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10. 연중23주_추석별세기념성찬례
요엘 2:21-24, 26 / 시편 104:13-15 / 1요한 3:17-18 / 마태 25:34-40
“기억의 예배: 작별하지 않는 기억”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6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소설을 읽으신 분이 계실 겁니다. 저는 그 소설을 읽는 내내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서 책을 쉽게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뜻은 “작별인사만 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작별을 하지 않는 걸까?” “작별을 미루는 걸까? 아니면 작별이 현재 진행 중일까?” “작별은 했는데 아직 마음에 떠나보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작별을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일까?”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 이승과 저승, 현실과 환상을 제주도라는 특정 장소와 시간 속에 겹쳐 놓아 환상과 사실의 경계를 오가는 형식을 보여준 소설입니다. 4.3 사건, 보도연맹 사건, 동족상잔의 6.25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한 여인을 통해 현재와 조우합니다. 잔다르크와 유관순처럼, 링컨과 존 F. 케네디처럼 서로 겹쳐지는 공통점 때문에 연관성을 찾는 ‘평행이론’처럼, 이 소설을 4.3 사건을 경험한 어머니와 그녀의 딸 ‘인선’의 삶이 중첩되는 이야기입니다. 저주와도 같은 4.3의 아픔과 결코 이별할 수 없는 인선의 삶은 또한 그녀의 어머니의 삶과도 겹쳐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유전자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감정적 느낌조차도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육신은 소멸돼도 기억은 사람을 통해 영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에 이렇게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감사성찬례를 드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전수된 기억을 통해 현재에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의 예배가 무의미합니다. 주님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식사를 새로운 기억의 식탁으로 제자들에게 전수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대교 명절의 평범한 식사의 재료를 통해 영원히 잊지 않을 ‘기억’을 우리에게 심어주신 것입니다. 유월절 식탁의 포도주는 주님의 피가 되고, 무교병은 주님의 살이 된 것입니다. 음식이 우리의 위를 통해 소화되어 우리 몸과 하나가 되듯이 주님의 피와 살은 우리 몸 안에 흡수되어 기억으로 우리와 하나가 됩니다. 기억은 이렇게 어떤 것의 원래적 의미조차 변화시키며, 육신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별세성찬례 때마다 늘 강조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별세성찬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우리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그 기억들의 의미가 현재에 어떻게 각색되고 또 적용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조상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우리와 하느님 간에 쌓았던 많은 기억의 결들도 돌아봐야 합니다. 명절은 일가친척들을 만나 서로 사귐의 시간을 가지며 서로가 기억하는 조상에 대한 기억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 없는 이야기들과 먹고 마시는 것들로 너무 쉽게 식상해질 수 있습니다. 함께 나누는 기억의 내용이 무엇이든 특정한 때에 특정한 기억들을 함께 공유하는 것은 가족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에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별세성찬례에서 먼저 가신 분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그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유월절 식탁을 통해 오래전 그들의 조상들이 느꼈을 해방의 기쁨과 의미를 자신들의 시간에 재해석하며 그 기억들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매 주일 감사성찬례를 통해 주님의 유월절 식탁을 끊임없이 되새김합니다. 우리의 추석은 우리의 삶과 먼저 가신 분들의 삶이 중첩되는 시간으로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 해의 추수에 대한 감사를 넘어서는 ‘기억의 축복’입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결국 우리 안에 깊게 수놓아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을 뜻함을 깨닫습니다. 몸은 시간 속에서 사라져도 기억은 영혼에 각인되게 마련입니다. 슬픔이든 아픔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듣고 보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들은 기억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치매’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기억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억의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사랑하는 먼저 가신 가족들 뿐만 아니라, 이 제주 섬에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많은 억울한 영혼들 또한 함께 기억하길 바랍니다. 이 아름다운 바다와 푸른 숲의 이면에 깊이 서려있는 아픔과 고통, 그리고 한. 우리가 만일 그것을 잊는다 해도 이 땅의 바람과 물결, 수풀들은 4.3의 아픔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우리 교회가 ‘제령 교회’, ‘모든 별세자들을 위한 교회’로 봉헌된 이유도 이러한 기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별세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 이것이 우리 교회의 시작이었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누군가는 한국현대사에 서려 있는 이유 없는 죽음, 억울한 죽음에 대해 기억하고 기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상처와 화해하는 길이고, 아픔이 치료되는 과정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기억과 기도 가운데 항상 풍성하게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 추석 명절
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계절을 따라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시니 감사하나이다. 구하오니, 기쁜 명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조상들의 영혼에 안식을 주시고, 때에 따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언제나 그 은혜를 찬양하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요엘 2:21-24, 26
21 흙아, 두려워 마라.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야훼께서 큰일을 이루셨다.
22 짐승들아, 두려워 마라.
⋅ 들판의 목장은 푸르렀고
⋅ 나무들엔 열매가 열렸다.
⋅ 무화과나무와 포도덩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23 시온의 자녀들아,
⋅ 야훼 너희 하느님께 감사하여
⋅ 기뻐 뛰어라.
⋅ 너희 하느님께서 가을비를 흠뻑 주시고
⋅ 겨울비도 내려주시고
⋅ 봄비도 전처럼 내려주시리니,
24 타작 마당에는 곡식이 그득그득 쌓이고
⋅ 독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
26 이제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으며
⋅ 너희 하느님 야훼를 찬양하리라.
⋅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어준
⋅ 이 하느님을 찬양하리라.
⋅ 내 백성은 언제까지나 당당하리라.
성시_ 시편 104:13-15
13 높은 궁궐에서 산 위에 물을 쏟으시니 ◯
⋅ 온 땅이 손수 내신 열매로 한껏 배부릅니다.
14 짐승들이 먹을 풀을 기르시고 ◯
⋅ 사람은 농사지어 땅에서 채소를 얻게 하시고
15 또한 곡식을 양식으로 주시며 ◯
⋅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도 주셨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1요한 3:17-18
17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18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복음서_ 마태 25:34-40
34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37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39 언제 주님께서 병 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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