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 1. 나해_월요일_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 자정 감사성찬례
민수 6:22-27 / 시편 8 / 갈라 4:4-7 또는 필립 2:5-11 / 루가 2:15-21
“존재로서의 이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우리 성당에는 “나나”라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도 자기의 옆자리를 제게 주지 않았는데, 일년여 기간이 지난 지금은 제가 다가가 쓰다듬고 안아 주는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때론 자기를 쓰다듬어 달라고 저를 부르고 유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아이와 저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제가 조금만 이상한 몸짓을 하거나 표정을 지으면 저를 회피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나나”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데까지 많은 시간을 망설여야 했습니다. 처음에 그 고양이를 “고양이”라 부를 때는 그 고양이는 많은 고양이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 단지 고양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양이를 “나나”라고 부르면서 그 아이는 다른 고양이와 구분되는 고유한 존재로 내게 다가왔습니다.
어느 날 “나나”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아 걱정을 했는데 갑자기 어린 새끼와 함께 나타났습니다. 어린 생명을 데리고 나타난 “나나”는 또다시 경계 태세를 쉽게 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자기 새끼를 보호하고자 했기 때문일 겁니다.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나”는 제게 옆자리를 허용했습니다. 물론 그 새끼 고양이는 여전히 저를 멀리했고 경계했습니다. 새끼 고양이에게 부단히 관심을 보였지만 그 새끼 고양이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관계가 그렇다 보니 저도 그 새끼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데 망설였습니다. 그냥 제 입에서만 옹알이를 하듯 웅얼웅얼 “다다”라고 부르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이름을 부르지 않으니,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니 좀처럼 그 새끼 고양이와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다다”라고 조심스럽게 불러도 아무런 반응도 없이 도망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영영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저도 조금은 아쉬움이 남지만 제대로 부르지 못한 이름은 쉽게 잊히듯이 그 새끼 고양이에 대한 기억도 점점 희미해집니다. 결국 남은 엄마 고양이 “나나”는 여전히 우리 성당을 들락날락하지만, 때론 며칠씩 사라져 없어질 때는 저를 매우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럴 때마다 “나나”라고 소리쳐 부릅니다. 이름을 부르니 정말 안타까운 마음도 더 생깁니다. 이름은 이렇게 한 존재를 다른 존재와 연결시키고 서로의 관계성을 세워줍니다.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어린 영혼들의 죽음. 아기 예수의 탄생과 동시에 벌어진 “유아학살의 이야기”는 모세의 시대와 같이 여전히 권력과 불의에 의해 죽은 어린 영혼들을 기억하게 합니다. 어린 아기들은 바로 그러한 존재들입니다. 사랑스럽고 귀엽지만, 너무 연약해서 자기 방어력도 없고 누구를 의존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아기에게는 엄마가 있어야 하고, 아빠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보호와 사랑은 당연하지만, 그러한 보호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죽어간 아기들은 모세의 시대에도, 예수의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자신이 낳은 핏덩어리를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린 사건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 충격을 안겨줍니다. 헤로데의 유아살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우리 주변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 아기를 버린 어린 미혼모에게 자신의 몸에서 난 아기는 단지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었습니다. 생명을 감당할 수 없는 데, 생명을 낳았으니 너무 두려웠을 겁니다. 두려움과 수치가 아기에 대한 사랑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으니 아기와 미혼모 간에는 어떠한 관계성도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유전적인 관계성이 그 아기와 산모의 관계성의 전부였습니다. 이름을 부를 수 없다면 더이상 사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기를 쓰레기 봉투에 넣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헤로데의 명령을 받아 아기를 죽인 사람들도 이름 모를 어린 아기를 죽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관계성이 세워지지 않으면 두려움이 늘 관계성과 인간성을 짓누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 관계성이 없는 곳에서 인간은 가장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짓는다는 것,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은 한 존재를 존재하게 하고, 한 존재를 관계성 속에 세워줍니다. 이름이 없으면 존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유령과 존재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담이 하느님의 창조 이후에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이름을 붙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담이 동물 하나하나에게 붙여준 것이 그대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 창세 2:19 b
아담이 각 존재에게 고유명사로 부르니 각각의 존재들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은 존재의 관계성입니다. 이름이 곧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여러 동물을 하나씩 소개하신 것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함께 이름을 통해 생태계라는 관계성을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타자의 이름을 부르거나, 자신의 이름이 불려질 때 우리는 “내”가 있음을 알고, 타자가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관계성 안에 존재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태중의 아기는 자신을 부르는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로 자신의 있음을 인지합니다. 이름은 그러한 것입니다. 부르고 불려지면서 사랑의 관계성을 쌓는 것.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면 제일 곤란할 때가 반가우면서도 이름이 금방 생각이 나지 않을 때입니다. 그 만난 사람의 가족의 안부가 궁금하지만, 그 자녀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너무 당황스럽고 미안한 생각마저 듭니다. 반대로 만난 사람이 나의 이름과 가족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해 주면 그 사람이 너무 다르게 느껴지고 고맙기까지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쇠퇴하면서 이런 긴장감이 늘 저를 따라다닙니다. 이름은 그러한 것입니다. 이름은 관심의 표현이고, 사랑의 표현입니다. 단순히 기억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억력이 받쳐주면 더 좋겠지만 말입니다. 이름은 존재를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한 인정이기도 합니다.
이름에는 인격이 있고 또 사람의 존엄이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은 존중받지 못하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도소에서는 사람들의 이름이 박탈되고 대신 “번호”로 불려집니다. 번호로 불려지는 순간 그 사람은 인격이 아니라 물질이 됩니다. 사람이 물질이 되는 순간 사람은 “감시와 처벌”(미셀 푸코)의 대상이 됩니다. 교도관들은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을 숫자로만 기억합니다. 숫자와 한 존재 간에는 어떠한 인격적인 관계도 형성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교도소에서는 익명성이 어쩌면 서로에게 더 편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이름이 없는 곳에는 존재의 있음이 힘을 잃게 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교도소의 인권이 많이 좋아졌지만, 세계에 많은 고립된 교도소들은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유입니다. 이름이 없는 곳에서는 은밀한 죄가 성립될 가능성이 큽니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이미 수태고지 때부터 천사로부터 이름을 계시받았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는 예슈아(יֵשׁוּעַ) 또는 예호슈아(יְהוֹשֻׁעַ)라는 이스라엘의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예수입니다. 이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이에수스(Ἰησοῦς)”라는 헬라어로 불려지면서 ‘예수’로 음가가 바뀐 것입니다. 그 뜻이 의미심장한데, “하느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당시에 다른 여호수아와 구분하기 위해 예수의 출생지를 붙여 “나자렛의 여호수아”가 된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는 난지 8일 만에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하느님께 온전하게 봉헌했습니다. 할례를 받았으니 하느님의 첫 배의 열매임이 증명됐고, 이름을 받았으니 이제 온전한 존재가 됐습니다. 성육신의 모든 조건이 갖춰진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말씀이 완전한 육신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점령군처럼 군림하는 왕으로서 성육신 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아기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이 성장의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서 자라나듯이 아기 예수도 모든 인간의 성장 과정을 똑같이 밟게 됩니다.
성육신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이름을 명명한 것은 루가복음의 기록뿐입니다. 이로써 루가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누구인지를 이름을 통해 선포합니다. 또 우리가 누구와 함께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를 제시합니다. 여호수아가 광야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듯이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약속의 나라로 나아갈 것입니다. 한 해의 시작을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아기 예수를 부르며 그와 관계성을 우리 안에 세우고 그분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완수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그분도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요엘 2:32 / 로마 10:13)는 요엘서의 말씀이 성취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전하지 않는데 누가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의 이름을 들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의 이름으로 파견받고 그의 이름으로 소명을 받고도 헌신하지 않는 데 누가 그를 위해 봉사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실존은 늘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젖을 먹는 아기의 단계에 머뭅니다. 세례를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새로운 존재로 세움을 받은 사람은 성육신이 성장하듯이 성장해야 하는 데 전혀 성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이름이 우리의 입에서 사라져 갑니다. 그의 이름대신에 우리는 다른 이름을 부르며 우리의 실존 속에 허덕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지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나는 온종일 내 팔을 벌려 이 백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거역하고 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로마 11:21
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온종일”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외면하지만, 그분은 늘 태양처럼 한결같이 우리를 비추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찾고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직도 우리가 그 이름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함께 부르며 서로의 존재를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해의 시작을 그분의 이름과 함께 시작함으로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온전히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름은 존재를 세워줍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시니 우리가 존재가 된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부르면서 그분이 우리에게 임마누엘로서, 또 우리의 든든한 구세주로서 우리 안에 깊이 각인되길 기원합니다. 올 한 해를 예수의 이름으로 강건하시길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1.1.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
본기도
영원하신 성부여,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성자께서는 우리 구원의 표지로 예수라는 이름을 받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위하여 율법에 순종하신 성자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하시고 주님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선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민수 6:22-27
22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말로 복을 빌어주라고 하여라. 24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 25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 26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면 내가 이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성시_시편 8
1 하느님, 우리의 주여! ◯
. 주님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 주님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
. 어린이, 젖먹이들도 노래합니다.
2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
.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3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
.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
.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5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
.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
.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7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
.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 하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
.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 하느님, 우리의 주여! ◯
. 주님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필립 2:5-11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10절 – 이사 45:23 참조
복음서_루가 2:15-21
15 천사들이 목자들을 떠나 하늘로 돌아간 뒤에 목자들은 서로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 사실을 보자.” 하면서 16 곧 달려가 보았더니 마리아와 요셉이 있었고 과연 그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었다. 17 아기를 본 목자들이 사람들에게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이야기하였더니 18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 일을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19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20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째 되는 날은 아기에게 할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그 날이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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