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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부활의 신비_황학만

James Chae 2011. 9. 2. 10:12

 


‘ 만남-부활의 신비’ _황학만

 

채 창 완

 

십자가 사건 이후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 같이 그 ‘만남’에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성서는 말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요 20:11~18),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제자들은 ‘나그네’의 모습으로(눅 24:13~35)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부의 생업을 다시 시작한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바닷가에 서있는 ‘낯선 사람’으로 각각 나타나셨다(요 21:1~14). 참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동행했던 자들이 아닌가? 여기서 한가지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그들 모두가 주님께서 ‘알게 하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새벽


도로테 죌레는 부활을 ‘신앙의 신비’라고 말했다. ‘신비’라는 것은 항상 ‘신비’로 남아있을 때 의미가 있다. ‘신비’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것에 ‘신비’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부활은 예수와 인간이 ‘만나는 신비로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다양한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 때로는 ‘동산지기’의 모습으로 때로는 ‘나그네’로 때로는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부활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만남’의 가능성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없다면 그를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한계 또한 동시에 가진다. 이것이 ‘부활의 만남’이 가지는 ‘신비’이다.

 

 

부활의 아침

 


황학만 작가는 그의 작품에서 이러한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 ‘신비’는 ‘만남'을 늘 전제한다. 이 ‘만남’은 제자들의 ‘만남의 경험’에 상응하는 ‘작품을 통한 만남’이다. 그의 작품은 이 만남에서 매개체 역할을 한다. 동방정교회의 성화상이 작품의 원형과 감상자 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이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신 분은 필자가 이전에 쓴 성화상에 대한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작품 감상자와 작가 작품의 이면의 세계와의 만남이다. 물론 작가와 감상자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작가는 우리의 눈을 자신의 작품 이면으로 이끌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그 만남에서 겸손하게 숨겨진다. 작가 자신의 신앙 고백적 의도 또한 약화된다. 이로써 작가가 얻고자 하는 의도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부활의 새벽’으로 이끄는 것이다. 결국 작품을 통한 개인적인 ‘만남’이 여기서 중요해 진다.

 

 

예루살렘아!


이를 위해 작가가 작품에서 사용하는 기재가 바로 ‘창’이다. ‘창’은 건축물의 한 부분으로 건물 안과 밖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작가가 사용한 ‘창’도 이러한 건축물적인 ‘창’의 기능과 비슷하다. 이를 통해 그의 그림에는 두 가지 시선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감상자가 바라보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림 속 창 이면의 세계에서부터 오는 시선이다. 그의 ‘창’ 너머의 세계는 시간적으로도 장소적으로도 현재와 완전히 다른 작가가 설정한 다른 세계이다. 작가는 창 너머의 세계가 2천년 전 부활의 사건이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풍경이 실재와 전혀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시간적으로 우리는 그 때를 단지 상상할 뿐이다. 작가는 실재의 중동지역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풍경의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사용하여 풍경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일상적 풍경이 의미 있는 풍경으로 작가의 마법에 의해 새로 태어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를 ‘초월적 세계’라고 부르고 싶다. 그 세계는 작가의 신앙과 상상 속에 그리고 그림의 이면에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림 앞에서 그림 속 창을 통해서만 이러한 세계를 본다. 반대로 그 무엇의 시선이 그 ‘창’ 이면의 세계로부터 우리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또한 받는다. 바로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자연스럽게 ‘명상’에 잠길 수 있게 된다. ‘만남’은 이러한 관계의 긴장감 속에서 나타난다. (사진으로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상이 힘들 것이다. 그 만큼 그의 그림은 세밀하고 디테일들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법적인 부분까지 사진의 한계 때문에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래서 이러한 설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되지만 그래도 보지 못하신 분들에게 최소한의 설명은 필요함으로 어쩔 수 없다. 만약 독자가 작가의 작품을 어디서 볼 기회가 생긴다면 이 글 쓴 자의 설명을 상기해도 되고 잊어버리고 새롭게 감상해도 된다. 현대 미술에서 작품을 해석할 권리는 감상자에게도 주어져 있으니까.)

 

 

제6시

 


이렇게 설명하고 나니 작가의 작품 세계가 무척 ‘신플라톤적’인 것 같다. 이데아의 세계가 그의 ‘창’을 매개로 현재와 소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만남’이 ‘일자(一者;to hen)’와의 합일과 유사한 것 같다. 물론 이런 식으로 작가는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이 분명 ‘창’ 이면의 세계와 현재 세계의 ‘만남’을 작품 속에 설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울러 ‘창틀’에 놓여있는 정물의 소품들은 현재의 세계에서 ‘창’ 이면의 세계를 추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촛불’은 부활의 새벽을, ‘석류’의 붉은 색은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의 심정을 상징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재미있는 상징이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창틀’ 위의 소품들 또한 작가의 삶과 작업실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의 작품의 ‘풍경’이 그러하듯 이 소품들 또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의 개념에서 사용한 것들이다. 작가가 소품의 재해석을 시도한 것 같이 감상자도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작품 뿐 만 아니라 현대미술이 우리에게 가져 다 준 ‘자유’이기 때문이다.

 

 

좁은 문

 


이와 같이 ‘만남’-‘부활’-‘일치’가 그의 작품 속에서 어우러지며 우리로 하여금 ‘숭고’의 영역에로 나아가게 한다. 이는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경험이다. 부활의 새벽의 ‘만남’이 그랬던 만큼 이러한 ‘체험’은 늘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깨어있는 자’, ‘들을 귀 있는 자’ 만 이러한 ‘만남’을 체험하게 되는 것일까? 영성 있는 작품을 통해 그 ‘만남’이 가능하지 않을까?  갑자기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이 생각 난다. “시인, 화가, 음악가, 건축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 너무 극단적인가? 그러나 작업을 하는 작가는 늘 ‘초월’,’숭고’의 영역을 배회하게 된다. 어디 창작을 하는 작가 뿐이겠는가?  블레이크의 말은 작가에게 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창조력’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하는 자’는 분명 이러한 ‘만남’ 또는 ‘일치’의 체험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번 해 보시길…

 

 

혼인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