실적으로 그려, 시점 선택, 구도의 연구, 색채와 마티에르의 아름다움 등에 독특한 재능을 보였다. 작품에 〈뉴올리언스의 목화 거래소〉 〈다림질하는 여인〉 등이 있다.
[20] H.W.Janson, ‘History of Art’, Thames and Hudson, 1995, New York, pp.706~712 참조
[21] Chirico, Giorgio de 1888~1978 : 이탈리아의 화가. 아테네· 뮌헨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초현실파의 지지로, 카를로 카라, 조르조 모란디와 더불어 형이상학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이후 고전적 전통에 복귀하여 현대 이탈리아 미술에 공헌하였다. 짙게 그늘진 건축물을 황량한 기하학적 풍경 속에 묘사하는 것이 특색이다. 작품에 〈거리의 신비와 우수〉 〈폐허와 말〉 등이 있다.
[22] Cezanne, Paul 1839~1906 : 프랑스의 화가. 후기 인상파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회화에 뜻을 두고도 한때 아버지의 권유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친구인 E. 졸라의 권유로 1861년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로 학교를 옮겼다. 살롱에도 낙선하였으나, 피사로를 알게 되어 인상파 그룹전에 참가하였다. 80년경부터는 더욱 발전하여 풍부한 양감과 견고한 구성을 가진 독자적인 예술에 이르게 되었다. 대상은 주관적으로 파악되고, 기하학적 형태에 의거하여 정리· 추상되어 긴밀히 구성되었다. 고갱, 고흐나 입체파 외에 20세기 회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작품에 〈아비뇽의 처녀들〉 〈생트빅투아르산〉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등이 있다.
[23] Gogh, Vincent Willem van 1853~90 : 네덜란드의 화가. 1880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밀레와 코로의 영향을 받았으나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 폴 고갱 등과 교유하고, 조르주 쇠라 등 인상파 화가들을 접하면서 화법에 변화를 보이다가 후기인상파라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었다. 강렬한 주관에 입각한 거친 필치의 표현주의적 화풍으로 태양과 해바라기를 즐겨 그렸으며, 야수파에 강력한 영향을 미쳐 20세기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때 고갱과 같이 생활하였으나 사이가 나빠져 헤어진 후 정신병이 발작하였고, 끝내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작품에 〈감자를 먹는 사람〉 〈해바라기〉 〈자화상〉 등이 있다.
[24] Gauguin, Eugene Henri Paul 1848~1903 :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35세 때 주식거래상을 그만두고 회화에 전념하였다. 처음에 피사로에게 사사하고 인상파에 접근하였으나 브르타뉴와 마르티니크섬을 왕복하는 동안에 종합주의에 매료되어 화려하고 장식적인 상징주의 회화에 도달하였다. 그 뒤 고흐와 공동생활을 한 아를, 10년 남짓 체재한 타히티섬에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는데, 마르키즈 제도의 도미니크섬에서 불우함과 고독 속에 죽었다. 작품 〈황색의 그리스도〉 〈타히티의 여인들〉 등이 있고 1891년 최초의 타히티 기행문 《노아 노아》가 있다.
[25] H.H.Arnason, ‘A History of Modern Art’, Thames and Hudson, 1988, London, pp.37~63 참조
[26] Ibid., pp.37~63과 김현화의 ‘현대미술의 골고다의 초대’, 숙명여자대학교 출판국, 2004,서울 p.p.53~81 참조
[27] B.러셀, ‘서양의 지혜’, 이명숙,곽강제 역, 서광사, 1991, 서울, p.378
[28] 강영계, ‘니체와 정신분석학’, 서광사, 2003, 서울, pp.17~18
[29] Ibid., p.18
[30]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린비, 2004, pp.214~228 참조
[31] 강영계, ‘니체와 정신분석학’, 서광사, 2003, 서울, p.202
[32] Ibid., p.202
[33] Ibid., p.202
[34] Ibid., p.176
[35] Ibid., p.150
[36] Ibid., pp., 202~203
[37] Ibid., pp., 213
[38] Ibid., pp., 225
[39] Ibid., pp., 226
[40] Ibid., pp., 228~229 참조
[41] Ibid., p.229 참조
[42] Ibid., pp.246~247
[43] Ibid., pp. 203
[44] 여기서 보편적이라 한 것은 결국 프로이드의 사상도 근대철학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45]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린비, 2004, pp.201~213 참조
[46] 강영계, ‘니체와 정신분석학’, 서광사, 2003, 서울, p.230
[47] Ibid, pp.199~260
[48] Ibid.
[49] 自動記述法 automatism :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창조적 힘을 예술로 표현하기 위하여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시민들이 사용한 기법. 어떠한 기존의 개념이나 이성 등에 얽매이지 않은 무의식 속에서 행하여지는 창조작용으로서, S. 프로이트의 이론과 결부되어 중요시되었다. 시인 A. 브르통은 1924년의 초현실주의 선언에서‘무의식 속에서 창조된 시나 회화야말로 미학적· 도덕적인 일체의 선입관을 벗어난 진정한 사고가 전개된다’는 것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이미 H. 아르프 등 다다이즘 작가들도 시도하고 있었는데, 초현실주의에서는 M. 에른스트, A. 마송, J. 미로 등이 콜라주· 데칼코마니라는 독특한 수법을 사용하여 이 이론을 예증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의 액션페인팅도 이 이론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졌다.
[50] Dali, Salvador 1904~89스페인의 화가. 초현실파의 대표적 화가로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과격한 성품 때문에 1926년 퇴학당했다. 비합리의 영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이중상(二重像)의 수법을 사용하여 꿈이나 환각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형이상 회화파나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으로 환상적인 작품을 확립하였다. 〈기억의 집념〉 〈불붙은 기린〉 〈레다 아도미카〉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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