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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을 위한 토대”

James Chae 2023. 12. 10. 06:09

2023.12.10. 나해_대림 2 주일

이사 63:19-64-8 / 시편 80:1-7, 17-19 / 1고린 1:3-9 / 마르 13:24-37

 

 

모든 생명을 위한 토대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영원한 생명은 찰나의 순간에 깨닫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고통과 실패와 좌절과 소외라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매일 접하는 상황 가운데 존재합니다. 그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가운데있음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죽을 같은 고통과 좌절 속에 있는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서 그러한 생명을 발견하면 희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단순한 호흡과 혈액의 순환 그리고 심장의 활동에 의한 유전자적 신진대사와 관련되지 않습니다. 생명은 끊임없는 성장과 관련된 것이며, 그것은 상황 속에서 움직이고, 살아 있으며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체득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우리는 몸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고, 죽음에 직면해야만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어떤 존재도 에너지도 느낌도 감정도 영적인 어떤 것도 아닌 우리의 상황 안에서만 실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로완 윌리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새로운 생명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 날마다 구성되어야 할 새로운 미래다. 그렇기에 결국, 삶은 운동이자 성장이다.” 로완 윌리암스의 [상처 입은 앎] 중에서

 

 

생명은 운동과 성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처참한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율법이 말하는 율법 준수에 의한 자기 안정적 시스템은 결코 우리를 그러한 생명으로 인도할 없습니다. 우리가 간구하는 세상의 안녕과 평화, 그리고 축복은 결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 하느님께서는인간의 실패와 무력함속에, “고통과 아픔과 좌절가운데, 생명으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하느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할지 말지 결단하도록”(로와 윌리암스)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단의 결과 주님께서는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픔과 고통과 좌절은모든 생명을 위한 토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통해 인간은 고통 가운데서도 생명을 느끼며, 상황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힘을 의지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초대에 응답하는 선택의 도전만이 남습니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생사화복과 안락한 , 이생에서의 행복추구, 개인의 안녕과 평화, 내세의 구원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고통과 아픔, 실패와 좌절, 희생과 인내를 현재에서 직시하는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받을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했던 말을 상기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거짓 사도들에 대항하여 자신도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이스라엘 사람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운을 띄우고, 성공과 축복의 목록이 아닌 자신의 실패의 목록들을 열거하며 자신의 사도성을 증명합니다. 그것은 그의 부르심이 철저히실패와 좌절, 고통과 아픔 관련된 것임을 증언한 것입니다.

 

“나는 그들보다 수고를 더 많이 했고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2 고린 11:23~27

 

이것이 부르심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에 대해, 세상적인 축복이나 성공, 물질적 은총이나 건강의 축복, 사업의 성공이나 자녀들의 성공에 대해 자랑하지만,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실패와 좌절과 아픔과 고통을 오히려 자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권위가 세상적 축복이나 성공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자신의 좌절과 실패 속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나열한 고난의 목록은 정말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좌절과 실패의 목록이 아닐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영적인 은총과 세속적인 축복을 자랑할 있었을 겁니다. 자신의 율법에 대한 지식과 가말리아파의 율사 출신임을 자랑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것을쓰레기 여겼습니다. 삼층천에도 올라갔던 영적인 경험도, 부활한 주님을 만난 경험도, 그가 받은 모든 세상적 축복을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쓰레기 여겼습니다. 그는 좌절과 실패라는 상황 속에서 현현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생명을 사람입니다. 그곳에 생명이 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상처 없이는, 피흘림 없이는 그리스도에게 나아감이 불가능함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울로가 십자가와 부활의 토대로 실패와 고통과 좌절을 이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좌절 위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알기에 그는 모든 고난과 수고를 감내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이사 40:2

 

오늘 이사야서는 갖은 고난 속에서 마침내 야훼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의 좌절과 실패 속에서 마침내 이스라엘은 야훼의 위로를 경험합니다. 누구의 잘못과 죄이든, 고난과 실패에 대한 원인이 무엇이든, 고난 받는 사람, 실패한 사람에 대해 주님께서는 여전히 자비를 가지고 계심을 오늘 이사야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한번 선택한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실패와 고난을하느님의 견책으로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심한 미움 받으셨으므로 그분을 생각하며, 이러한 실패와 좌절의 고통을 감내하라고 격려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잠언서 3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꾸짖으실 때에 낙심하지도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 히브 12:5-6

 

좌절과 실패의 원인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그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분석이 이상 위로로 작동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아픔과 고통 속에서 사경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말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럴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직접 경험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것이 우리의 푯대이기에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그분께 호소하는 수밖에 없음을 압니다.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분을 부활의 힘으로 건지신 것처럼 우리도 고아처럼 그러한 실패와 좌절 속에 멸망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속에서 예수를 바라볼 용기와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사람이 가져할 덕목은인내입니다. 주님께서는 골고다의 길을 인내하셨고, 마침내 승리를 얻으셨습니다. 많은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마지막 면류관을 위해 현재를 인내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믿음의 장으로 유명한 히브리서 11장은 그러한 신앙의 인물들의 목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힘없이 늘어진 손을 쳐들고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십시오.”(히브 12:12)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요 위로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2 베드 3:8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내의 근거입니다. 이미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오직 현재로 과거와 미래가 소급됩니다. 일직선으로 흐르던 물리적 시간이, 모든 물길들이 샘으로 모이듯이 현재로 흘러듭니다. 시간은 년이든 하루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 속에서는 인내로 시간이 상쇄됩니다. 과거의 믿음의 사람들은 여전히 오늘에서도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에녹이 그렇고, 노아, 아브라함, 여호수아, 판관들, 다윗, 엘리야와 엘리사, 모세그리고 사도들과 교부들너무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오늘에도 살아서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되며 우리의 오늘을 희망으로 비춰줍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금방 시들고 사라지지만, 믿음과 인내는 모든 시간 속에 존재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그러한 것입니다. 인내는 바로 이러한 신앙의 바탕 위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내로써 우리는 현재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이겨냅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희망과 믿음을 위한 토대가 됩니다.

 

초기 기독교가 축복과 내세의 안녕만을 추구했다면 우리 기독교는 영지주의와 가현설주의의 영향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초기 속사도들은 이점을 간파했고 그래서 눈에 보이고, 만질 있는육신 육신이 겪는 고통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실존 자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직결됐음도 간파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과 가현설주의자들은하느님의 고통과 실패 거부했기에 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기를 꺼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에 눈을 감았고,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는 지고하고 신비한지혜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아픔과 고통, 좌절과 실패보다는 육신의 덧없음을 믿었고, 육신의 감옥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추구했습니다. 결과 그들은 지상에 발을 절대로 디딜 없이 자신들이 만든 망상 속에서 부유하는 유령과 같은 존재로 살았습니다. 육신의 고통과 아픔을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이렇게 자아도취적인 망상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러한 아슬아슬한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건너와 당당하게하느님의 실패와 좌절, 고통과 아픔 선포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패와 좌절은부활의 능력으로 상쇄됨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토대는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좌절은 잠시뿐이지만, 부활의 능력과 영생의 기쁨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 위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날을 기다리고 있으니만큼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2 베드 3:14

 

베드로후서는 대림절에 합당한 우리의 자세를 제시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고통과 아픔, 좌절과 실패 속에서도 인내하며티와 없는 사람, 하느님과 이웃과 화목하는 사람으로 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지주의와 다른 생명의 토대를 가진 우리 기독교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를 능히 부활의 힘으로 승리할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우리의 현재를 서로 격려하며 함께 이겨내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대림2 (나해)

 

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회개를 선포하시고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기울여 모든 죄를 멀리하고, 다시 오실 구세주 예수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40:1-11

.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2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3     소리 있어 외친다.
.   “야훼께서 오신다.
.     사막에 길을 내어라.
.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     벌판에 길을 훤히 닦아라.
4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5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     모든 사람이 영화를 뵈리라.
.     야훼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
6     소리 있어 명하신다. “외쳐라.”
.   “무엇을 외칠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     영화는 들에 꽃과 같다!
7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     스쳐가는 야훼의 입김에.
.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8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으리라.
9    , 시온아.
.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     , 예루살렘아.
.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질러라.
.     유다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10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
11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     새끼 양들을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

 

 

 

성시_시편 85:1-3, 8-13

1    주여, 당신 땅을 어여삐 여기시어
.     귀양살이 야곱을 돌아오게 하시고,
2    당신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     저희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으니,
3    당신의 격분을 말끔히 거두시고
.     타오르던 진노를 잊어 주옵소서.
8    나는 들었나니, 주께서 무슨 말씀 하셨는가?
.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 그것은 분명히 평화로다.
¶    당신 백성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
.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으면
.     그들에게 평화를 주시리로다.
9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
.     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드시리라.
10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11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     하늘에서 정의가 굽어보리라.
12  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 주리라.
13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     평화가 발자취를 따라 가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2베드 3:8-15

8 사랑하는 여러분,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A]주님께는 하루가 같고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것입니다.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버리고 땅과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니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12 하느님의 심판날을 기다릴 아니라 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것입니다. 날이 오면 하늘은 불타 없어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B] 하늘과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여 있습니다.

1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만큼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15a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A] 시편 90:4
[B] 이사 65:17

 

 

 

복음서_마르 1:1-8

1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   “이제 내가 일꾼을 너보다 먼저 보내니
.     그가 길을 미리 닦아놓으리라.”
.     말라 3:1

하였고, 3 ¶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     칠십인역 이사 40:3

하였는데, 기록되어 있는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5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와서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7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보다 훌륭한 분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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