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5. 가해_모든 성인의 날_연중31주일
묵시 7:9-17 / 시편 34:1-10, 22 / 1요한 3:1-3 / 마태 5:1-12
“우리의 상상력에 아로새겨진 신앙”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요즘 부동산 가치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과 관련된 모든 시설을 기피하는 경향이 큽니다. 장례식장, 화장터는 혐오시설로 취급됩니다. 죽음이 우리 삶의 일부분처럼 늘 우리 곁에 있는데도 이를 기피하는 이러한 현상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물론 부동산이란 자본주의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민족의 내면에는 유골에 대해 ‘부정하다’는 생각을 은연중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 민족은 샤머니즘과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의 영향으로 죽음에 대해 다른 민족보다 매우 복합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시신을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유대인들도 율법에서 시체를 만지거나 하면 부정하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정든 사람의 시신이 하루이틀 시간이 가면서 썩어가고, 냄새가 나는 현상 앞에 인간은 두려움과 안타까움이란 양가적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시신을 처리하는 장례 문화는 죽음에 대한 그 문화의 이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불교에서는 그 부정한 시신을 불로 태워버려 영혼이 다시 육신의 옷을 갈아입는 것을 예비하지만, 유교문화에서는 부모의 시신을 훼손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리학이 발달했던 조선시대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화장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지금 현대에서 화장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는 것은 종교적인 이유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장지의 부족과 경제적인 이유가 큰 원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의 화장 문화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나온 결론이 아니라 ‘시신의 효과적인 처리’에 더 치중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 죽음과 매우 밀접한 종교였습니다. 그 시작은 무덤에서 시작됐습니다.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가르는 시금석이 바로 예수의 사후에 발견된 “빈무덤”이었습니다. 성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빈무덤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빈무덤이 바로 부활 신앙의 시작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고대 지중해 사람들의 관점에서 죽은 사람은 지상의 쓰레기로 만들어진 육신을 이 땅에 남기고 영혼만은 천상 어딘가로 올라가 영혼의 원래 성품에 가장 적합한 자리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무수한 별들로 영혼이 돌아간다고 상상했지요. 그들에게 사후에 육신과 영혼의 결합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부활’을 통해 육과 영혼을 가르는 하늘의 장막이 깨질 수 있음을 자각했습니다. 물론 후기 유대교 또한 이러한 부활 개념을 함께 공유했지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에녹과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천상과 지상을 가르는 장벽이 깨졌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라는 사형수의 육신이 부활했다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와 유대교는 다른 죽음의 길을 각각 선택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부활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교리를 가진 종교입니다. 그래서 갖은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순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순교를 했던 사람들의 시신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은 하늘로 가고 육체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그 순교자들의 시신을 처리하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생긴 것입니다. 박해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신성한 사람들”, “고백자들”, “순교자들”의 유골과 무덤은 다른 일반 사람들의 시신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점차 일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과 고백자들의 무덤은 점차적으로 신성한 어떤 권위를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즉 천상에 계신 성인이 지상에 있는 그의 무덤에도 동시에 “현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 들여 모시고 매장함으로써 그곳은 이제 ‘거룩한 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신이나 유골을 묻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보니 순교자들의 무덤 주변에 하나둘씩 많은 무덤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 시작은 물론 박해하는 로마의 시선을 피해 로마 세계의 도시 바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공인이 되면서 이제 성인의 유골은 도시의 중심으로 이동을 했고, 그 위에 성당이나 공동묘지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성인 숭배는 자연스럽게 하느님과 인간을 중재하고 인간을 보호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로 성인 신앙이 발전하게 됩니다. 순교자들은 성인으로서 인간의 친구이자 보호자가 된 것이지요. 이러한 기능이 성인들에게 주어지자 성인 신앙은 일반인들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던 중세에 일반인들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믿음을 배양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겁니다. 글을 아는 사제 계급이나 상류층 말고는 신학과 교리에 접근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무척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그러니 이콘과 성인 신앙이 문자적 신학이나 교리로 채워지지 않는 서민들의 믿음의 빈 공간을 채워갔습니다. 처음에 종교적 지도자들은 이러한 성인 숭배를 미신처럼 치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민들의 전폭적인 민간 신앙에 뿌리를 둔 이러한 성인 숭배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돈독히 하는 방향으로 이러한 성인 신앙을 이용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중세에 수도원과 공동묘지는 주교의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였습니다.
그렇다고 성인 신앙을 단순히 미신이라 치부해 버리면 우리는 천년 이상 민간 신앙을 추동해 온 기독교의 중요한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말씀과 교리로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이콘의 이미지와 성인들의 무덤과 그들의 이야기는 상상력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공고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 기독교가 죽음과 매우 친숙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와 늘 함께 있음도 압니다. 죽음은 부활로 나아가는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죽음이 ‘죄의 권세’라고까지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절대시 하지도 않습니다. 최후에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의 권세’를 꺾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는 죽음을 단지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여깁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영생이 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은 다음 영원한 생명 또는 영원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앞서 간 성인들은 이러한 부활과 영생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거룩하고 헌신적인 죽음 또는 그들의 거룩한 생애를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신앙의 모범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 신앙이 가진 순기능입니다.
우리는 세례나 견진을 받을 때 자신의 주보성인의 이름을 신명으로 받습니다. 그것은 그 성인의 생애와 신앙을 모범 삼아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존을 잘 감당하라는 뜻일 겁니다. 자신의 주보성인을 묵상하며 그의 가르침을 본받아 실천하면서 신앙 안에서 자라 가는 데, 우리의 상상력은 믿음을 키우는 매우 큰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의 날’은 우리보다 앞서 간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 자신도 예수의 부활의 모습으로 성인들과 함께 그분을 만나게 될 희망을 고백하고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 요한 3:2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 즉 성인으로 그분 앞에 설 것을 요한 1서는 말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눈으로 그분을 보고 만지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을 성인처럼 순결하고 흠 없이 깨끗하게 관리를 합니다. 모든 성인은 그러므로 우리 각각의 상상력 속에 별처럼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인의 날은 우리의 신앙 속에 우리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핼러윈 데이’(Halloween Day)라 하여 각종 괴상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상상력을 사용하지만, 우리는 신앙의 상상력으로 우리가 성인과 함께할 미래의 시간을 오늘로 가져와 볼 수 있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성인의 무덤 곁에서 천상과 지상이 교류한다는 믿음의 상상력이 기독교의 역사의 저변을 든든히 지탱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희망이 상상력과 함께 더욱 공고해짐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참 복된 날입니다. 이 날에 부활과 재림의 기쁨을 우리가 미리 맛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쁨이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모든 성인의 날 (가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인들의 믿음과 헌신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앞서간 모든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아 주님의 진리를 이 세상에 증거하고, 마지막 날에 성인들과 더불어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묵시 7:9-17
9 그 뒤에 나는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옥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 양이십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11 그러자 천사들은 모두 옥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서 있다가 옥좌 앞에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아멘, 우리 하느님께서 영원 무궁토록 찬양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세력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하고 외쳤습니다.
13 그 때 그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 있으며
. 하느님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 그리고 옥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가려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 태양이나 어떤 뜨거운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요,
. 이사 49:10
17 옥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 시편 23:2
.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 이사 25:8
성시_시편 34:1-10, 22
1 나 어떤 일이 있어도
. 주님을 찬양하리라. ◯
.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
. 내 입에서 그칠 날이 없으리라.
2 나의 자랑, 주님께 있으니 ◯
. 비천한 이들아, 듣고 기뻐하여라.
3 나와 함께 “주, 높으시도다” 노래 부르자. ◯
. 모두 소리 맞춰 그 이름 기리자.
4 주님 찾아 호소할 때 들어 주시고 ◯
. 몸서리쳐지는 곤경에서 건져주셨다.
5 그를 쳐다보는 자, 그 얼굴 빛나고 ◯
.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아니하리라.
6 가엾은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
. 주께서 곤경에서 건져 주셨다.
7 주님의 천사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 둘레에 ◯
. 진을 치고 그들을 구해 주셨다.
8 너희는 주님의 어지심을 맛들이고 깨달아라. ◯
.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복되다.
9 주님의 거룩한 백성아,
. 두려운 마음으로 그를 섬겨라. ◯
. 두려운 마음으로 그를 섬기면
. 아쉬울 것 없으리라.
10 맹수들은 먹이 찾아 배고플지 모르나 ◯
. 주님을 찾는 사람은 온갖 복을 받아 부족함이 없으리라.
22 주께서 당신 종의 목숨을 구하시니 ◯
.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요한 3:1-3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
복음서_마태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2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 행복하다.
.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 행복하다.
.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 행복하다.
.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7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 행복하다.
.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 행복하다.
.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 행복하다.
.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0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 행복하다.
.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모든 성인의 날은 10월 30일과 11월 5일 사이에 오는 주일로 옮겨 지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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