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4. 나해_대림 4 주일
사무하 7:1-11, 16 / 루가 1:46하-55(성모송가) 또는 시편 89:1-4, 19-27 / 로마 16:25-27 / 루가 1:26-38
“자기 양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에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굳이 절대자를 의지하거나 종교를 찾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잘 자라고, 경제적으로도 별다른 문제가 없고, 가정도 화목하고, 모두가 건강하며 사람들과의 관계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의 일상이 항상 그대로 지속되길 바랍니다. 그러다가 그러한 안정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 예를 들어 육신에 병이 생기거나, 경제적 불행이 닥치거나, 사고 또는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닥치면, 모든 일상이 무너지며 인간은 “왜”라는 질문과 함께 다양한 반응을 쏟아냅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리고 화를 내며 종교를 거부하게 되든지, 아니면 종교적으로 더 깊게 매달리든지, 아니면 자신의 노력으로 고난을 타계하려 갖은 노력을 다하든지 할 겁니다. 물론 다른 반응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양극단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고통의 탓을 너무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사디즘적으로 또는 마조히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고통의 원인을 자기 밖에서 찾는 성향을 사디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종교나 사회적 환경, 성장의 배경 등에 원인을 돌리는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마조히즘적 반응은 고통의 원인을 오직 자기 자신에서만 찾고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자학적인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찾는 데 오히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미 고통은 우리 인간과 생태계의 실존의 토대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원인에 집중하기보다 고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고민하면서 어떻게 그것에 대처해 나갈 것인가가 오히려 더 중요해집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 이러한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매우 한정된 자료만 있지만, 마리아의 일상은 매우 평범해 보입니다. 그녀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말씀에서 기록된 대로, 약혼도 했고 매우 일반적인 젊은 여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사랑했고 그것이 지속되길 바랐을 겁니다. 흔히 우리들과 같은 소박한 소시민의 소망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 균열이 생긴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누미노제’의 대면 때문입니다. 남자를 가까이 해본 경험도 없는 어린 여인이 현재의 일상성을 뚫고 침투하는 하느님의 계시를 접합니다. 차라리 그런 일이 없었으면 모르지만, 그녀가 누미노제를 접한 순간 그녀의 일상성은 모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누미노제를 경험하면 절대로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도망가 봤자 요나처럼 결국에는 초월자 앞으로 이끌려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고집은 하느님 앞에서 무기력합니다. 그것을 그녀가 알았을까요? 그녀는 “고통과 고난”이 담보된 희망의 계시를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것은 그녀의 일상성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신탁에 대한 수용입니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비극의 신탁을 그의 부모가 델포이 신전으로부터 받은 것처럼, 장차 일어날 자신의 비극을 미리 통보받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우리는 마리아를 통한 성육신의 탄생 교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에 종종 마리아의 입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신탁이었는지 상상조차 못 합니다. 혼외 자식을 가질 것이란 말이 주는 고통과 공포의 무게를 우리는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유다교 전통에 의하면 수치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녀의 모든 실존적, 사회적 기반이 무너지는 죽음 말입니다. 약혼한 어린 여인에게 너무 가혹한 신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학자는 마리아의 나이를 14세 정도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고통과 좌절을 그녀가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두 번째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계시 때문에 아들의 탄생 때와 그의 죽음 앞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느끼고 감사했을까요? 사라의 태가 닫힌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이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던 아브라함도 이사악을 얻기까지 많은 인내와 고통을 감내해야 만 했습니다. 차라리 신탁이 없이 사라대신 다른 첩을 통해 자식을 얻어 대를 이었으면 당하지 않았을 고통입니다. 그것이 일반 사람들의 일상성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에 대한 신탁이 주어지자 아브라함의 일상성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첫째 아들인 이스마엘을 쫓아내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상성은 하느님의 신탁 아래 산산이 부서집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나요? 축복에는 늘 이렇게 고난도 동시에 작동을 합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신탁에 순종한 것에 대해 칭송하지만, 그녀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이었다는 것, 그녀의 연약한 믿음으로 신탁을 부여잡고 사회적 편견과 싸워야 했던 그녀의 투쟁에 대해 우리는 잘 모릅니다. 마태오복음은 그녀의 남편 요셉을 강조해서, 요셉이 몰래 혼외자식을 지우려 했다고 그를 의인으로 묘사했지만, 루가복음은 이에 대해 침묵합니다. 루가복음은 마태오복음과 다르게 마리아의 순종에 더 집중했습니다. 그녀의 순종이 있었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이 완성된 것을 루가복음은 강조합니다. 그것은 그녀의 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 행간에 숨어 있는 그녀의 순종의 과정과 인내의 과정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녀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녀 또한 그러한 순종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통과 아픔, 실패와 좌절을 겪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러한 아픔과 인내 속에서 자기 자아를 하느님께 온전히 양도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 5:3~5 KRV
이것이 사도 바울로가 말한 “고통에서 영광으로”라는 말의 뜻입니다. 고난과 고통은 우리의 일상성을 무너뜨리며 하느님과 우리 가운데 가로놓인 모든 걸림돌과 가식과 허식들을 무너지게 만듭니다. 그것은 평온한 일상 속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를 새롭게 그분의 영광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는 축복입니다. 세상의 어떤 평온함도, 축복도, 안락함도 그분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와 안식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총을 맛본 사람은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존재는 온전히 자신의 자아를 하느님께 양도함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차원으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모든 고난과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그녀의 헌신과 ‘자기 양도’는 우리에게 어떻게 성육신을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세상적 불명예와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불굴의 의지가 그녀의 전적인 ‘자기 양도’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물론 사도 바울로가 말한 대로 그녀의 혼자의 힘만은 아닐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은총이 그 연약한 심령을 붙들어 성육신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역에 그녀를 동참시킨 것입니다. 그녀의 순교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녀는 한평생을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의 자아를 양도하는 삶은 산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가 성장해서 로마의 십자가에 사형수로 매달렸을 때, 그녀는 그러한 날을 짐작하며 그 시간을 인내했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의 탄생의 순간부터 그러한 운명을 직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 그분의 헌신과 자기 양도의 본을 우리도 따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일상성을 부여잡고 아무것도 하느님 앞에 양도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어린 마리아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느님께 양도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시간, 우리의 노력, 우리의 자아, 우리의 소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자신의 일상성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에게나, 아니면 그 일상성을 탈피하고 싶은 사람에게나 이 성탄절은 메시아의 탄생을 기뻐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우리의 자아를 양도하도록 도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에게 닫힌 마음을 하느님께 양도하며 타자를 우리 안에 품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일상성을 깨고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양도한 마리아처럼 우리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양도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성령께서 힘을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대림4주일(나해)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성모 마리아의 순종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나이다. 구하오니, 우리도 주님의 뜻을 따라,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굳센 소망으로 헌신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무하 7:1-11, 16
11야훼께서 사면의 원수를 다 물리쳐주셨으므로 다윗 왕은 궁에서 마음놓고 살게 되었다. 2 그렇게 되자 왕은 예언자 나단에게 말하였다.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렇게 송백으로 지은 궁에서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모셔둔 채 그대로 있소.” 3 나단이 왕에게 아뢰었다. “야훼께서 함께 계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4 그 날 밤, 야훼의 말씀이 나단에게 내렸다. 5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나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일러라.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6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던 때부터 지금까지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녔고, 집 안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7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동안, 내 백성 이스라엘을 맡겨 보살피게 한 어느 영웅에게 어찌하여 나의 집을 송백으로 지어주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8 너는 이제 나의 종 다윗에게 만군의 야훼의 말이라 하며 이렇게 일러주어라.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내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9 그리고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들을 네 앞에서 쳐 없애버렸다. 세상에서 이름난 어떤 위인 못지않게 네 이름을 떨치게 해주리라. 10 또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이 머무를 곳을 정해 주어 그 곳에 뿌리를 박고 전처럼 악한들에게 억압당하는 일이 없이 안심하고 살게 하리라. 11 지난날 내가 위정자들을 시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던 때와는 달리 너희를 모든 원수에게서 구해 내어 평안하게 하리라. 나 야훼가 한 왕조를 일으켜 너희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리라. … 16 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 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7:1-29은 1역대 17장을 참조하십시오.
성시_ 성모송가 The Magnificat / 루가 1:46-55
1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오며, ◯
. 내 마음이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기뻐합니다.
2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
. 이제부터 온 백성이
.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3 전능하신 분께서
. 내게 큰 일을 행하셨으니 ◯
. 주님의 이름 거룩하십니다.
4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
. 대대로 구원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5 주께서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6 권세있는 자들을
.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
. 보잘 것 없는 이들을
. 높이셨습니다.
7 굶주린 사람을
.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
. 부요한 사람을
. 빈 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8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
. 주님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9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 약속하신 대로, ◯
.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십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또는 시편 89:1-4, 19-27)
1 주여, 내가 당신의 사랑을 영원히 노래하리이다. ◯
. 당신의 미쁘심을 대대로 전하리이다.
2 당신께서 다짐하신 사랑, ◯
. 그 미쁘심은 하늘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3 “나는 내가 뽑은 자와 계약을 맺고 ◯
.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다.
4 내가 너를 왕위에 앉히고 ◯
. 네 후손 대대로 왕노릇하게 하리라.“
19 그 옛날, 당신께서 스스로 나타나시어 ◯
. 당신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용사들 위에 한 젊은 용사를 세우고 ◯
. 내 백성들 위에 그를 들어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20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
. 나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 주었다.
21 내가 손으로 그를 돕겠고 ◯
. 내 팔로 그를 강하게 하리니
22 원수가 그를 당해 내지 못하고 ◯
. 간악한 자도 그를 괴롭히지 못하리라.
23 내가 그의 면전에서 그의 적들을 짓부수고 ◯
. 그 원수들을 쳐부수리라.
24 나의 진실과 사랑이 그의 곁에 있으리니 ◯
. 그가 내 이름으로 뿔을 높이 들리라.
25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뻗치게 하고 ◯
. 그 오른손을 강에까지 뻗게 하리니
26 그는 나를 불러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
. 내 구원의 바위이십니다” 하겠으며,
27 나는 그를 맏아들로 삼아 ◯
. 세상 임금 중에 가장 높은 임금으로 세우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16:25-27
25 하느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두셨던 그 심오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심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굳세게 해주십니다. 26 그 진리는 이제 예언자들의 글에서 명백하게 드러났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모든 이방인들에게 알려져 그들도 믿고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27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지혜로우신 오직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서_루가 1:26-38
26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27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29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31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33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34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35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37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38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기도문 성모송은 루가 1:28, 42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 주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중에 복되시며,
.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 하느님의 모친되신 마리아여,
.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 성공회 기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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