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9. 가해_연중30주일
신명 34:1-12 / 시편 90:1-6, 13-17 / 1데살 2:1-8 / 마태 22:34-46
“우리는 이 가을에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요?”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의 집필을 의뢰받았을 때 처음에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고통에 대해 자신이 하는 말과 고통을 대하는 자신의 참된 모습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말과 실제 인격 사이에는 너무 큰 간극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저 또한 사실 설교를 할 때마다 매우 부담스러운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선포하는 케리그마와 실제 저의 인격의 괴리가 너무 커서 부끄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그럴 때마다 제 스스로를 자위하는 것은 비록 선포한 말씀대로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러한 방향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사랑에 대해 말할 때는 차마 제 입으로 말하기가 너무 쉽지 않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보다 더 제가 어떤 사람임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양가적인 마음에서 말과 실천 사이에서 죄책감에 갈등하는 존재, 이것이 사제의 실존임을 알기에 부끄럽지만, 오늘은 감히 사랑에 대해 몇 마디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사랑’이란 말을 듣습니다. 일상 속에서도 유행가에서부터 영화, 예술과 문학작품, 철학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사랑’에 대한 무수한 정보들을 접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을 설명하려 하면 머뭇거리게 됩니다. 물론 나름대로 사랑은 이런 것이야라고 자신의 경험과 깨달은 지식을 얘기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어떠한 설명도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주는 것은 없는 듯합니다. 사전은 사랑을 “다른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라 정의합니다. 성서에도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는 네 가지가 나옵니다. 육적인 사랑의 에로스(eros), 우정을 나타내는 필레오(phileo), 혈통적인 사랑을 표시하는 스톨게(stolge),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agape)등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사랑은 아가페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의 종류나 이론이 많아도 사랑은 결국 말이나, 이론으로 표현될 수 없는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실체(reality)는 바로 ‘행위’입니다. ‘사랑’은 오직 행위라는 실체를 통해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이 가능합니다. 행위가 없는 사랑은 결국 실체를 갖지 못한 허상일 뿐입니다. 사랑은 행위로 드러나고 만지고 볼 수 있고 감정으로도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감정과 이성 그리고 이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행위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것에는 열정이 있고, 지혜가 있으며, 감정적이며, 역동적이고, 만질 수도 있고, 또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움직임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느끼고, 이해하며, 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랑을 ‘보고’ 느낍니다.
이런 측면에서 율법은 보이지 않는 사랑에 대한 관념들을 행위를 통해 문자로 표현한 ‘성문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아폴론(Απόλλων)적인 것, 즉 형식적인 것이 더 강조된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사랑이 정형화되고 체계화되며 문자로 가시화됩니다. 사랑이 행위에서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율법은 그 사랑의 실천 항목들을 문자로 남겨 사람들에게 이를 치키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니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들이 성문화됩니다.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도 사랑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 것도 사랑입니다. 거짓말하지 않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의 조항들이 디오니소스(Dionȳsos)적인 열정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감동도 우리에게 줄 수 없고 율법 조항의 준수만 강요하게 됩니다. 자발적이지 않은 사랑의 행위를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인간 본연의 자유가 상실된 마음에 사랑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사랑을 행위로만 환원시키고 나니 율법이 그 사랑의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에서 출발한 율법이 그 출발점을 잃은 것입니다. 실천에 집중하다 보니 율법의 내용인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들만 강조하다 보니 결국 눈에 보이는 사랑의 형식주의만 남았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와 끊임없는 논쟁을 한 것은 그를 스승으로 인정해서 그에게 뭔가를 배우려고 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무장되어 그를 음해하려 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조항들을 몰라서 예수에게 율법의 가장 큰 조항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신명기 6장 5절 말씀인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사랑이 먼저라는 것과 그다음이 이웃 사랑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섞어 버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신명기와 레위기 말씀을 하나로 통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가는 계명이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 또한 이와 대등하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 둘을 하나로 결합하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율사 힐렐은 ‘황금률’을 강조했고, 율사 아키바도 ‘이웃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판명이 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1데살 2:8
오늘 읽은 2 독서는 사도 바울로가 마케도니아 속주에 있는 데살로니카 교인들에게 보낸 사랑의 고백문입니다. 바울로는 소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건너가 자색 포목상 ‘리디아’를 만나 필립비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갖은 박해를 받아 어쩔 수 없이 서남쪽으로 이동을 하여 데살로니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활동한 시기는 아마도 3개월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곳에서 교회를 다지는 작업을 충분하게 하지 못한 채 또 박해를 받아 추방되어 베뢰아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리스도의 중심 도시인 아테네로 내려갔습니다. 물론 아테네에서의 전도는 실패했지만, 그는 아카이아 속주에 있는 고린토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장막을 만드는 ‘브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를 만나 고린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고린토에서 1년 넘게 체류하며 쓴 편지가 바로 테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신약성서 중에 가장 먼저 써진 서신서입니다. 바울로는 충분한 시간이 없어서 복음과 신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던 데살로니카 교인들에 대한 염려가 매우 컸습니다. 그러다가 데살로니카 교인들의 믿음에 대한 좋은 소식을 고린토에서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자식을 두고 객지로 떠나와서 노심초사하던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걱정했던 데살로니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에 매우 고무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기쁨을 가득 담아 그들을 위로하길 원했습니다. 데살로니카서를 읽다 보면 이 편지를 받은 데살로니카 교인들이 느꼈을 사랑과 위로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되어 큰 감동을 느낍니다. 갖은 핍박 속에서도 어렵게 믿음의 싸움으로 고군분투하는 그들에게 사도 바울로의 사랑과 격려는 바로 하느님의 위로와 같았을 겁니다.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랑의 두 가지 실체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복음’과 ‘자신의 목숨’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곧 교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복음’은 추상성을 지니지만, ‘사람의 목숨’은 매우 분명한 실체를 가집니다. 목숨을 내놓는 헌신된 행위가 복음의 내용을 뒷받침함으로 복음의 진실성이 확고해집니다. 사랑의 내용과 형식이 여기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사도 바울로의 교회에 대한 사랑의 내용은 ‘복음’이었고, 그 형식은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놓는 ‘자기희생의 헌신’이었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카 교인들을 사랑하는 바울로의 사랑의 표징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사도 바울로는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이라 표현하여 모성애 같은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모든 은사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을 것이 사랑임을 강조한 사도 바울로다운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카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사목자와 교인들 간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성이 상상이 됩니다. 이런 사목자를 둔 교인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또 반대로 3개월 남짓한 신앙 훈련밖에 받지 않은 신생 교회가 그토록 짧은 기간 안에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속주에 소문이 날 정도로 믿음 안에서 굳세게 성장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신자들을 둔 사목자는 또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래서 데살로니카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로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인품을 알 수 있고, 초대교회에서 사제와 신자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어서 다른 서신서와 다르게 큰 감동을 느낍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듯이 사도 바울로와 데살로니카 교회는 서로 사랑의 관계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
윤동주의 ‘자화상’ 중에서_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저는 마음이 답답하거나, 저의 정신이 삭막하고 거칠어질 때는 시편을 읽거나 시집을 이것저것 뒤지며 읽습니다. 그럴 때마다 윤동주의 시집을 종종 읽는데, 특히 그의 착하고 아름다운 시를 읽으면 제 자신이 시인처럼 깨끗한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속세에 찌든 저도 그 시인의 자리에 서서 ‘선한 사람’이 잠시 되어봅니다. 방금 읽어드린 시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랑은 분명히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대해 늘 감정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 관계에서 늘 아쉬운 위치에 서게 마련입니다. 그런 것이 싫어서 돌아서오면 또 못내 아쉬워 다시 가서 보듬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마치 애증의 관계처럼 사랑이 상호 동등한 관계에서 지속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은 듯합니다. 시인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남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더 선행 조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사랑에서 출발하여 점차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하늘과 별과 바람도 사랑하는 관계에 까지 이를 수 있지 않을까요?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중에서
윤동주를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는 하늘의 별 하나하나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느낌을 새겨 넣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조차도 별처럼 아름다워져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소학교 때 친구들의 이름과 이웃 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등의 이름을 하나씩 별에다 붙여 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시인이 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고린토에서 데살로니카 교인들 하나하나를 자신의 마음에 새기며 그리움으로 편지를 쓰지 않았을 까요?
가을이 깊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윤동주가 바라봤던 하늘의 별들이 더욱 선명하게 반짝이는 밤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이 가을에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까? 별을 보고 설레는 시인이나, 두고 온 교인들이 눈에 밟혀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도 바울로나,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이나 모두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설렘과 그리움으로 헌신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러면 우리도 마음의 따뜻한 불을 밝혀 그 따뜻함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안에 사랑의 감정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충분히 애틋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먼저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도 바울로가 데살로니카 교인들을 사랑한 것처럼, 윤동주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를 쓸 수 있는 이 가을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소외되고 우리의 관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여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30주 (가해) 1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을 가르쳐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을 온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신명 34:1-12
1 모세가 모압 광야에서 예리고 맞은편에 있는 느보 산 비스가 봉우리에 오르자, 야훼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주셨다. 단에 이르는 길르앗 지방, 2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나쎄 지방, 서쪽 바다에 이르는 온 유다 지방, 3 네겝과 종려 도시 예리고 골짜기의 분지를 소알에 이르기까지 보이시며 4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한 땅이다. 이렇게 너의 눈으로 보게는 해준다마는, 너는 저리로 건너가지 못한다.” 5 야훼의 종 모세는 그 곳 모압 땅에서 야훼의 말씀대로 죽어 6 모압 땅에 있는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오늘까지 아무도 모른다. 7 모세는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직 정기를 잃지 않았고 그의 정력은 떨어지지 않았었다. 8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광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의 죽음을 슬퍼하며 곡했다. 이렇게 그들은 모세의 상을 입고 곡하는 기간을 채웠다.
9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 지혜가 넘쳤다. 모세가 그에게 손을 얹어주었던 것이다. 그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이미 모세에게 분부하신 일을 다 이루었다.
10 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11 모세가 야훼의 사명을 띠고 이집트 땅으로 가서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온 땅에 행한 것과 같은 온갖 기적과 표적을 행한 사람은 다시 없었다. 12 모세처럼 강한 손으로 그토록 크고 두려운 일을 온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서 이루어 보인 사람은 다시 없었다.
성시_시편 90:1-6, 13-17
1 주여, 당신은 대대손손 ◯
. 우리의 피난처가 되셨나이다.
2 산들이 생기기 전, 땅과 세상이 태어나기 전, ◯
. 한 옛날부터 영원히 당신은 하느님.
3 사람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
. “사람아, 돌아가라” 하시오니
4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
.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5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
.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입니다.
6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
.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입니다.
13 주여, 돌이키소서. 언제까지 노하시렵니까? ◯
. 당신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동틀녘에 당신의 사랑으로 한껏 배불러 ◯
. 평생토록 기뻐 뛰며 노래하게 하소서.
15 우리가 고생한 그 날수만큼, ◯
. 어려움을 당한 그 햇수만큼 즐거움을 누리게 하소서.
16 당신의 종들에게 당신께서 이루신 일들을, ◯
. 또 그 후손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17 주, 우리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어
. 우리 손이 하는 일 잘 되게 하소서. ◯
. 우리 손이 하는 일 잘 되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데살 2:1-8
1 교우 여러분, 아시다시피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2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전에 필립비에서 고생을 겪고 모욕을 당했으나 여러분에게 가서는 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3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동기나 속임수로 여러분을 격려하는 것은 아닙니다. 4 우리는 하느님께 인정을 받아 복음을 전할 사명을 띤 사람으로 말하는 것이며,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말하는 것입니다. 5 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까지 아첨하는 말을 쓴 적도 없고 속임수로써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6 우리는 여러분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사람에게서는 도무지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내세울 수도 있었으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8 이렇게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복음서_마태 22:34-46
34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35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36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신명 6:5’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39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레위 19:18’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40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41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42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43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
44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 시편 110:1
하고 다윗이 읊지 않았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46 그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날부터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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