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7. 나해_대림 3 주일
이사 61:1-4, 8-11 / 시편 126 / 1데살 5:16-24 / 요한 1:6-8, 19-28
“항상 기도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라!”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저는 최근에 신정론에 입각하여 고통과 아픔, 실패와 좌절에 대한 문제를 다뤘습니다. 시대가 너무 뒤숭숭하고,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의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과연 무엇일까? 정말 이 세상에는 희망이 있는 것일까? 왜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고통 가운데 버려두시는 것일까? 왜 하느님께서는 친히 고통의 십자가를 지셔야 했을까? 정말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을 그분이 창조하신 게 맞는 것일까?
종교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만, 인간 실존이 처한 고통과 절망의 상태가 종교의 기원과 연관이 됐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죽음과 자연재해, 생존을 위협하는 다양한 도전들에 직면한 우리의 원시 조상들은 동물적인 ‘의식’을 넘어 ‘이성’의 범주에서 이러한 문제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존을 위한 ‘문명’을 만들고, 그 문명은 종교와 깊은 연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루돌프 오토가 주장한 “누미노제(Numinose)” 즉 “절대 타자”의 개념을 가지고 종교의 기원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절대 타자”를 직면한 유한한 인간이 느끼게 되는 “경외감”이 신심의 출발과 연관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미학적으로 말하면 “숭고”라고 합니다. 측량할 수 없고, 가늠할 수도 없는 물리적 현상이나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모종의 경외감을 미학에서는 롱기누스의 표현을 따라 “숭고”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건이나 현상을 목격했을 때, 인간의 경험과 불일치하는 인지부조화의 상태에서 느끼게 되는 느낌이나 감정을 말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넘어서는 전율과 무한한 경외심이 뒤섞인 감정일 겁니다. 아마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도 바울로도,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본 계시록의 기자도, 시내산에서 야훼를 처음 대면했던 모세도, 벧엘에서 처음 하느님의 사다리를 경험했던 야곱도 모두 이러한 “숭고”를 경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결코 사람을 그 경험 이전으로 절대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듭니다. “숭고”의 경험은 한 인간을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나 이론적인 추론에 의해 도달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신비’라고 부르고, 성사적 용어로 그것을 “회심의 경험”이라 부릅니다. 성 어거스틴이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끌려 로마서를 펴서 읽은 그 순간 그는 이러한 “누미노제”를 접했습니다. 초월이 내세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파되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 ‘숭고의 순간’, ‘누미노제의 순간’을 말입니다.
영지주의(Gnosticism, γνωστικός)는 고통과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을 버렸습니다. 광활한 우주에 고아처럼 버려진 존재. 배고픔의 위협과 전쟁의 위협,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육신을 버렸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표현대로 “육체가 없으면 겪지 않았을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육신을 “영의 감옥”이라 생각했습니다. 석가모니도 세상이 “고통뿐”이라는 것을 보리수 밑에서 갖은 수행을 통해 깨닫습니다. 육체는 우리 인간 만의 것이 아니라 윤회를 통해 다양한 생물들과 공유되며 다시 태어나고, 반복해서 고통을 겪게 되는 순환 구조 속에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날 때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선행을 통해 업보의 양을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극한의 수행이나 자비행을 통한 해탈 밖에 없습니다. 이 또한 영지주의자들의 생각과 매우 유사합니다. 굶주림과 고통, 부조리로 가득한 불완전한 세상을 과연 절대 신이 만드셨을까요? 그래서 마르시온 같은 사람은 구약의 하느님은 “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훼를 악한 신인 “데미우로고스”와 매칭시켰습니다. 변덕스럽고 인간을 괴롭히며, 인간을 향해 질투하고 화만 내는 신. 그래서 그는 구약의 야훼를 버렸고, 새로운 하느님을 예수의 아버지에서 찾았습니다. 그 아버지는 야훼와는 달리 인간 내면에 “신성한 불꽃”을 밝혀 ‘그노시스’를 깨닫게 하여 영적인 인간이 됨으로 인간이 해방된다고 믿었습니다. 영과 혼과 육으로 인간 존재가 구분되며 영적인 구원만이 진정한 구원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깊은 영적인 상태에 이르기 위해 더욱 밀교적인 의식을 발전시키게 된 것입니다. 현실에 여전히 만연한 고통의 문제에는 외면하면서 말입니다.
고통과 아픔, 좌절과 실패에 대한 기원을 찾다 보면 우린 자연스럽게 신정론적 방법론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신학의 기원이요, 종교의 기원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이 의식을 가진 동물과 다른 이성을 가진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문명을 이룬 힘입니다. 그래봤자 네안데르탈인의 뒤를 이은 현생 인류의 역사는 700,0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구의 나이 45억 만년에 비하면 정말 찰나의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광활하고 어둡고 차디찬 우주 공간의 무한성에 비하면 지구는 공간적으로 먼지보다 더 미미하게 작습니다. 광대한 이 우주에, 여기 이 은하에, 이 태양계에, 이 지구에만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기 조차 합니다. 왜 넓디넓은 우주 공간에서 이 작은 곳에서만 생태계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구원자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왜 하필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구원을 선포한 것일까요? 우리 인류 이전에도 이 지구 생태계의 주인이 수도 없이 바뀌었다는 것을 우리는 많은 과학적 연구로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이 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오신 아기 예수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만을 구원하기 위해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일까요? 그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이나 그 이전에 이전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도태와 멸망은 그냥 진화의 과정일 뿐일까요? 왜 하느님께서는 현생 인류인 “호머 사피엔스”에게 나타나신 것일까요? 호머 사피엔스만이 유일하게 초월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일까요? 호머 사피엔스만이 유일하게 ‘문명’이란 것을 만들었기 때문일까요? 칠십 만년의 시간을 유추하며 이러한 답을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오랜 시간 속에서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생존을 위해 모두 함께 투쟁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 생태계가 ‘함께’ 말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약육강식과 자연도태의 원리 속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나름 생존전략과 진화를 해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이 지구상에 생태계를 이루는 모든 생명체는 지난한 고통과 아픔,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며 모두 함께 생존 공동체를 형성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린 ‘모든 생명의 토대’가 고통과 아픔, 좌절과 실패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러한 고통과 아픔, 좌절과 실패의 상황에서 늘 생명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존재들은 계속해서 진화했고, 그렇지 않은 존재들은 모두 도태됐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사도 바울로가 로마서 8장에서 말한 “고통에서 영광으로”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로마 8:18-23
우리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를 고대하면서 신음하고 진통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에서 풀려날 희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 짙게 들어 있는 사도 바울로의 이러한 주장은 “누미노제”를 경험한 그이기에 가능한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그러한 차원까지 우리의 구원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저 한 사람 감당하기도 때론 벅찰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는 모든 피조물의 신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신음 소리는 모든 피조물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고 또 그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는 그의 복음의 선포입니다. 그 선포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고 또 우리 교회는 그의 선포 위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이쯤 되면 그가 거짓말쟁이이든 아니면 참 말을 한 것이든 우리는 양단간에 하나를 분명히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의 말을 거부했다가 마지막에 후회할 일이 생기면 참 낭패이지 않습니까? 파스칼의 도박 예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도 바울로의 서신서를 읽다 보면 이러한 도전에 늘 직면하게 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 데살 5:16-18
이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은 고난을 앞에 둔 자녀에게 진심을 담아 충고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한 말입니다. 자신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세운 데살로니카 교회. 신앙적 훈련과 교리적 가르침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고 떠나왔던 그들을 향해 진심 어린 충고를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모든 고난 속에서 자신이 그것을 이겨낸 노하우를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서신서가 모두 그의 진실을 담았다면 아마도 그는 정말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사람일 겁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그는 못을 박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고통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고통과 시련 가운데서 항상 불평하고 좌절하기 일쑤인 우리로서는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라”는 말이 율법만큼 커다란 짐으로 다가오고 마치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 마지막에 그가 언급한 “성령의 불, 성령의 감동”이 그가 그 고통 가운데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 완전히 성령의 “누미노제”를 경험한 것입니다. 초월의 숭고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이미 그를 붙들지 못하고 고통과 아픔도 그를 가두지 못합니다. 그는 고통과 아픔, 실패와 좌절을 통해 생명의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것은 영지주의자들이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육체를 무시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고통과 아픔을 통해 그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며 하느님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사도 바울로처럼 다음과 같이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마라나 타! 주여, 어서 오소서” 1 고린 16:22 / 묵시 22:20
그리스도로 인해 많은 실패와 좌절, 고통과 아픔을 겪은 사도 바울로다운 선포이며 희망입니다. 그러한 간절함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빕니다. 고통과 아픔, 좌절과 실패로 인한 두려움 속에서 어깨를 당당히 펴고 사도 바울로의 희망 위에 우리도 서기를 바랍니다. 고난 받던 욥에게 친구들은 위로보다 경멸을 보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고통받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매는 드셔도 그들을 ‘경멸’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해 후회는 하셨어도 ‘경멸’하셨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의 신음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고, 자신의 아들을 구원자인 아기 예수로 보내셨고, 또 지금도 그의 아들을 심판자로 보내시려 준비 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림절을 이미 오신 아기 예수에 대한 감사와 다시 오실 심판자에 대한 기다림 속에 보냅니다. 이미 오심은 감사로, 다시 오심은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만약 여러분을 지금까지 붙들고 괴롭히는 문제들이 있다면, 이제 이 대림절에 모두 과거 속에 털어버리시고 새로운 빛과 희망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간절함은 희망을 추동하고, 희망은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믿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과 혼과 육신으로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하며 항상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그분의 오심에 대한 희망과 일치하여 여러분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항상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주님, 어서 오소서. 마라나 타! 아멘.
전례독서_대림3주 (나해)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성자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지혜와 믿음을 주시어,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큰 영광과 권능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61:1-4, 8-11
1. 주 야훼의 영을 내려주시며
.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2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주실 해,
.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
. 재를 뒤집어썼던 사람에게 빛나는 관을 씌워주어라.
.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어라.
.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하여라.
. 그들을 이름하여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라 하여라.
. 야훼가 자기의 자랑거리로 손수 심은 것,
4 그들은 옛 성터를 재건하고
. 오래 전에 허물어진 폐허를 다시 세우리라.
. 무너진 도시들을 새로 세우고
. 그 옛날 선조 때 헐린 집들을 신축하리라.
. …
8 나 야훼는 공평을 좋아하고
. 약탈과 부정을 싫어한다.
. 나는 그들에게 고생한 대가를 어김없이 갚아주며
. 영원한 계약을 그들과 맺으리라.
9 그들의 후손은 만방에 알려지고
. 자식들은 뭇 백성 가운데서 이름을 날리리라.
. 그들을 보는 자마다
. 야훼께 복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주셨고
.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주셨다.
.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주셨고
.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주셨다.
11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성시_시편 126
1 주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 주시던 날, ◯
. 꿈이든가 생시든가!
2 그 날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 같은 웃음 터지고 ◯
. 흥겨운 노랫가락 입술에 흘렀도다.
¶ 그 날 이교 백성 가운데서 들려오는 말소리, ◯
. “놀라와라, 주께서 저 사람들에게 하신 일들!”
3 주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 하셨으니 ◯
.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4 주여, 저 네겝 강바닥에 물길 돌아오듯이 ◯
. 우리의 포로들을 다시 데려 오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자, ◯
.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6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 자, ◯
.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데살 5:16-24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늘 기도하십시오. 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20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22 그리고 악한 일은 어떤 종류이든지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없게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24 여러분을 불러주신 분은 진실하셔서 이 일을 다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복음서_요한 1:6-8, 19-26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8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
19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이 때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20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히 말해 주었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다시 묻자 요한은 또 아니라고 대답 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요?” 그들이 다시 물었을 때 요한은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22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렇게 다그쳐 묻자 23 요한은 그제야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이사 40:3’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하고 대답하였다.
24 그들은 바리사이파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그들은 또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26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27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
28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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