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신학이야기

[독서]진화와 연속창조_이언 바버의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요약]

James Chae 2012. 1. 21. 12:10

*이언 바버,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이철우 역, 김영사, 2003, 서울,  p.p 181~203 [요약]




진화와 연속창조

-대화와 통합이론-


채창완

 

[들어가는 말]

기독교가 진화론을 멀리하거나 독립된 이론으로써 전혀 상관 없는 것으로 취급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다. 실재로 다윈의 진화론이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주진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거쳐 성장해온 지구상의 생명체의 역사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진화론과 창조론이 갖고 있는 한계를 서로 인정하고 각각의 주장을 살핀다면 많은 부분 각각의 이론을 상호 보충할 여지는 늘 존재한다. 이 책에서 이언 바버는 양자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화이론과 통합이론에 공감하면서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주장은 과학신학 그리고 형이상학을 두루 섭렵하며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과학으론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영역에 신학이 조심스럽게 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진화와 창조에 대한 이언 바버의 글의 요약이다.

 

 

[대화이론]

진화이론이 기독교와 전적으로 상반되는가? 아니다. 진화이론 중 기독교(또는 신학)와 연계될 수 있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다음은 이 책에서 제시한 그러한 3가지 가능성에 대한 내용이다.

 

1. 복잡성과 자기조직화

진화가 진행되기 전 어떻게 생명에 필요한 복합 유기 분자들이 생겨날 수 있을까? 이는 진화론에서 답하기 어려운 생명시작에 대한 물음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복잡성과 자기조직화 이론에서 찾는다. 무생물 세계를 다루는 복잡성 이론에 의하면 그것들의 상위 수준의 질서는 자기 조직화 시스템을 통해 무생물계에서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물리적 또는 화학적 시스템이 불안정하고 평형 상태가 아닐 때, 새로운 수준의 집단 질서가 출현하여 안정된 상태를 이룬다는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역동적 시스템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그런 시스템에서는 새로운 법칙들이 새로운 형태의 복잡성을 띠는 구조들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했다. 그는 분자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자기 조직화 및 자기 유지 시스템의 형성이 생명 출현의 첫 단계라고 주장한다. 즉 분자들의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있게 하는 그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스튜어트 카우프먼(Stuart Kauffman) 또한 질서와 혼돈 사이의 경계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언 바버의 표현대로 무질서는 흔히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있게 만드는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해 과학은 종교와의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2. 정보의 개념

정보란 알파벳 문자, 음성, 2진수, DNA 염기들, 조합 가능한 요소들로 구성된 한 시스템의 가능한 여러 가지 결과들 또는 상태들 가운데 하나인 정연한 양식이다. 이 정보에 의해 전달된 메시지는 한층 포괄적인 전후 관계에 따른 해석에 의존한다. 이 메시지는 원래 정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론에서 언급된 마이클 베의 주장에 반대)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DNA유전자는 과거로부터 전달된 정보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체 생태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안정성을 확보한다. 유전자는 환경의 영향 속에서 오랫동안 진화해 왔기 때문에 이는 역사적으로 획득된 정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보에 의해 생명체(또는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들과 본능적인 행동 양식을 갖고 나름대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 가는 것이다. 고등 영장류인 인간은 이러한 유전자의 정보 개념보다 더욱 복잡하고 발달된 정보 전달 체계를 갖고 있다. 이를 문화 또는 인간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정보는 유전자를 통해서 전달되기도 하고 이러한 문화를 통해서 전달되기도 한다.

 

3. 여러 수준의 위계 질서 (하향식 인과관계)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시스템과 여러 개의 내부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다수준 위계 질서를 보인다. 어떤 단위체가 같은 수준 또는 상하위 수준에 있는 다른 단위체들과 상호 작용을 할지라도, 특정 수준은 비교적 통합되고 안정되며 자기 규제적인 단위체를 인지한다. 그러한 수준들의 위계 질서는 구조적으로 확인되는데 쿼크, 핵자, 원자, 분자, 거대분자, 세포 내 소기관, 세포, 기관, 생물체 그리고 생태계의 위계 구조가 그것이다

 

이러한 생물계의 각 수준들간에 상호 작용이 있는 것 같이 인간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의 탐구의 한 원리로 특정한 수준 및 그 수준과 인접 수준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각 수준들 간의 환원은 1)방법론적 환원, 2)인식론적 환원, 3) 존재론적 환원이 있다. 1)은 상위 수준에서의 관계들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하위 수준들을 연구하는 것이고, 2)는 각 이론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특정분석 수준에서의 법칙과 이론은 하위 수준의 법칙과 이론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3)은 실재하는 종류와 현상 세계에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종류에 대한 주장이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하향식 인과관계에 대한 이론을 확대하여 하느님은 하위 수준에서의 사건을 설명하는 법칙들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상위 수준에서의 하향식 인과관계의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현상 세계의 모든 사건에 하느님이 궁극적인 경계 조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통합이론]

통합이론의 주제는 세 가지 논의, 곧 하느님의 설계에 대한 진화론적 논증(자연신학), 하느님에 대한 진화론적 모델(자연의 신학), 과정철학에서 진화론적 사고의 활용을 들 수 있다.

 

1. 진화적 설계(자연신학)

담쟁이덩굴처럼 진화가 뻗어 나가기도 하고 퇴화되기도 하면서 여러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이 보이나 전체적인 일정한 경향을 보여 준다. 진화의 과정에서 생명체는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며 처리하면서 꾸준히 증대되어 왔다. 인간이 아메바나 벌레보다 발달한 존재인 것은 결코 우연의 소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진화적 설계에 따라 생명체가 진화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언바버는 진화는 우연과 법칙의 미묘한 상호 작용임을 주장하며 이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다. 우연은 설계의 정반대이며 진화는 하느님의 설계에 대한 또 다른 이해, 곧 세부적인 계획은 없으나 일반적인 방향을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결국 진화함에 따라 질서와 정보가 증가하지만 최종 상태를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르톨로뮤 역시 진화에서의 다양성은 유연성과 적응력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연과 법칙은 자연에 모순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상보적인 모습인 것이다.

 

2. 하나님과 연속 창조 (자연의 신학)

자연의 신학은 종교적 경험과 역사적인 신앙 공동체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자연에 대한 종교적, 신앙적 개념과 관점이 달라지면 이에 따르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다. 자연을 하나의 역동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며 진화적인 과정으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 수 있다. 아서 피코크는 진화를 하나님의 즉흥 연주로 표현했다. 여기서 우연과 법칙이 필요하며 하나님은 이러한 즉흥 연주를 통해 끊임없이 창조에 임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창조하고 계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하위 수준에서 생물학적 법칙들을 무시하지 않으시는 하향식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이 이언 바버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이 연속 창조의 자연의 신학에 동의한다.

 

3. 과정철학

실재를 개별화된 물질의 영속적인 조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일련의 순간적인 사건들과 상호 침투하는 장, 과정으로 이해한 화이트 헤드는 양자물리학의 영향을 받았다. 과정 사고는 결정론을 배격하고 대안적인 잠재적 가능성들을 허용하며, 사건들 사이의 법칙적인 관계는 물론 우연까지 수용한다는 점에서 양자물리학적 관점과 닮았다. 모든 사건은 안과 밖의 두 모습을 지니며 물리적 구조의 진화뿐만 아니라 내면성의 진화 역시 중요한 것이다. 분자 하나도 전체 속에서 고려된다. 생명체들은 단순히 유전자와 환경의 힘에 의한 수동적 산물이 아니며 진화 역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 환경에 대한 생명체의 자발적 선택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정사상에서의 하느님은 질서의 원천이자 새로움의 원천이시다. 그리고 이 하느님은 모든 사건의 내면에 존재하지만 결코 그 결과를 배타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이언 바버는 이런 하느님을 강압의 하느님이 아닌 설득의 하느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오는 말]

자연의 신학과정철학에 비중을 둔 이언 바버의 주장에 나도 공감한다. 현재에도 하느님의 창조가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고 있고 또 그 모든 진화의 사건의 내면에 절대 질서로써 하느님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이해한 이언 바버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화와 통합의 노력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

나는 이제 기독교가 진화론을 포함한 현대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가 둥글다고 외친 갈릴레오의 외침이 하나님의 창조의 진리에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이는 현재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이성과 신앙이 분리되고 결국 과학과 신학이 각각 다른 길을 걸어온 것 같이 앞으로도 계속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둘의 온전한 동반자 관계는 신학이 현대과학을 수용할 수 있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 진화론을 성서적인 창조론에 위배된다고 외치기 보다 이미 밝혀진 진화론적 사실에 근거하여 성서에 대한 올바른 재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를 정죄한 중세 교회의 실수를 오늘의 기독교가 반복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