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2. 가해_연중6주일
신명 30:15-20 / 시편 119:1-8 / 1고린 3:1-9 / 마태 5:21-37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율법과 복음”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모세가 하느님 계신 곳으로 올라갔다. 야훼께서 산에서 그를 부르셨다. ‘너는 야곱 일족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가르쳐주어라.’” 출애 19:3
“모세가 백성에게로 내려가 그 말씀을 전하였다. 이 모든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출애 19:25~20: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태 5:1-2
출애굽을 한 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던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느님의 계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를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등장한 한 청년 예수는 마치 모세처럼 산에 올라 제자들과 군중에게 새로운 계명을 선포했습니다. 마태오 복음을 기록한 기자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정확하게 모세가 연상되도록 편집을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가 모세와 같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신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모세는 율법을 선포했지만, 이제 예수는 율법의 완성 즉 복음을 선포합니다. 마태오는 전승자료를 ‘대당명제(대립명제)’로 편집하면서 이러한 극적인 대비를 통한 비교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 말씀은 산상설교에 나오는 6가지 ‘대당명제’ 중 4가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당명제는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형식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표현입니다. 먼저 명제를 제시하고 그다음에 앞에 제시된 명제를 뒤집는 반명제를 제시하는 수사법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과 일반 율법 규정 등을 명제로 먼저 말씀하시고, 이에 대한 반명제로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셨습니다. 이는 지난주에 읽은 마태오복음 5장 17절 말씀인 ‘율법의 완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에 해당됩니다. 오늘 대당명제 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살인 금지, 2) 간음 금지, 3) 이혼 금지, 4) 거짓 맹세 금지 등입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권위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문장에서 느껴집니다. 보통 율법 해석에는 권위 있는 랍비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여기에서 주님은 오직 자기의 권위에 의지하여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듣는 사람에 따라 매우 불쾌할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마태오복음서에 50회 이상 나옵니다. 새로운 율법의 해석자인 랍비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를 마태오 기자는 이런 방법으로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율법을 받은 모세의 권위를 연상시키며 예수를 구약 예언의 연장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17
‘율법의 완성’
교부들은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 가까이 있었던 것이고, 그 주변에는 많은 군중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새로운 계명은 듣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인仁, 즉 어짊’을 먼저 세우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의로움(義)’를 세워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수신(修身)’이 먼저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기독교의 정수를 이러한 ‘산상설교’에서 찾았습니다. 다른 종교인이 기독교를 바라본 관점이니 우리 기독교의 본질적 가르침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기독교 내부자로 우리의 본질을 잊고 살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의 오해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어짊’을 향상하는 일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의로움’을 세워가는 일에 너무 무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번영신학’의 영향으로 부와 명예가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잘못된 교리에도 빠졌었습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세상이 멸망당하지 않는 것은 아직까지 이 세상에는 복음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의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복음의 사람들에게, 또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교회에서 봉사하는 복음의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그러한 사람들의 헌신에 빚을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당명제로 제시된 오늘의 말씀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의 난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이 말하는 행위보다도 그 마음과 양심까지 꿰뚫는 복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은 인간의 행위에 집중하지만, 복음은 그 율법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인간의 마음에 집중합니다. 이를 통해 율법의 이면에 담긴 ‘율법의 정신’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율법은 하느님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즉 율법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선물입니다. 그 율법의 정신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하는 데에는 율법 조문보다는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지향점, 즉 그 정신이 핵심입니다. 그 정신은 바로 ‘사랑’입니다. 간음한 사람은 이미 그 마음으로 간음을 행한 것입니다. 살인하는 자는 이미 그 마음에 ‘미움’을 잉태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자기 자신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깨는 행위 이전에 이미 인간은 그 마음으로, 그 양심으로 하느님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행위는 그 결과물일 뿐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의 수를 헤아리시는 주님께서 인간의 양심을 꿰뚫어 보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평소 그것을 인지하며 지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악은 이미 우리 안에 감춰진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주님 앞에 변명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우리의 양심에 무슨 몰래카메라가 들어 있는 듯한 강박증을 느끼라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겁니다. 주님께서 성육신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주님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성육신의 은총으로 우리는 그분의 엄격함보다 그분의 자비에 기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아닌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인 것이지요. 성육신이 주는 은총과 위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생각, 또 그분이 나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골고다’를 오르셨다는 생각. 저는 이러한 묵상으로 저의 한계점에서 늘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주저앉기에는 그분의 은총이 너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내세운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하는 줄 아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존중합니다.” 로마 3:31
율법과 복음의 묘한 관계. 그리고 그 긴장감.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계명 안에 이미 율법이 담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신도 모르게 율법의 계명을 완성하는 자들입니다. 결국 복음에 담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율법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율법에 복음의 사랑이 더해질 때 율법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간음 하다 잡힌 여인은 복음으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서 우리는 남을 비난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복음에 따라서는 우리는 아무도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을 돌로 쳐라”(요한 8:7)라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단지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율법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으로 우리는 율법의 참소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러한 은총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그 복음의 은총에 따라 ‘너무 감사해서’ 복음을 몸으로 살아낸 사람이 됐습니다. 교부들이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복음을 온전히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에서 선포된 주님의 새로운 계명은 모든 율법과 그 정신을 포함한 복음의 본질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묻지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요한 8:10)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 네 아무도 없습니다.”(요한 8:11 a)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b) 이것이 율법과 그리스도의 계명의 확연한 차이점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은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도 바울로처럼 감사로 어짊과 의로움을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선한 본성을 극대화해서 ‘호연지기’를 기르시고, 곁에 계신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의를 이뤄가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계명으로 우리에게 율법의 정신을 일깨워주시고 복음의 은총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해갈 우리 자신들과 교회를 위해서도 함께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6주 (가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일찍이 계명을 주시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셨나이다. 구하오니,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신명 30:15-20
15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순종하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시는 복을 누릴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느님께 추방당하여 다른 신들 앞에 엎드려 그것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18 오늘 나는 너희에게 일러둔다. 그리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너희가 이제 요르단 강을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20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잡고 오래 잘사는 길이다.”
성시_시편 119:1-8
1 복되어라, 그 행실 깨끗하고 ◯
⋅ 주님의 법을 따라 사는 사람,
2 복되어라, 맺은 언약 지키고 ◯
⋅ 마음을 쏟아 주님을 찾는 사람,
3 나쁜 일 하지 아니하고 ◯
⋅ 그의 길만 따라 주님을 찾는 사람,
4 당신은 계명들을 내리시고 ◯
⋅ 온전히 그대로 살라 하셨으니
5 당신 뜻을 어기지 않고 ◯
⋅ 한결같이 살도록 도와주소서.
6 그 명령을 낱낱이 명심하면 ◯
⋅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이다.
7 당신의 바른 결정을 내가 배워서 ◯
⋅ 진심으로 감사하리이다.
8 당신 뜻대로 힘써 살려 하오니 ◯
⋅ 이 몸을 아주 버리지 마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3:1-9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말할 수가 없어서 육적인 사람, 곧 교인으로서는 어린 아이를 대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고 젖을 먹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때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아직도 그것을 소화할 힘이 없습니다. 3 여러분은 지금도 육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으니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들이고 세속적인 인간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4 여러분이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는 바울로파다.” 하거나 “나는 아폴로파다.” 하거나 할 수 있겠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6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중요할 것이 없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하십니다. 8 심는 사람과 물주는 사람은 동등한 사람이고 각기 수고한 만큼 삯을 받을 따름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복음서_마태 5:21-37
21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출애 20:13, 신명 5:17’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24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25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26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
27 “‘간음하지 마라. 출애 20:14(신명 5:18)’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29 오른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30 또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31 “또한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면 그에게 이혼장을 써주어라. 신명 24:1’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면, 이것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또 그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면 그것도 간음하는 것이다.”
33 “또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그리고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 레위 19:12’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다. 이사 66:1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예루살렘은 그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나 검게 할 수 없다. 37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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