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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자로 오신 분”

James Chae 2023. 12. 31. 06:17

2023.12.31. 나해_성탄 1 주일

이사 61:10-62:3 / 시편 148 / 갈라 4:4-7 / 루가 2:22-40

 

 

가장 낮은 자로 오신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Artist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성육신 사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독교를 제외한 일반적인 생활에서 이미성육신 사건 그리스도가 없는 크리스마스의 소비문화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리스도 대신 산타할아버지가 중심에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구두쇠 스쿠루지 영감이야기, 추운 거리에 내걸린구세군의 자선냄비 점점 크리스마스 문화 속에서 사라져 갑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은성탄절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성육신 사건이란 것을 전혀 모를 겁니다. 아이들은 그리스도보다 산타의 선물에 관심을 갖고,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울면 라고 외치며 부모님 속을 썩이지 않는 칭찬받는 아이가 되려 노력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예수는 없고 오직 선물과 파티와 세속적 환락이 자리를 매운 오래됩니다.

 

크리스마스에 성육신의 복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식상하게 생각합니다. 헌신과 순종 그리고 나눔을 얘기하면 매우 방어적으로 몸을 움츠립니다. 그동안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사람들은 복음을 말하면 매우 적대적으로 변했습니다. 종교는 자신의 선택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합니다. 간섭하면 꼰대소리를 듣습니다. 물론 오랜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는 약자들의 편에 서기보다 기득권의 편에 섰던 전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에도 진행 중입니다. 교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성공한 사람들, 부자들이 대접을 받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만 되면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움츠려 들게 됩니다. 더욱이 추운 성탄의 날씨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추위에 기죽게 만들기도 합니다. 년에 성탄절에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봉사하는 사람조차도 선행과 자선을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이렇게 데에는 기독교의 잘못이 큽니다. 그러나 그러한 잘못 보다 사람들의 세속화와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 과속화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 또한 너무나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은 거부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의 성장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영성만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하느님보다 자신의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영성 정말 가능한지 의문스럽습니다. 신심이 없는 영성이 가능한지 의문스럽습니다. 영성은 인간이 절대적인 어떤 진리를 추구할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재산이든, 자신의 능력이든, 자신의 배경이든, 종교의 신앙이든 없이 인간이 추앙하는 욕망이 그대로 분출된 것이 영성으로 형성됩니다. 따라서 추앙하는 없는 영성은 존재할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기 예수의 탄생이야기와 기쁜 소식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예수님은개독교 수괴처럼 사람들에게 취급을 받습니다. 마치 기독교가 자신들의 자유와 독립성을 억압하고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우리를 바라봅니다. 이런 세상에서 성탄은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선포는 무슨 의미입니까? 중요한 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기독교를 손가락질하고 욕을 해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복음의 희망이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그동안 권력과 기득권에 편승하고 세속화되었기에 오늘날 그런 욕을 먹고 있지만, 하느님의 복음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가려지는 빛이 아닙니다. 구름 뒤에 반드시 밝은 해가 있듯이 우리가 잠시 잠깐 그리스도를 욕되게 했지만, 우리 기독교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희망을 말할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사람들이 의미 없게 생각하는아기 예수성육신 여전히 현대 사회에도 절실히 필요한 복음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가장 소외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여전히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여전히 세상이 주는 억압과 차별에 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갈라 4:4-5

 

가난하고 여린 여자의 그리고 연약한 아기. 이를 통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메시지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희망으로 작동될 있습니다. 그분은 가장 낮은 신분으로, 가장 연약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십니다. 그분은 정복자로 우리에게 오신 것도 아니고, 현란한 환상과 요란한 팡파르를 울리며 개선장군처럼 오신 것도 아니며, 우리를 윽박지르고 자유를 강압하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가장 힘없는 어린 미혼모를 통해 가장 낮은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을 품어야 합니다. 이러한 복음의 메시지는 사도 바울로가 고린도전서 1장에 말한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1 고린 1:27

 

낮은 자로 오신 분이 낮은 자들을 부르신 것은 당연합니다. 낮은 자로 오신 분이 낮은 자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약한 데서 오히려 온전하여짐을 깨달았습니다.(2 고후 12:9) 하느님께서 남에게 의존해야만 생존할 있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은 바로 이러한 가장 연약하고 약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여전히 소외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핍박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우리의 복음은 여전히 힘을 발휘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오셨으니 가장 낮은 자들이 가장 귀한 하느님의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가장 낮은 곳에서 온전하게 드러난다면 우리가 그동안 하느님의 뜻과 반대로 살았다는 것이 반증됩니다. 우리는 너무 높은 곳만, 높은 자리만을, 대접받는 자리만을 하느님께 간구하고 살았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으로 높은 곳만 바라보고, 세속적 성공과 행복만을 바라보다 보니 우리는 복음과 반대로 걸어온 것입니다. 아기 예수는 궁전이나 기득권자들에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낮은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들보다 더욱 낮아지셔야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의 탄생의 신비이고, 성육신의 은총입니다. 가장 연약한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은 고난 받는 모든 연약한 사람들을 능히 구원하실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 축복을 위해, 영광스러운 구원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육신의 낮아짐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1 베드 4:16

 

베드로 전서 기자는 이렇게고난의 신학 선포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과 낮아짐이 전제됨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적 가치와 자본주의적 가치와는 전혀 다른 낮아짐과 자기희생과 자기 비하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서 받는 고난을 오히려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이 감당할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잘못된 행실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믿음과 신념, 그리고 복음에 대한 헌신 때문에 오해나 비난을 받는다면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러한 편견과 고난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잠시 잠깐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기 예수를 통해 드러난 성육신은 우리를 하느님과 혈연관계로 이어줍니다. 그분이 성육신을 통해 하느님의 맏아들이 되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기로부터 어미의 젖을 먹고 성장하셨듯이 하느님의 자녀 우리도신령한 먹으며 아기가 성장하듯 그리스도와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루가 2:40

 

성장이 멈춘 아기는 죽을 수밖에 없듯이 성장이 멈춘 그리스도인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 예수는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성장하셨고 지혜가 풍부해졌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고난을 통해 인내 가운데 성장해 가야만 합니다.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마다 우리 자신이 갓난아기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음을 보는 것은 매우 비극이 아닐 없습니다. 성탄절에 아기는 성육신하신 아기 예수로 족합니다. 우리는 매년 성탄절을 맞이하며 성장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말할 수가 없어서 육적인 사람, 곧 교인으로서는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고 젖을 먹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때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아직도 그것을 소화할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육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으니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들이고 세속적인 인간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 고린 3:1~3

 

우리는 성탄절마다 하느님께서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것처럼 우리도 낮은 곳에 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비우려 노력하며 살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 아직 우리 안에 시기와 질투, 탐욕과 아집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아직 영적인 아기 단계에 머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셔서 성장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아기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육적인 사람들이고 세속적인 생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임을 숨기고 그들과 전혀 구분되지 않게 살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해 말하기보다  세속적인 성공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합니다. 복음을 전하거나 희생하는 삶을 살기보다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며 살고 싶어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양도하시고 철저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그분께 양도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와 낮아짐을 멀리합니다. 세속적인 , 자신에게 이득이 있는 일에는 몸이 아파도, 하늘이 무너져도 참여하지만, 봉사하는 일과 낮은 자를 돌보는 일에는 다양한 핑계로 참여하길 꺼립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직 젖을 먹는 아기로 매년 성탄절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젖을 먹어야 성장하는 이를 거부하니 어떻게 성장할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양도하기도 싫고, 세상 속에 완전히 동화되기도 찜찜하고,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어중간하게 양다리를 걸친 상태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오직 자기 자신과 가족의 평안과 행복만을 간절히 원하면서이것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기는 반드시 성장해야 하고, 성장해서 단단한 음식도 먹을 있게 자라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세상과 인간에게 적대적인 낯선 존재가 아니라고”( 로완 윌리암스) 그분은 우리와 가장 친숙한, 아니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가장 낮은 자들이 오히려 높임을 받아야 외쳐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분의 성육신이 자기 비움과 겸손의 본을 보여주신 하느님의 은총이라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로 우리도 그렇게 자기 비움과 겸손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가장 낮은 , 그분 스스로 낮아지신비극의 심연에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성육신을 통해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분은 우리끼리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고, 선물을 나누라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것처럼 서로에게 가장 낮은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신탁에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러한 부르심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러할 우리의 성탄절은 매년 우리의 구원의 성장을 확인하는 시간이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우리가 영적으로 어른이 되어 있을 날이 반드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 아기 예수와 함께 성장해 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성탄1 (나해)

 

본기도

구원의 주님, 성자께서는 빛으로 오시어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빛을 따라 세상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61:10-62:3

10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주셨고
.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주셨다.
.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주셨고
.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주셨다.
11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시온을 생각할 , 나는 잠잠할 수가 없다.

.
    예루살렘을 생각할 ,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     그의 정의가 동터 오고
.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르기까지
.     어찌 잠잠할 있으랴?
2    마침내 민족이 너의 정의를
.     보고 모든 제왕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     야훼께서 몸소 지어주실 이름,
.     사람들이 이름으로 너를 부르리라.
3    너는 야훼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관처럼 빛나고
.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인 왕관처럼 어여쁘리라.

 

 

 

성시_시편 148

1    알렐루야!
.     하늘에서 주님을
.     찬양하여라.
.     높은 데서 찬양하여라.
2    그의 천사들 모두 찬양하여라.
.     그의 군대를 모두 찬양하여라.
3    해와 달아 찬양하고
.     반짝이는 별들아, 모두 찬양하여라.
4    하늘 위의 하늘들,
.     하늘 위에 있는 물들아, 찬양하여라.
5    주님의 명령으로 생겨났으니,
.     그의 이름 찬양하여라.
6    지정해 주신 자리, 길이 지키어라.
.     내리신 법은 어기지 못한다.
7    땅에서도 주님을 찬양하여라.
.     물고기도 깊은 바다도,
8    번개와 우박, 눈과 안개도,
.     당신 말씀대로 몰아치는 된바람도,
9     저산 모든 언덕도,
.     과일나무와 모든 송백도,
10  들짐승들과 가축들도
.     기는 짐승과 나는 새들도,
11  세상 임금들과 모든 추장들도
.     고관들과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도
12  총각 처녀 없이
.     늙은이 어린이 모두 함께
13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     홀로 한없이 높으시고
.     하늘 위에 위엄 떨치신다.
14  당신 백성의 영광을 드높여 주셔서,
.     당신을 가까이 모신 백성,
.     이스라엘 후손들,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갈라 4:4-7

4 그러나 때가 찼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5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6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있게 되었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 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인 것입니다.

 

 

 

복음서_루가 2:22-40

22 그리고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23 그것은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A]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는 것이었고 24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마리[B] 정결례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26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것이다. 27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더니 마침 예수의 부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다. 28 그래서 시므온은 아기를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29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님의 구원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33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아기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분이십니다.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것입니다.”

36 또한 파누엘의 딸로서 아셀 지파의 혈통을 이어받은 안나라는 나이 많은 여자 예언자가 있었다. 그는 결혼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같이 살다가 37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왔다. 38 여자는 예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바로 자리에 왔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이 구원될 날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아기의 이야기를 하였다.

39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자기 고향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A] 2:23 – 출애 13:2.(13:12, 15 참조).
[B] 2:24 – 레위 5:7,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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