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11. 나해_연중6주일(병자를 위한 기도일) 감사성찬례
열왕하 5:1-14 / 시편 30 / 1고린 9:24-27 / 마르 1:40-45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감”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인간은 자신이 닮으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인간에게는 ‘초월적 본성’이 있다고 교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이 끊임없는 앎이나 선의 추구를 통해 이데아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레고리우스는 그러한 길을 차단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의 경험으로, 인간의 깨달음으로 그러한 초월에 다가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끊임없이 초월을 향해,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절대자의 존재와 본질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대자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무한’을 얻는다고 정의합니다. 참 어려운 말이지만 단순히 정리해서 말하면 인간 편에서 하느님께 나아갈 길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 경험, 믿음 어떤 것으로도 인간은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동방정교회의 “부정 신학(apophatic theology)”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서구의 “긍정 신학(kataphatic theology)”과 다른 기독교 사상의 핵심을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교부는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은 ‘지식’으로는 알 수 없으며 돌이킴, 삶과 행동을 순수하게 갈고닦는 과정에서 발견하고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보다 조금 앞 서 가시는 그분의 ‘등’만을 볼 뿐입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그분의 등을 봤던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의 종착점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면 알 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욱 모르게 되는 역설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고린 8:2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그분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진정한 신앙적 앎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앎과 경험을 반성하고 부정하면서 편견 없는, 선입견 없는 완전한 ‘자기 비움’과 ‘자기 비하’ 속에서 우리는 그분에게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길에서 우리는 그분의 ‘등’만 볼 뿐이지만, 우리 인간에게 선재하는 ‘초월적 본성’이 그러한 길을 열정을 가지고 갈 수 있게 도와줍니다. 또한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한계 지점에서 우리를 일으키셔서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추동하십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부하의 조언대로 자신을 비우고 매일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가 나아간 것은 단순히 요르단 강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의 등을 바라보며 앞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매일 목욕을 해야 하는 반복되고 지루한 일상이 그에게는 가장 큰 어려움이었을 겁니다. “일곱 번”이란 숫자는 완전 수임으로 단순히 양적인 ‘7’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의 정성이 완전에 이를 때까지 인내하고 매일 “앞을 향해”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누구보다도 하느님 체험을 많이 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분의 빛을 봤습니다. 물론 그 빛 때문에 시력을 잃고, 오직 그분의 음성만 듣게 됩니다. 그런 사도 바울로도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내가 남들에게는 이기자고 외쳐놓고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 고린 9:27
그는 운동선수가 경기를 위해 매일 자신을 단련하고 훈련을 시키듯이 구원의 완성을 향해,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매일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남에게 말해놓고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구원을 완성해 간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사실 지겨움의 연속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정들은 결코 멈출 것 같지 않고 끝이 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상에 멘붕 상태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의미를 전혀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탈을 꿈꾸게 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숨어 있다고 오늘 사도 바울로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매일 조금씩 반복되는 기도와 말씀 읽기, 신앙의 훈련과 사랑의 실천, 작은 친절과 관심 등… 이러한 소소한 것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그것은 늘 우리 앞에 주님께서 한 발 앞 서 걸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것”은 우리 보다 앞 서 가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곧 “앞에 있는 그분”을 따라 매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를 따라가는 삶은 결코 그 종착점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 길은 지루하고 고되며 어려운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길에는 우리의 흥미를 유발하는 어떤 것도 없을지 모르고, 광야처럼 밋밋하고 허무한 느낌뿐일지도 모릅니다. 그 길은 어떤 영광도, 칭찬도, 위로도 보장되지 않는 즐겁지 않은 길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초월과 내재의 아이러니한 긴장감이 늘 존재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실존 가운데 역설적인 말로 들립니다. “자유로의 부름은 약속이자 희망이지만, 동시에 가혹하고 위협적인 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실존 가운데서 두려움과 불확실성이 우리를 뒤흔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고, 그분의 뒷모습만 겨우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주님보다 너무 떨어지면 따라 잡기도 버겁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등을 항상 따라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간헐적인 신앙의 깨달음, 의무에 의한 예배 참석, 찬양의 기쁨, 은총의 환희, 기도의 응답보다 개인의 삶 전체에 스며드는 “사랑과 열망, 행위와 실천”을 통해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깨달음은 찰나이지만, 마이스트 에크하르트가 표현한 대로 “하느님 됨” 즉, “신화”를 향한 길은 멀고도 지루하며 인내를 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를 만난 나병환자는 자신의 처지와 사회적 편견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유대 율법대로 사람들에게 “물러나라”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존재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존재로 소외 속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과감하게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갈” 때 그 앞에 서계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불평하기보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보였고, 그분의 뜻을 먼저 구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병에 대해 전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하고자 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마르 1:40
그는 자신이 치료받고 치료받지 못함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달렸지 자기의 요청이나 희망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고치시든, 고치시지 않든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분의 본성이신 “자비”에 의지하여 요청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자비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분이 어떤 처분을 내리시든 불평하지 않고 ‘아멘’ 할 수 있는 믿음이 오늘 나병환자가 보여준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마르 1:41
이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의 마음이 측은한 마음이 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병환자의 믿음과 고백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끌어냈습니다.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로마 9:15
자비는 전적으로 그분의 전권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그래서 은총이 은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행위를 해서 자비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비하시기 때문에 자기 결정을 하신 바로 그 순간, 자비를 우리는 은총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믿음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의 자비 때문입니다.
기도란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원대로 움직이는 조종관이 결코 아닙니다. 기도는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정성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행위로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단지 기도하고 그분을 따를 뿐입니다. 기도 응답은 그분의 전권에 달려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분의 명령에 우리는 순종할 뿐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조건도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오직 그분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헌신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길 위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아픈 사람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치료하는 의사도 아니고,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픈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위로의 말과 정성도 꾸준한 기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것. 아픈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함께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될 때까지 매일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정성을 다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행 할 바입니다. 누가 압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지? 우리가 매일 읽는 시편은 그러한 약속들로 넘쳐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의지하여 우리의 몫에 최선을 다해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절대 지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믿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매일 나아갑니다. 그리고 아프신 분들은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라는 말을 상기하시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이 스스로 포기해도 우리는 여러분을 위한 기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꾸준함과 정성이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의 아픈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6주 (나해)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나눔과 섬김을 통해 어려움 속에 있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열왕하 5:1-14
1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으로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왕이 매우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야훼께서 나아만을 들어 쓰시어 시리아에 승리를 안겨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병환자였다. 2 시리아 군이 이스라엘을 쳐들어갔다가, 한번은 거기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나아만 장군은 그 소녀를 아내의 하녀로 삼았다. 3 그 어린 하녀가 자기의 주인에게 일렀다.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시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그가 나병쯤은 쉽게 고쳐주실 텐데요.” 4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은 입궐하여 왕에게, 이스라엘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더라고 아뢰었다. 5 이 말을 들은 시리아 왕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써줄 터이니, 장군은 가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십 달란트, 금 육천 세겔, 옷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왕의 친서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하였다. 그 친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본인은 이제 이 편지를 들려 본인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주십시오.” 7 이스라엘 왕은 이 서신을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달라고 하니, 이것은 그가 나에게 싸움을 걸려고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대들은 이 점을 분명히 살피시오.”
8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나에게 보내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겠습니다.” 9 그리하여 나아만은 마차를 몰고 엘리사의 집에 이르러 대문 앞에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사람을 내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그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그리하면 새살이 나서 깨끗하게 될 것이오.” 11 나아만은 화가 치밀어 발길을 돌리면서 말하였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그가 나에게 나와서 자기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이 나병을 고쳐주려니 했다. 이럴 수가 있느냐? 12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의 어떤 강물보다도 더 좋은 아바나 강과 발바르 강이 있다. 여기에서 된다면, 거기에 가서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크게 노하여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를 막아 서며 말하였다. “만일 이 예언자가 더 어려운 일을 장군께 시켰더라면 장군께서는 그 일을 분명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장군께 몸이나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러자 새살이 돋아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 몸처럼 깨끗해졌다.
성시_시편 30
1 주여,
. 나를 건져주셨으니
. 높이 받들어 기리나이다. ◯
. 원수들이 나를 보고
. 비웃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 나의 주 하느님,
. 살려 달라 외치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
.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주셨습니다.
3 주여, 내 목숨 지하에서 건져 주시고 ◯
. 깊은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려주셨습니다.
4 주님을 믿는 자들아, 찬양노래 불러라. ◯
.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감사기도 바쳐라.
5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요
.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니 ◯
.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
6 마음 편히 지낼 때에는 스스로 말하기를 ◯
.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7 나를 어여삐 여겨,
. 산 위에 든든히 세워 주시던 ◯
. 주께서 외면하셨을 때는
. 두려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8 주여, 이 몸은 당신께 부르짖으며, ◯
. 당신의 자비만을 구하였습니다.
9 이 몸이 피를 흘리고 땅 속에 묻힌다 해서 ◯
. 당신께 좋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 티끌들이 당신을 찬미할 수 있으리이까? ◯
. 당신의 미쁘심을 알릴 수 있으리이까?
10 주여,
. 이 애원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소서. ◯
. 주여, 부디 도와주소서.
11 당신은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 춤으로 바꿔 주시고 ◯
. 베옷을 벗기시고
. 잔치옷으로 갈아입히셨습니다.
12 이는 내 영혼이 끊임없이
. 주님을 찬미하라 하심이니 ◯
. 주, 나의 하느님,
. 그 은총 노래에 담아 영원히 찬양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9:24-27
24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여러분도 힘껏 달려서 상을 받도록 하십시오. 25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을 하되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권투를 하되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내가 남들에게는 이기자고 외쳐놓고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서_마르 1:40-45
40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41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42 그는 곧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43 예수께서 곧 그를 보내시면서 44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 하고 엄하게 이르셨다. 45 그러나 그는 물러가서 이 일을 널리 선전하며 퍼뜨렸기 때문에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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