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부조리

James Chae 2023. 11. 19. 06:20

2023. 11.19. 가해_추수감사주일_연중33주일
신명 8:1-10 / 시편 65 / 야고 1:17-18, 21-27 / 마태 6:25-33
 
 

부조리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 중에서

 
카프카는 그의 소설 [변신]에서 하루아침에 잠을 자고 일어난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됐다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 것과 같이 이유도 알 수 없는 불행이 한 사람에게 닥쳤다는 말로 [심판]이란 소설의 서두를 시작 합니다. 마치 모든 불행이 예고도 없이 인간에게 갑자기 닥치는 것을 암시하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측되고 대비 가능한 사건은 불행일 수 없습니다. 예측 불가능하고 갑작스럽게 닥친 부조리한 사건이 개인이나 국가에게 닥칠 때 우리는 불행이라 말합니다. 조리에 맞지 않는 것을 뜻하는 ‘부조리’라는 말은 철학에서는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합리주의적인 설명으로 답할 수 없는 인간사를 실존주의 철학에서 정의하는 말이 바로 ‘부조리’이기 때문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 의해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고 확신한 합리주의의 희망은 불가항력적인 제1차, 제2차 양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냉전의 대립으로 말미암는 대량학살을 목격했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통해 더 이상 현대는 ‘합리주의’에 대한 희망을 붙들 수가 없었습니다. 과학과 실험, 모험과 도전, 합리주의와 이성이 모든 것을, 모든 삼라만상의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기대했지만, 그건 단지 인간이 만든 망상에 가까운 신기루였음을 20세기를 통해 우리 인류는 경험했습니다. 
 
과학과 자본에 의한 물질적 풍요를 인류는 지금 누리고 있지만 그 풍요도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난과 고통을 짓밟고 누리는 풍요임을 우리는 애써 간과합니다. 여전히 아프리카나 제3 국의 나라들은 기아와 전쟁과 극심한 가난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공유하고 있는 인류에게 누군가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누군가는 반드시 가난해야만 성립가능한 풍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화려한 물질적 풍요와 소비로 온갖 자신의 치부를 가려왔습니다. 지구 자원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OECD국가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여전히 인류의 반 이상은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조리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누군가의 불행 위에 서야만 누군가는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 이것이 현대사회에 작동되는 부조리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풍요도 단지 부조리 위에 세워진 모래 위에 쌓은 성일 뿐입니다. 그것은 한순간에 몰락가능한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지구생명과 우리 인류는 원래 이 세상의 본질이 ‘부조리’라는 것을 애써 외면해 왔지만, 이제 전 인류는 다시 그러한 부조리 앞에 직면해야 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생태계의 위기, 자본주의의 종말 앞에 말입니다.
 

“그 여자 때문에 부자가 된 이 상인들은 그 여자가 받는 고통을 보고 두려워 멀리 서서 울고 슬퍼하며, ‘무서운 일이다! 고운 모시옷과 주홍색 옷을 몸에 두르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단장하던 이 큰 도시에 화가 미쳤구나! 그렇게도 많던 재물이 일시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구나!” 묵시 18:15-17a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에 이렇게 무거운 말로 서두를 시작한 것은 우리가 누리는 행복과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이 모두 ‘부조리’하다는 점을 상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실존의 부조리한 상태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직시하며 살아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매일 반복하는 시시포스처럼, 우리는 그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살아 있기 때문에 매일 다시 자신의 운명의 바위를 저 언덕 위로 굴려야 합니다. 다시 굴러 떨어질 그 바위를 말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과 시간의 연속. 그곳에서 시시포스는 굴러 떨어진 바위를 다시 굴리기 위해 홀로 매일 그 언덕을 내려옵니다. 이러한 반복이 인간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조리함에 대항한 인간의 승리를 보여준다고 알베르 카뮈는 말합니다. 시시포스가 신들로부터 그러한 저주를 받은 이유에 대해서 신화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삶이 늘 신들을 기만하는 삶이었기에 그러한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저주는 아무런 합리적인 인과성이 성립되지 않는 ‘부조리’ 그 자체입니다. 카뮈가 그러한 시시포스를 통해 부조리를 자각한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영감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에게 주어진 삶의 부조리를 자각하는 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입니다. 하루 일상에 치여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신이 시시포스처럼 매일 언덕 위로 바위를 굴리고, 또 그것을 굴리기 위해 그 언덕을 내려오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란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데서 현대인의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저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 고문. 이것이 시시포스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다. 최소한 시시포스는 그러한 반복된 운명의 부조리를 직감했다는 데서 그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부조리 속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부조리함을 깨닫는 자각 속에 인간의 승리와 희망의 서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영향으로, 또 교회 교부들과 수 천년에 걸쳐 형성된 교리로 말미암아 언제부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온 인류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설명하면서 우리는 애써 십자가에 담긴 부조리를 외면합니다. 역사의 예수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만 했을까요? 그것이 정말 인류 구원을 위해 당연한 것입니까? 그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우리 인간의 합리적인 추론이 만들어낸 결론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죽음은 십자가의 부조리를 우리에게 여실히 드러냅니다. 왜 우리의 죄를 위해 하느님이 그 참혹한 죄를 짊어져야 했을까요? 사랑.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의 부조리’입니다. 그분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그들을 치료하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신 것뿐입니다. 그것이 그분이 죽을 이유였다면 그것이 부조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러한 부조리를 덮기 위해 그분에게 ‘주님’,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호칭을 붙였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십자가에서 드러난 부조리가 모두 상쇄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원래 그분이 아니라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시시포스의 바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우리는 없고 그분만이 외롭게 그 길 위에 서계십니다. 도대체 어떤 섭리가 작동을 해서 가당찮은 부조리한 형벌이 그에게 부여된 것일까요? 그리고 또 우리는 그것에 의지하여 자유를 얻었다고 자신 있게 선포하는 것일까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이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부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를 짊어 지신 그 순간이 우리 인류에게 가장 부조리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닥친 불행은 어떠한 예고도 없이 그를 환영했던 군중에 의해 다시 철저히 버려짐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타니”라는 외침은 십자가의 부조리를 드러냅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부조리에 저항한 그의 마지막 외침이면서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신한 외침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분을 버리신 이유를 몰랐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을 읽기 전에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한, 그 십자가의 부조리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보다 몇 백 년을 앞서 예언된 이사야서를 통해 그분이 당한 부조리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이사 53:2

 
이사야서 53장은 분명하게 하느님의 뜻이 인간에게 부조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에게는 도저히 이해불가한 것이 됐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조리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종으로 오신 그분은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다”라고 말합니다. 왜 하느님의 종이, 하느님의 아들이 그러한 부조리한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결정하셨으니 당연한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부조리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것을 설명해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고통을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성하게 되는 이 부조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가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임하는 불행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하지 않게 반응합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불행은 당연하고 우리가 당하는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자신의 불행에 대해 아무런 항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그에게 임한 부조리를 몰라서 침묵하셨겠습니까? 부조리한 불행 앞에서 침묵만이 유일한 저항이었기 때문입니다. 묵묵히 굴러 떨어진 바위를 언덕으로 다시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부조리는 이미 설명과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침묵이 유일한 저항입니다. 그것에 저항하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자기 삶의 마지막 극한 상황을 목격할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 실존에 부여된 부조리입니다. 운명이란 말보다 부조리가 더 잘 어울립니다.
 
인간사에 부여되는 행운과 불행. 이 모든 것은 이미 부조리 속에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 행운을 받은 것도, 누군가 불행을 얻은 것도 어떠한 조리 있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은 불행을 하느님에 대한 불충으로 얻은 결과라 말했지만, 욥기는 이를 강력하게 부정했습니다. 욥기도 그 결론에 대한 답을 부조리 속에 유보합니다. 답할 수 없는 것을 답하는 것이 오히려 거짓입니다. 부조리가 설명된다면 더 이상 부조리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설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이 끝임을 암시합니다. 시시포스는 결코 바위를 굴리는 부조리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그것이 부조리이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 침투하는 행운과 불행을 어떤 합리적인 인과의 법칙으로 풀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군가 일이 잘 됐다면 자신이 그 복을 받을 만해서, 또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함부로 단정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좌절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일 뿐입니다. 누구나 노력하면 다 성공할 것이라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정된 자원을 공유하는 인류는 누군가 성공하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는 실패해야 함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누군가 1등을 하면 누군가는 2등이 되고 꼴찌가 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노력하면 다 1등이 될 것이라는 희망 고문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누군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겪었다고 함부로 그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그 불행에는 어떠한 원인도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부조리를 정면으로 그는 마주친 것뿐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에서 마주친 부조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의 짐을 대신 질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행운도 자기 때문이 아니고, 불행도 남 탓이나 자기 탓이 아닙니다. 행운과 불행은 무작위적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부조리 그 자체입니다.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을 우리는 부러워하면서 자기에게도 그런 행운이 오기를 기대하며 복권을 삽니다. 그런 기대가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것도 부조리입니다. 기도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자신의 의지대로 하느님을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행운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그것을 ‘은총’이라 우리는 부릅니다. 불행이 닥쳐오면 그것을 우리는 ‘시험'이라 부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우리 그리스도인이 부조리를 바라보는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행운과 기쁨이 찾아왔다면 오직 겸손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혹시 불행이 찾아왔다면 자신이 세상의 부조리를 직면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을 나락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자책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운이든, 불행이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것은 개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부조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플 때에 기뻤을 때를 생각하며 조금은 덤덤할 수 있고, 기쁠 때에는 슬펐을 때를 생각하며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운이 찾아왔다고 잘난척할 필요도 없고, 불행이 닥쳤다고 의기소침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사가 다 그러한 부조리함 속에 있음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실존을 조금은 초연하게 제대로 직시할 수 있을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불행과 행운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원인도 없습니다. 그러한 부조리를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모두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희망을 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조리함을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것을 직접 경험하신 분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시시포스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바위를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언덕 위로 굴려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이니, 좌절하지 않도록 그 일을 혼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바위를 굴릴 의지만 있다면 주님께서 기꺼이 함께 그 바위를 굴려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그러한 실존을 주님과 함께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이 떨어진 일이 없었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사람이 자기 자식을 잘되라고 고생시키듯이 그렇게 너희를 잘되라고 고생시키신 것이니, 이를 마음에 새겨두어라.” 신명 8:4-5

 
한 해의 추수를 돌아보며 누구는 더 많이, 누구는 더 적게 거두셨을 줄 압니다. 모두가 풍성하면 좋겠지만 인생사는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또한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와 나눔이라는 우리의 실존을 극복하는 좋은 덕목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축복을 받았다면 그 은총으로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총을 감사한 마음으로 남과 ‘나누시기’ 바랍니다. 또 불행이 닥쳤다면 그 아픔과 슬픔을 남과 나누시기 바랍니다. 아픔과 고통은 나눔을 통해 반감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한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시포스의 바위를 혼자 굴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부조리한 세상에 함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우리의 삶을 감당해 가길 바랍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이러한 은총과 불행을 함께 나누는 데서 그 의미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나눔을 통해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모두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 이것이 부조리한 세상을 이겨내는 그리스도인의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추수감사주일
 
본기도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의 필요에 따라 풍성한 수확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바다와 육지의 소산물을 기르고 수확하는 이들을 축복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허락하신 은총을 잘 관리하고 나누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신명 8:1-10
1 너희는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계명을 성심껏 지켜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행복하게 살며 번성할 것이고 야훼께서 너희의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3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것이었다. 4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이 떨어진 일이 없었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다. 5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사람이 자기 자식을 잘되라고 고생시키듯이 그렇게 너희를 잘되라고 고생시키신 것이니, 이를 마음에 새겨두어라. 6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가 보여주신 길만을 따라가도록 하여라.
7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이제 너희를 기름지고 넓은 땅,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솟아 샘이 되고 냇물이 흐르는 땅으로 이끌어들이려고 하신다. 8 그 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여는 땅이요, 올리브 나무 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 9 굶주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땅, 아쉬운 것 하나 없는 땅, 돌에서는 쇠를, 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이다. 10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너희는 배불리 먹으며 하느님을 기리게 될 것이다.
 
 
 
성시_시편 65
1    하느님,
.     시온에서 찬미받으심이 마땅하오니
.     당신께 바친 서원 이루어지게 하소서.
2    당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     죄지은 모든 사람 당신께 나아가 고백하오니,
3    우리가 지은 죄 힘겹도록 무거우나
.     당신은 그것을 씻어주십니다.
4    복되어라,
.     당신께 뽑혀 한 식구 된 사람,
.     당신 궁정에서 살게 되었으니,
.     당신의 집,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     우리도 마음껏 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5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     놀라운 기적으로 정의를 세우시고,
.     우리 소원 들어주시니,
.     땅 끝까지 먼 바다 끝까지
.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6    그 크신 힘으로 산들의 뿌리를 박으셨으며
.     권능의 띠를 허리에 질끈 동이시고
7    설레는 바다와 술렁이는 물결 
.     설치는 부족들을 가라앉히셨습니다.
8    땅 끝에 사는 사람들이
.     당신의 손길을 보고 놀라며 
.     해뜨는 데서 일으키신 노랫소리,
.     해지는 곳에 메아리칩니다.
9    하느님은 이 땅을 찾아오시어, 
.     비를 내리시고 풍년을 주셨습니다.
   손수 파 놓으신 물길에서,
.     물이 넘치게 하시어
.     이렇게 오곡을 마련해주셨습니다.
10  밭이랑에 물 대시고, 흙덩이를 주무르시고
.     비를 쏟아 땅을 흠뻑 적신 다음 
.     움트는 새싹에 복을 내리십니다.
11  이렇듯이 복을 내려 한 해를 장식하시니
.     당신 수레 지나는 데마다
.     기름이 철철 흐릅니다.
12  광야의 목장에도 기름기 흐르고 
.     언덕마다 즐거움에 휩싸였습니다.
13  풀밭마다 양떼로 덮이고,
.     골짜기마다 밀 곡식이 깔렸으니
.     노랫소리 드높이 모두 흥겹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야고 1:17-18, 21-27
17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변함도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 그늘 속에 버려두시는 일도 없으십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온갖 악한 행실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 그러니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23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제 얼굴의 생김새를 거울에다 비추어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 사람은 제 얼굴을 비추어보고도 물러나서는 곧 제 모습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25 그러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을 잘 살피고 꾸준히 지켜 나가는 사람은 그것을 듣고 곧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며 들은 것을 실천에 옮깁니다. 이렇게 실천함으로써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26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 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서_마태 6:25-33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