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James Chae 2023. 2. 19. 08:02

2023. 2. 19. 가해_연중7주일

레위 19:1-2, 9-18 / 시편 119:33-40 / 1고린 3:10-11, 16-23 / 마태 5:38-48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채창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현대인의 공포는 핵위험도, 환경 재앙도, 첨단 과학도 한몫을 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고, 서로 혐오하는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이 문명을 만들면서 관계성의 인간이 되었지만, 이제 문명 속에서 다시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사람으로 돌아가는 같습니다. 20세기 냉전시대를 거쳐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인류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목격했지만, 자본주의의 승리 속에서 우리가 성취한 것은자본 자유이지 인간의 자유는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자본은 국경과 이념을 넘어 세계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만, 자본에 종속된 인간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난민처럼 갈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난민으로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나, 헤로데 왕의 핍박을 피해 이집트에서 난민 생활을 했던 예수의 가족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 난민들에 대해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더욱 냉혹한 것은 이유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시작이 난민적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40년의 광야 난민 생활과 예수의 40 광야 시험을 본받아 년에 40일을 사순절로 지키며난민 체험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향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여전히 관대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앞장서서 그들에 대해 우호적인 목소리를 내야 처지에 있는 기독교인이 그들에 대해 오히려 반대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의 내면에는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한 깊은반감혐오 뿌리 깊게 드리워져 있음을 있습니다.

 

혐오(嫌惡, disgust)’. 

이것은사람인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사람은 사람과 사람 간에 관계성이 맺어질 비로소인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호관계성이 깨지면 인간은 이상 인간이 아니라동물 같이 육신의사람일뿐입니다. 사람이 인간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갈 사람은 동물과 전혀 구별되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본능과 육욕에 철저히 지배되고 결국 생존을 위한 투쟁만 남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타자와함께라는 말은 너무 낯섭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전략이정의 자리매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 남과 함께하기보다 남을 배제시키고 혐오함으로써, 나아가 상대방을 굴복시킴으로써 살아남으려 합니다. 아니 요즘은 생존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이용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남보다 우월함을 느끼고 싶은 같습니다.

 

앙갚음하지 마”.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처럼 우리 인간의 양심을 괴롭히는 말씀을 저는 성서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이유 없이 비난을 당하고,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 속에서 괴로워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주변에는 나를 위하는 사람보다 나의 단점을 찾아 험담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같습니다. 그러할 당하는 입장에서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타란티노 감독이나박찬욱 감독 영화에 열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리만족? 자신의 억울함을 영상으로나마 풀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복수 하지 말고, 대신원수조차도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복수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차마 포기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명령은 부담됩니다. 어떤 분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은사로 그렇게 있다고 말하시지만, 그것은 억울함을 당해본 사람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는 말씀입니다. 

 

밀양이란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 데도 가해자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기뻐하는 모습에 죽은 아이의 엄마인 이신애(전도연 ) 교회당에서 가슴을 치며 하느님께 절규합니다. 저는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아니 최근에 있었던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가족의 절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 국민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안겼던세월호 침몰 사건 희생자 가족들의 아픔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피해자들이 넘쳐나고 가해자들의 웃음 또한 가득한데 어떻게 우리는 가해자들을 사랑할 있을까요? 그게 정말 가능합니까? 오늘 산상설교의대당명제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난제로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삶을 사셨으니 우리도 성령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밀양 영화에서 교회신자들이 주인공이신애에게 가했던 위로와 전혀 다르지 않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정말 하느님의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할 있습니까? 나를 아프게 만든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용서가 되던가요? 

 

성서에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제 꾀에 빠지게 하신다. 욥기 5:13”고 기록되어 있고 또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이 헛되다는 것을 아신다. 시편 94:11”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1 고린 3:20-21

 

사도 바울로는 이점을 정확하게 간파한 사람입니다. 사랑도, 미움도, 자비와 용서도, 믿음과 지혜도 모두 우리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인간 사람 사람 안에 있는 어두움과 밝음을 모두 사람입니다. 누구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도 사람이고, 누구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도 바로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양가성의 마음이 존재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지향성을 말씀하시지만, 우리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모든 결정은 우리 개인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를 사랑할 없고, 용서할 없다고 하여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사랑한다 하여 결코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인간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던, 선택에 따른 결과는 오롯이 개인의 책임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앞에개인으로, 단독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외롭지만 하느님만으로 충만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에도 가능하고, 장차 다가올 최후의 심판 때도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산상설교의 가지 대당명제는 명제와 반명제로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선택은 오롯이 우리 자신의 몫으로 남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우리는 아무에게도 비난이나 칭찬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어떤 선택을 했던 함부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것은 오직 사람의 몫입니다. 가식인지 아닌지는 오직 당사자만이 아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은 함부로 판단할 없습니다. 앙갚음을 결정했다고 해서 함부로 사람이 사랑이 없네 하면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결정에 조금도 위로를 없습니다. 아픔은 오롯이 아픔을 당하는 자만의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아무도 욥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욥도 종국에는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최종 판결에 순종한 것뿐이지요. 자식 일곱을 잃은 아버지가 나중에 다른 자식들을 새로 얻었다고 해서 이미 잃은 자식 일곱을 쉽게 잊을 있겠습니까? 자식 잃은 아픔을 쉽게 잊을 있겠습니까? 아픔은 오직 아픔으로 남고, 상처는 오직 흉터로 남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이뤄지게 마련입니다. 때론 하느님의 뜻이 인간을 버린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태풍 속에 넘어진 나무는 절대로 태풍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서히 말라죽어갈 뿐입니다. 오직 인간 만이 불가항력적인 일에 대해 불의하다고 외치며 하느님께 대듭니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동안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나요?라는 질문을 당시 댓글에서 많이 봤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이로 인해 믿음에 회의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비난할 없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보인 예수님의 태도는 일관되게 그녀의 처지에 공감 하셨을 뿐입니다. 공감. 타자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 그것이 주님께서 그녀에게 보인 전부였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께서도 그녀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녀가 죄가 없어서 일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분명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녀를 기소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소 율법을 세운 모세의 몫이고, 판결은 오직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몫은 순간 아픈 사람에게공감하는측은지심惻隱之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없지만, 최소한공감 있습니다. 그래야 극악 무도한 죄인이라도 일말의 이해의 가능성을 우리 안에 열어놓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공감할 없다면, 우리 자신도 어느 순간 가해자와 똑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고, 자비는 주님의 몫이며, 공감은 우리의 몫입니다. 공감은 우리가사람 아니라인간으로 살게 만듭니다. 이해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순간 인간은 가해자의 위치로 언제든지 떨어질 있습니다. 범죄 프로파일러들의 말은 이러한 것을 확증합니다. 흉악범들은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성선설 말한 맹자는 인간은 누구나 어린아이가 우물가로 기어가면 아이가 빠질까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지만, 많은 흉악범들에게는 예외라고 합니다. “시어머니 욕하면서 닮는다 속담이 있듯이 우리 인간은 공감 없이 남을 비난하다 보면 자신도 어느새 비난의 대상을 닮아가게 마련입니다. 공감력이 떨어지는 순간 인간은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없습니다. 

 

안티스테나이 포네로 μὴ ἀντιστῆναι τῷ πονηρῷ·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공동번역 성서는 이를앙갚음하지 마라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의 뜻을 직역하면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대당명제로 풀어 설명하신 이유에 가까이 다가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악에 대항하다 우리도 악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수를 미워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원수와 똑같이 되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우리도 악인들처럼 공감을 못하게 되는 악인이 되는 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양심은하느님의 형상성육신의 은총 근거합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타자와 우리의 안에 있는 악에 의해 더럽혀질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을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형상 선한 양심은 우리를 악의 손에서 건지는 힘입니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에서 등장하는 백만장자 베스트셀러 작가할렌 간병인인마르타 그녀의 순수하고 선한 양심으로 언제나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순간 순수한 동기에서 내린 그녀의 솔직하고 순수한 결정은 복잡하게 얽힌 살인과 재산 분배 문제 속에서도 그녀를 지켜주는 강력한 방어막이었습니다. 물론 영화이기에 가능한 얘기이지만, 그래도 주님께서는 우리 현실의 속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라고 격려하십니다. 오늘 말씀의 방점은원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대당명제를 듣는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교부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가 원수를 미워한다면, 그대는 원수의 육신에 해를 입히는 것보다 그대 영에 더 큰 해를 입혔다.” (마태오복음 미완성 작품 중에서)

 

 

남을 미워하는 순간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도 미움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악에 물드는 순간 우리의 영은 순식간에 악에 지배되고 맙니다. 우리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가득하면 정말 속이 시원하시던가요? 나를 아프게 사람을 생각하며 미움을 키우면 정말 마음이 평안을 얻던가요? 우리의 귀한 양심과 우리의 시간을 나를 아프게 사람을 생각하며 낭비합니까? 우리 안에 존재하는 넓고 밝은 가능성들을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 채웁니까? 원수가 고통받고 망하는 꼴을 보면 정말 기분은 잠깐 통쾌하겠지만, 우리가 그렇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악에 대항하는 우리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악에 대항하는 너무 서툴러서 우리도 악인과 똑같은 사람이 것임을 아셨습니다. 주님께서도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실 악을 과소평가하지 않으시고 다른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물리치셨습니다. 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간단하지도 순진하지도 약하지도 않습니다. 악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로는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로마서 12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 12:19

 

아마도 사도 바울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산상설교말씀의 원자료를 읽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에 부연 설명을 덧붙입니다.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은 셈이 될 것입니다.” 로마 12:20

 

저는 산상설교의원수사랑말씀을 읽을 때마다 사도 바울로의 해석을 함께 생각합니다. 얼마나 통쾌한 해석입니까? 원수의 머리 위에 항상 보이지 않는숯불 타고 있는 상상하면 정말 통쾌한 생각이 듭니다. 숯불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기에 우리 자신도 보호해 주고, 우리의 마음 또한 위안이 됩니다. ‘숯불 물론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아닐지라도 분명 하느님께서는 숯불 기억하신 다는 것이 사도 바울로의 말입니다. 이것이 악에 대항할 악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한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로마 12:21) 해당하는 방법이지요. 이건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물론 특권은 기도를 통해 발현됩니다. 특권은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증한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자신을 악으로부터, 분한 감정으로부터 지키고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하느님의 핏값으로 새로운 삶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남을 미워함으로 함정에 빠지지 마시고, 함부로 분한 감정에 사로잡혀 여러분이 망가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선한 본성을 아끼고 사랑하고 키워가시기 바랍니다. 무릇 지킬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시길 기도합니다(잠언 4:23).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교부의 말을 끝으로 오늘 설교를 갈음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에는 해를 입은 이들에게는 더 큰 위로가, 그리고 해를 입힌 이들에게는 입힌 해를 되돌려 받는 것보다 더 무서운 벌이 있습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7 (가해)

 

 

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주님의 지혜는 참된 사랑을 일깨우시고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를 깨달아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레위 19:1-2, 9-18

1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백성 회중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
9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마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마라. 10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따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먹도록 남겨놓아라.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11
너희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마라. 동족끼리 속여 사기하지 마라. 12 너희는 남을 속일 생각으로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 그것은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야훼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 빼앗아 먹지 마라.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미루지 마라. 14 귀머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하여 그에게 악담하거나 소경이 보지 못한다고 하여 앞에 걸릴 것을 두지 마라. 하느님 두려운 알아라. 나는 야훼이다.
15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지 마라. 영세민이라고 하여 두둔하지 말고, 세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봐주지 마라. 이웃을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겨레 가운데서 잡을 소리를 퍼뜨리지 마라. 이웃을 죽을 죄인으로 고발하지 마라. 나는 야훼이다. 17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마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 그래야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 18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마라. 이웃을 몸처럼 아껴라. 나는 야훼이다. 19 너희는 내가 정해 주는 규정을 지켜야 한다. 가축 가운데서 종류가 다른 것끼리 교미시키지 마라. 밭에 다른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마라. 종류가 다른 실을 섞어 옷을 몸에 걸치지도 마라. …”

 

 

 

 

성시_시편 119:33-40

33  주여,
.    
당신의 뜻을 따라
.    
사는 길을 가르치소서.
.    
그대로 지켜 상급을 받으려 하옵니다.
34  
당신 법을 깨우쳐 주시고 따라 살게 하소서.
.    
마음을 쏟아 지키리이다.
35  
나의 기쁨은 당신의 계명에 있사오니
.    
길을 따라 곧장 살게 하소서.
36  
마음을 잇속에 기울이지 않고
.    
당신의 언약으로 기울게 하소서.
37  
헛된 것에서 나의 눈을 돌리시고
.    
당신의 길을 걸어 생명 얻게 하소서.
38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주신 약속을
.    
당신의 종에게 지켜주소서.
39  
당신의 결정은 은혜로우시니,
.    
몸서리치는 모욕에서 건져주소서.
40  
당신의 계명을 나는 갈망하였으니,
.    
정의를 세우시어 몸을 살려주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3:10-11, 16-23

10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능숙한 건축가가 되어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 16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17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18
어느 누구도 자기 기만에 빠져서는 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자기가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19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서에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꾀에 빠지게 하신다. 욥기 5:13 기록되어 있고 20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이 헛되다는 것을 아신다. 시편 94:11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자랑해서는 됩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울로도 아폴로도 베드로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복음서_마태 5:38-48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출애 21:24(레위 24:20; 신명 19:21)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40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1 누가 억지로 리를 가자고 하거든 리를 같이 가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라.”
43 “‘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레위 19:18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