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담론으로서의 미술
채 야고보
“예술은 종종 시대를 서투르게 모방하지만 결코 시대를 앞질러 가지는 못한다.” –아놀드 하우저[1]-
[들어가는 말]
미술!
모두에게 친숙한 단어이지만 반면 모두에게 의미 있게 느껴지는 단어는 아닌 듯싶다. 미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미술 애호가들은 나름대로 이에 대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술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지 때문에 그렇겠지만, 아직도 미술관의 문턱을 쉽게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더욱이 미술작품을 소유한다거나 정기적으로 미술관을 방문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한국사회에서, 저소득층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가난한 민중일수록 미술작품을 대하기가 더욱 힘든 것일까? 이는 가난이 원인이라는 건데 필자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보다 GNP가 더 낮은 인도에서도 가난한 서민들이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미술관을 찾고 인쇄물이긴 하지만 작품사진을 집에 소유하고 있기도 했다. 시선을 우리에게 집중해서 가난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을 잠시 들여 다 보아도 그들이 풍류를 즐길 줄 알고 또한 탱화나 민화들을 감상할 줄 알았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가난하기 때문에 미술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미술과 민중의 괴리현상은 민중의 삶 속에 미술작품을 소비하고 감상하는 미술문화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술작품에는 감상자(또는 소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인데, 물론 미니멀 아티스트들은 이러한 생각조차 거부하기도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진행되는 미술은 ‘미술을 위한 미술' 또는 ‘작가를 위한 미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한 구석도 민중이 파고들 여지가 철저히 배제된다. 이러한 미술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극히 제한 적일 수밖에 없다. 민중이 현대미술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습'과 '겸손'이 반드시 요구된다고 혹자는 주장한다. 한마디로 민중은 작품과 작가 앞에서 겸손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미술의 배후에는 반드시 특권 계층이 존재하는 법이고 전적으로 이 미술은 소위 유식(?)하거나 부유한 이들의 점유물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그들의 목적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결과적으로,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층과 이해하지 못하는 층을 나누어 분리의 벽을 만들고 자신들의 특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있다. 작가들은 유식한 체 하면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며 조금이나마 엘리트 계층과 가까이 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듯싶다. 미술사를 들여 다 본다면 각 시대별로 미술을 지배해온 계층이 결코 민중이 아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술은 항상 특별한 계층의 권익을 대변하거나 상징하는 목적에 충실해 왔다. 미술가들이 미술가로서 이름을 내걸 수 있게 된 것도 15세기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그 특정계급의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진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 구조에서 벗어난 미술가는 그만큼 자유를 얻은 대가로 생계의 고통을 짊어져야만 했다. 가난하고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적인 작가상은 이러한 소수의 자유자들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이는 오늘날 가난한 미술가들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미술의 주류 속에는 늘 '권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글에서 각 시대별로 미술사에서 나타난 미술 배후의 지배적 권력이 미술을 어떻게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는데 이용해왔는지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앞서 언급한 것 같이 ‘민중과 미술의 괴리현상'의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해결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에 앞서서 이 글의 한계를 분명히 밝힌다. 이 글은 미술사적으로 반론이 제기될 여지가 있는바 학술적 검증과 연구가 아직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초고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의 범위는 서양미술사에만 국한된다. 그 이유는 현대미술을 지배하는 미술이 서양 미술임으로 권력의 구조 속에서 이를 살펴보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이 글의 범위를 더 넓히기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있는바 이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 놓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 권력 담론에서 빠질 수 없는 주체의 문제도 미술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제외시키려한다. 미술의 배후에 지배 권력이 늘 존재했지만 그들이 미술을 이용하는 자는 될 수 있어도 결코 미술의 주체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미술가와 미술 작품의 그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특별한 구분을 두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가 없는 작품도, 반대로 작품 없는 미술가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미술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술의 주체가 미술가인가, 아니면 작품인가, 아니면 감상자(혹은 후원자) 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 미술의 조형성과 양식에 대한 언급을 생략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미술양식사라는 또 다른 범위이고 이에 대한 많은 책들이 존재하는바 여기서는 생략하고 그냥 넘어 가고자 한다.
이 글은 미술의 사회적 기능성과 미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면서 ‘권력 담론'의 구조 속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이 '권력'이란 것이 마르크시즘에 의하면 정치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푸코에게선 모든 사회구조 속에 존재하는 '지배적 힘'을 뜻하므로 딱히 이 권력 담론이 정치적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나는 권력에 대한 푸코의 분석에 의존해서 각 시대 별로 미술이 어떻게 사회지배 이데올로기에 기여해 왔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는 사회학적인 접근법이다. 그리고 미술의 보편성과 기독교의 보편성을 연결하고자 하는데 이점에서 민중 신학과의 만남을 시도할 것이다. 끝으로 덧붙일 것은 용어 사용에 있어서 혼돈을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예술가'는 '미술가' 즉 화가를 의미하는데 한정한다. 물론 '예술'에 대한 논의도 미술 분야에 국한되었음을 밝힌다.
[1]
“미술은 시처럼 하나의 ‘이념’을 표현할 수 있다. 예술은 또한 이념에 형상을 부여하지만, 그 형식은 재질, 기법, 도상 – 또는 그 이념이 표현되는 상징이나 방식- 에 의해 결정된다.” -진 A. 빈센트-[2]
헝가리 태생의 저명한 철학자인 아놀드 하우저는 ‘예술가는 대부분 그가 사회 생활 속에서 행사하는 역할의 피조물’[3]로 규정하고 사회 구조 속에서의 예술가의 역할을 우리에게 환기 시킨바 있다. 각 시대 별로 예술가에게는 고유한 역할이 주어졌으며 그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부여한 존재들이 늘 그들의 후원자로 존재했다. 결국 직접이든 간접이든 자신의 충동에서든 타인의 충동에서든 예술가는 명시된 선전이나 잠복적인 이데올로기의 운반자로서 영향력구사의 수단인 것이다.[4] 예술은 분명한 목표의 산물이다. 이러한 예술을 수용하는 것도 원래 목적된 담론의 발생근거와 그 효력의 최종목표로부터 결코 해방될 수 없다. 예술가, 작품 그리고 예술 수용자(혹은 후원자)는 각 시대별로 요구되는 분명한 사회적 목적에 의해 관계 지어지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 미학의 근본원리는 예술도 철학이나 과학과 같은 활동 분야들처럼 사회와 역사의 조건들 특히 경제요인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5] 마르크스는 예술문화의 모든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임무라는 견지에서만 올바르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6] 이와 같이 예술이 사회의 주도적 이데올로기를 필연적으로 반영하게 된다는 전제로부터 예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선전이라고 보는 전반적인 개념이 추론 된다.[7] 이에 러시아 구조주의 작품에서는 ‘선동적’이고 ‘혁명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다. 마르크스 미학자인 프레하노프(G.V. Plekhanov)[8] 삶으로부터 예술을 분리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맹렬히 공박했다.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은 예술작품이란 없으므로‘예술을 위한 예술’의 지지자들은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가 존속하는 사회질서를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옹호하게 되며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예술의 퇴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치적, 사회적 요인의 갈등 속에 미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각 시대별로 미술이 어떻게 이러한 요인들과 결합해 왔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나는 여기서 아놀드 하우저의 사회학적인 미학에 많이 의존했음을 미리 밝힌다.
먼저 선사시대부터 살펴보자. 이 당시의 미술을 ‘주술적(呪術的) 미술’이라고 미술사가들은 정의한다. 실제로 당시의 미술 작품들은 사람들이 쉽게 감상할 수 있는 곳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아주 어둡고 캄캄한 동굴 속에 주로 그려졌다. 이는 원시인들의 사냥에 대한 주술적 기원을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라는 증거이다. 그래서 그림의 대부분이 생계에 도움을 주는 커다란 산양이나 들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는 커다란 동물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9] 다시 말해서 동굴벽화의 비유적인 묘사는 오늘날 쥐덫을 놓거나 수면제를 복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적의식을 갖고 고안되어 사용되었던 일종의 ‘덫’으로서 동물을 잡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선사시대의 예술은 실제적 관심과 미적관심이 불가분으로 합일되어 있다. 예술은 단순히 생활을 돕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을 보충하는 부분이며 실생활의 직접적인 표현인 것이다. 효과가 충만한 예술 및 주술 수단의 생산은 처음에는 틀림없이 카리스마적인 재능의 관념과 묶여져 있었다. 결국 예술가는 결코 마술사로 간주되지 않은 채 마술적 목적에 이용되었음에 틀림없다.[10] 주술자의 카리스마에 의한 지배권력은 예술가의 손에 의해 실재로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신기를 표현한 권력에 사람들이, 두려움이나 또는 기복의 염원에 의해, 절대적으로 순종했음은 당연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 이 당시의 미술을 정의 한다면 ‘주술적 권력의 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도판 1]
다음은 이집트 미술이다. 이 당시의 미술은 ‘사자(死者)를 위한 미술’[11]로 너무 잘 알려져있다. 이집트 미술을 대표하는 피라미드나 스핑크스는 당시의 왕의 절대권력이 어떠했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그리고 한낮 무덤에 불과한 피라미드에 그토록 많은 국력을 소비한 것을 봐서도 그들의 예술이 죽은 자에게 초점이 맞춰있고 또한 이를 통해 절대 왕권을 표현한 것임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미술가들은 왕이 죽은 후에 그림 속의 형상으로 영원히 산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사자의 형상을 완벽하게 재현하는데 주력했다. 이는 오늘날의 리얼리즘적인 작품과 같은 형식을 취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체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들을 두각을 나타내서 가장 완벽한 조형성을 찾으려 했다. 예를 들어 얼굴은 측면으로, 눈은 정면에서 본 모습으로, 몸은 정면으로, 다리는 옆에서 본 모습으로 각각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들을 감상할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두운 무덤의 내벽에 묘사된 작품들은 오직 ‘사자(死者)’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불후의 존재를 기리고 그들의 현세의 대변인의 사후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바쳐진 것’[12]이다.
이외에도 예술 작품들은 대체로 제신에게 바치는 봉헌물과 제왕을 위한 기념물, 제신과 통치자의 제식 때 쓰는 소도구들의 생산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민중은 이 예술의 수혜자로서 철저히 배제된다. 이 모든 것들로 미루어 당시의 미술은 ‘사자를 위한 미술’을 통하여 절대 군주의 권력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엄청난 기념물을 소유한 자는 불후의 생명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로서 모든 백성과 나라들은 이러한 절대 권력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의 절대 권력에 의해 탄생한 작품들이 아무리 웅장하고 예술적 가치가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그 속에 뿌려진 많은 민중의 피와 땀이다. 그들은 그 예술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으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이집트 미술은 역사 속에서 전적으로 폭력에 의해 이루어진 예술이라는 오명을 결코 지울 수 없을 것이다.[참고 도판 2와 3]
도판 3. 왼쪽으로부터 멘 카우 하(기원전 2470년경), 카프라(기원전 2500년경), 쿠프 (기원전 2530년 경)의 피라미드. 이집트
서양 미술의 황금기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로 가보자. 우리는 먼저 이 시대가 농촌이 아닌 도시의 시대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자연과 분리된 도시 생활 속에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연 앞에 미약하기만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도시 생활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했고 대신 인간 자신들의 능력에 점점 자신감을 갔기 시작했다. 그리스 문명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문명이었다. 이 이전의 미술이 공공의 것이었고 신관에 속해 있었다면 그리스 미술은 인간 개개인에 중점을 둔 개인주의였다. 신분이 아주 낮은 시민들도 도시국가의 생활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보통의 시민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지배적인 정치체제가 된 군주독재는 종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인주의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었고 따라서 민주정치를 향하는 과도기를 이룬다. 독재군주는 상업 제후들로서, 르네상스시대의 예술 후견인들처럼 외형적인 광채의 힘을 빌어 그들의 집권의 불법성을 그럴싸하게 기만해 보이려고 애를 쓴다. 그들의 궁정은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의 중심지이며 모든 예술 생산의 집산지였다. 성화(聖畵), 묘석, 봉헌물과 같은 성스러운 예술품의 주문자들은 이미 성직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독재군주와 시 행정 기관이며, 비교적 세속적인 생산품에 대한 주문자는 부유한 일반 시민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결코 마술적이거나 행운을 가져다 주는 사명을 지니고 있지 않고, 비록 그것들이 성스러운 목적에 사용된다 해도 그 자체가 성스러워지고자 하지는 않았다.[13] 예술이 종교나 주술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목적에서 해방된 예술의 발단과 더불어 부분적으로는 목적에서 해방된 예술, 곧 예술 자체와 순수한 아름다움을 위한 일종의 미적인 형식언어가 발생한다.
이러한 개인주의 양상은 헬레니즘 시대로 가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미술은 만인의 언어로 만인에게 전달하는 로마의 국민예술의 전형적인 형식이 되었다. 회화가 이 같은 대량생산으로 이루어진 예는 일찍이 한번도 없었고, 이같이 통속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고 이같이 무분별한 수단으로 추진된 적도 결코 없었다. 모름지기 대중을 향해서 대중에게 알리고 영향을 행사하려는 자는 누구나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매체가 되는 그림 속에서 가장 잘 그것을 수행할 수 있었다. 개선한 사령관은 초상 현수막을 들고 다니게 하며, 원고와 변호인은 법정에서 초상을 이용하고, 신자들은 그들이 다행스럽게 빠져 나온 위험을 보여주는 봉납화를 바쳤다. [14]
이 그리스 · 로마 시기의 예술 생산 방식이 스승과 제자, 명인과 조수, 연로한 작업인과 젊은 작업인 사이에 노동이 분화되었다. 사회적 각 계층의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제작을 의뢰했다. 왕은 자신의 신적인 권위를 높여줄 작품을 원했고 귀족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조각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작품을 존경하고 작품의 생산자를 경시했다. 고전주의적인 고대의 지배층과 그들의 철학을 위해서는 ‘여가의 충만'이 여전히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15] 미술 작품 또한 그들의 이러한 ‘여가’에 봉사해야만 했다.
이와 같이 그리스 · 로마의 미술은 개인주의에 입각한 ‘인간을 위한 미술'로 정의할 수 있다. 과거와 같이 특정인만을 위한 미술에서 도시민들을 위한 미술로 그 역할이 달라졌다. 미술은 왕이나 귀족의 권력과 부귀의 상징이나 여가를 위해 제작되었고 또한 도시민들의 삶의 다양한 요구에 의해 제작되기도 했다. 미술품의 수혜자들은 다양한 각자의 요구에 따라 작품 제작을 의뢰했다. 여기에는 단순한 심미적인 목적도 포함되기도 했다. 예술에 있어서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샘이다. 그러나 가난한 농촌의 민중에 까지 이러한 혜택이 많이 주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시를 벗어난 농촌에서는 예술의 혜택이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음은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품을 생산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비용과 권력이 분명 필요했기 때문이다.[참고 도판 4, 5]
‘인간을 위한 미술'은 중세에서는‘신을 위한 미술'로 바뀌게 된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예술은 다시 하느님 권력을 빌린 세속적인 통치자에게 봉사하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고대 정신과 그것의 감각주의 및 기념주의가 교회예술에 등장하게 되었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이미 황제와 같은 위엄과 고귀한 원로원 의원과 같은 표정들로 묘사되기도 했다. 비잔틴예술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너무나 급속히 진행되어서 궁정예술과 교회예술 사이에 차이점을 전혀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정교합일주의 형식으로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책임자를 단일화하는 것은 단지 일반적인 발전의 템포와 경향을 촉진시킬 뿐이다. 그 예술적 사명은 무제한의 권위와 초인간적인 권력과 초자연적인 은총의 수단을 표현하는 데 있다. 신하의 충성심을 부당하게 요구하는 정교합일주의는 신자와 신하들의 환상에 가능한 한 고무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 감명 깊은 형식으로 위장하거나 교회와 궁정의 봉사를 신비적인 의식 뒤에 은폐해야만 했다.[16]
하우저는 ‘금욕주의적이고 전제적인 지배 하에 있는 생활 질서의 형식주의와 정신적이고 세속적인 계급의 대표적 스타일은 항상 동일한 것이며 이는 교회적, 궁전적 강요문화에 일치하는 엄격한 예술적 규율을 규정한다(ex. 비잔틴 예술과 바로크 미술 비교)'고 했다. 황제는 이러한 예술의 최고의 보호자이며 소위 좀더 까다로운 예술작업을 시키는 유일한 주문자로 등장한다. 여기서 황제의 영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가 일치하는 작품이 등장한다.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에 대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두 사람이 다 같이 후광에 비쳐지고 있으며 유스티아누스의 12명의 신하들은 12사도를 연상케 한다.[17] [참고 도판6]
도판 6.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시종들 ( 서기547년경. 모자이크. 이탈리아 라벤나, 성 비탈레 성당)
수도원이 국가와 교회의 정신적 중심점이 되면서 기독교 예술은 로마네스크 시대 동안 승려예술로 머물렀고, 그것은 비잔틴 예술과 근본적으로 동질적이며 지속적이었다. 단지 예술의 활동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농촌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러한 농촌 문화도 수도원에 국한된 것이고 도시와 비교해 볼 때 대단히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소외된 문화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교회는 생활의 모든 영역을 신앙과 직접 결부시켰고, 교회의 우선권으로부터 예술 활동의 비중과 한계를 결정하는 권리를 유도해 내었다. 이러한 종류의‘권위 내지 강제 문화'의 테두리 속에서 만이 초기 중세 예술에서와 같은 동질적이고 일의적(一義的)인 형식 언어가 발전되고 주장될 수 있었다.[18]
로마네스크 예술의 몰락과 더불어 봉건적인 경제 질서와 사회질서가 흔들리게 됨에 따라 중세 전성기의 화폐경제와 교통경제가 시작되고 수공업과 상업을 경영하는 새로운 도시 시민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고딕 예술 시대가 등장한다. 문화 활동의 중점이 평면적인 시골에서 다시 도시로 이동한 것은 예술의 양식변천에 기초가 되는 특이한 존재조건의 형성을 위한 결정적 요인이다. 기원후 12세기부터는 기존생산자 외에 독립적이며 규칙적으로 노동하는 수공업자 계층과 하나의 독자적인 직업신분을 형성하는 전문적인 상인층이 생겨난다. 수도원예술 또는 귀족예술이었던 이전의 낭만주의와는 반대로 고딕 대사원의 예술은 본질적으로 도시 및 시민 예술이다. 그 이유는 교회 군주가 자력으로 그것을 지불할 능력이 없을 경우 도시의 자본 없이는 건축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19] [참고 도판 7] 방랑기사, 음유악인, 보헤미안 등이 등장한 시기도 이 시기이며 예술가들도 점점 교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서막을 준비했다.
도판 7. 하박국 ( 서기 1220년경. 스테인드 글라스 창. 높이 427cm. 부르즈 대성당)
정리하자면 이 중세는 끊임없이‘신의 영광'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엄숙함과 화려함이, 마치 이 지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것인 냥,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감동시키며 절대 신권에 순종하게 만드는데 예술이 커다란 역할을 했음은 자명하다. 정교합일주의에 입각한 이러한 경향은 인간의 권력에 대한 절대 순종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이러한 중세의 예술의 배후는 늘 막강한 왕권과 교권이 존재했다. 민중은 천상의 것으로 가장한 예술에 경의를 표해야 했고 그러한 예술을 있게 한 왕과 교회에 절대 순종을 해야 했다. 문맹의 민중들에게 이러한 그림들이 어떻게 다가갔을지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화려한 중세미술은 민중의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며 자연스럽게 교회에 순종할 양심을 움직였음이 분명하다. 중세 미술의 양식적인 아름다움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예술이 종교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동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2]
중세기 800여 년 동안 지배해온 정교합일의 권력은 자연과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생각이 점차로 확대되면서 그 최후를 맞이한다. 이러한 새로운 기류는 14세기 이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르네상스'에서 발견된다. 예술은 비로소 개인적인 필요성과 오락적인 취미 및 합리화를 향한 일반적인 경향에 부합해서 좀 더 세속적인 성격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역사회화와 신화회화, 또는 초상화 같은 교회와 무관한 새로운 장르가 생겼을 뿐 아니라 종교적인 서술도 점점 세속적인 모티브를 수용하게 된다. 14,5세기의 이탈리아 자유도시에서는 대체로 교회 당국 스스로가 까다로운 건축 예술품의 위임자가 되지 않고 시민 출신의 대리인, 즉 한편으로는 지방자치 단체, 대동업조합과 성직수사단체,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기부자, 재산 있고 세력 있는 가문이 위임자가 됨으로써 세속화 과정이 촉진된 것이다. [20] 이러한 환경 하에서 세계와 예술은 또 한 차례 커다란 변혁을 겪게 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세상을 더 이상 신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게 되었으며 인간 자신의 눈과 관점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평면 회화에서 '원근법'에 의한 '소실점'은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산물로서 중세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회와 왕의 권력에 종사하는 미술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전문가와 수집가의 등장은 예술사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예술시장의 개혁뿐 아니라 사회생활에 있어서 예술가의 목적과 역할의 변화를 가져왔다. [참고 도판 8]
도판 8. 마사치오의 성모와 성 요한이 있는 성 삼위일체 (서기1426-7년. 프레스코. 피렌체, 성 마리아 노벨라 성당)
미술품 주문자가 예술가들에게 어느 정도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며 주문할 때 예술가의 자주성과 자신감, 개인적인 책임과 명예욕이 성장하고 작품의 완성도도 만족할 정도로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순수예술주의에 가깝게 다가선 고객들의 예술관의 발전에 기인한다. 예술은 다시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시민들의 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후기로 가면서 미술은 '매너리즘' 이라는 국제적 귀족 계층의 양식으로 변질되어 간다. 하우저는 매너리즘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전 유럽에 보급된 군주절대주의와 정신적 요구가 많고 예술적 명예욕이 강한 궁궐 풍토의 덕택이었다고 정의했다. 그러나 궁정 예술가라 할지라도 과거와 같이 왕의 절대 권력을 믿게 할 목적으로 예술 작품을 한 것이 아니라 군주와 그 주위 측근자들의 향락을 위해서 했다. 예술이 소수 부유층의 풍류에 기여함으로 서민 생활과 완전히 동떨어진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전문가를 위한 예술, 예술을 이해하고 비판할 능력이 있는 미학자들이 즐기기 위한 교양 있고 노련한 예술가들의 우수한 생산품인 회화는 매너리즘 초기의 현상이며, 이미 후기 르네상스를 특징짓고 후기 매너리즘적인 양식 속에서 최후의 표현을 찾은 귀족화 및 지성화(知性 化)과정의 결과이다.[21] [참고 도판 9]
도판 9. 아뇰로 브론치노의 톨레도의 엘레아노라와 그녀의 아들 지오반니 데 메디치 (서기 1550년경. 캔버스에 유채. 96x115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매너리즘의 숭고하고 배타적인 양식이 가톨릭주의가 다시 한번 국민종교로 되려 했던 반종교운동의 교회선전에도, 절대주의 시대의 궁정예술의 정치적 선전에도 적당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높은 호소력을 지니고 장엄한 형식과 오해의 여지가 없는 상징으로 표현되는 예술의 성격을 잃게 된 후, 완숙한 바로크가 결국 주지주의적인 동시에 감정적이며 난점과 모순과 역설에 지친 매너리즘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22]
바로크는 때로는 교회와 궁정의 호사스러움을 더하는 임무를 맡았고 반종교개혁적이고 반민주적인 홍보활동에 봉사했으며, 때로는 시민적 사실주의와 합리주의의 대변자가 되었으며, 외람되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영역에서 행해지는 생의 직접성과 내면성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바로크 예술은 교활하게 지능적이고 감정적으로 양립 된 매너리즘과는 반대로 일관된 직선성과 일방적인 목적추구를 나타낸다.[23] 그 목적은 중세의 종교적 권력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광범위하게 활동하려는 목적에서 민속적이고 단순하며 감정적으로 파고드는 예술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예술은 또한 설득력 있고 대중을 열광시켜야 하지만 이와 동시에 비천하게 격하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어야 했다.[24] 이러한 결과 트렌트 공의회 이후 로마는 다시 한 번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막강한 교회 권력을 후원자로 둔 예술가들은 가톨릭교회의 권력의 대리인 노릇을 했지만 다시 중세로 돌아 갈 수는 없었다. 예술 작품들은 더욱 극적이고 화려한 과장을 보이며 환상적인 모습들을 재현해 내려고 했다. 장엄한 당시의 미술은 중세미술의 화려함에 르네상스의 사실주의를 그대로 접목시킨 것이었다. 이로서 교회는 잠시나마 천상의 권력의 환희를 잠시 맛보았고 17세기의 로마는 세계 여러 사조들을 모두 융합하는 국제적인 양식인 바로크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참고 도판 10]
도판 10. 지오반니 밧티스타 가울리의 예수 이름의 승리 ( 서기 1672-85년. 로마 일 제수 성당의 천장 프레스코. 건축,회화,조각의 혼합작품)
17세기 중엽에는 미술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정의 화려함에 종사하면서 왕권에 귀의 한다. 예술가가 절대적인 왕권에 봉사할 때 완수해야 했던 기능은 예부터 제후의 궁정에서 그에게 부과되었던 임무 속에 있었다. 그는 효과 있는 선전수단과 권력전시를 위한 도구와 변화무쌍한 대화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궁정의 영광과 매력을 고조시키고 국가의 핵심으로서의 궁정사회를, 나아가서 이 사회의 중심으로서의 군주를 찬양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였다. 그는 여론의 관리자였고 선전부장이었고 의식(儀式)의 제관이었으며 오락의 명수였다.
이와 같이 예술가가 서로 다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 적은 전에도 결코 없었다. 로마와 같은 가톨릭 군주국에서 예술가는 교회권위의 도구가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국가 권력의 도구로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예술가는 그와 반대로 예술대중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고 방향도 잡혀 있지 않은 시민 층의 구매의욕에 의존하고 있는 점만 제외한다면 외부의 간섭에 전혀 구애 받지 않는다. 앞의 두 경우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안전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지만, 후자의 경우에서는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으며 예측할 수 없는 시장경기에 의존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자유를 얻는다.[25] [참고 도판 11]
도판 11. 프란스 할스의 유쾌한 술고래 (서기 1627년. 캔버스에 유채. 66.7x81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8세기에 이르자 궁정예술의 발전이 정체되었고 우리의 예술관 전반을 지배해 왔던 주관주의, 감상주의, 자연주의 경향으로 서서히 교체되었다. 의식(儀式)적 품위를 지키는 성향과 수사학적 연극적인 성향은 로코코에서 이미 우아하고 친밀한 경향으로 바뀌었고, 앙시앵 레짐[26]의 말기에는 위대하고 확고하며 객관적인 형식보다 색채와 뉘앙스가 중시되었다. 18세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화려한 바로크의 계속인 동시에 완성이긴 하지만, 베르사이유의 위대한 경향은 이미 섭정기간에 영웅적이며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특성을 잃어버렸다. 극단적으로 사치스럽고 우아하며 본질적으로 귀족 예술인 로코코에서는 내면성이나 자발성보다 인습적인 요소가 더 강했으나 바로크와 결부된 특수한 인습은 붕괴되고 있었다.[27]
프랑스 혁명으로 도시는 문화전달자인 궁정을 추방했고 꾸며진 위대한 기교의 법칙에 따라 그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하튼 예술은 이제 더 이상 권력과 위대성을 표현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 되고 사람을 매혹시키고 역사적인 의식상(儀式像)에서 우아한 사회상으로 바뀌어졌다. 예술가의 운명의 결정적인 변화, 사회적인 지위의 상승과 대중으로부터 받는 명성의 확보 등은 귀족계급의 권한이 시민계급으로 양도됨으로써 가능했다. 귀족에게 예술은 여전히 체면유지와 과시의 수단이었고, 전시간판과 선전 수단이었고, 장식과 시간낭비에 불과했다. 시민계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술은 정신적 자산의 총 개념이며 심오한 만족과 감미로운 위안의 원천이었고, 예술작품은 충만한 생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된 것이다.[28]
지금까지 서술한 르네상스 이후부터의 내용들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중세 이후 미술은 교회 권력으로부터 잠시 독립을 이루지만 오래지 않아, 한편에서는 교회 권력과 다시 손을 잡고 다른 한편에서는 귀족이나 왕족과 또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 계층과 손을 잡음으로 다양한 계층의 시녀 노릇을 한다. 우리가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미술사의 변천이 하나가 생겼다 사라진 후 다시 새로운 것이 나타나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미술은 하나가 생겨난 후 다른 하나가 생겨나서 서로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번 생겨난 양식은 그 영향력이 후원자의 감소에 따라 쇠퇴하기도 했지만 결코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와 함께 미술사적으로 위대한 양식의 발견이 생기고 유럽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미술가들은 여전히 후원자를 찾아야 했고 그를 후원하는 계층에 봉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예술가들에게 어느 정도의 표현의 자유는 주어졌지만 결국에는 일관된 후원자의 권리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 후원자들의 권력에서 벗어난 화가는 자유를 얻은 대신 상당한 경제적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 소수의 자유를 얻은 작가들의 작품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근대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 대목 이후부터 미술사는 보통 '근대'를 설정한다. 계몽주의의 영향과 혁명의 여파 속에서 앙시앵 레짐을 거부하기 시작한 미술은 이제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3]
혁명은 미학분야에서 예술가의 대인관계의 역할과 이른바 그의 특권의 근거를 가장 본질적으로 변화시켰다. 정신적 자유는 천재의 특권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재능 있는 개인의 선천적 권리로 간주되었다. 모든 개인의 표현은 독특하고 비교될 수 없으며 대치될 수 없고, 모든 표현은 자체 내에 그 척도와 규칙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예술의 관점에서 볼 때 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29]
낭만주의 예술가의 특별한 사회역사적 의의는 예술가가 적대자와의 이데올로기적 갈등 속에서 처음으로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변호하고, 적대자인 예술가에게 말한 데 있다. 예술가는 이미 예전에도 자신의 계급의식, 경제적 사회적 열망을 표현했을 것이나, 광범위하고 영향력 있는 계층의 이익에 항상 가담했었다. 그리고 후원자나 고용주가 유미주의에 있어서 예술의 독자성을 종종 허용하긴 했지만, 그 허용은 구속력이 없었으며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낭만주의자는 그러나 실제로 예술에 있어서 오직 자신과 자기의 동료를 생각한다. 낭만주의자는 미술사에서 예술가를 위해서 예술을 창조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30] 하우저는 부르주아를 적대하는 낭만주의 자체가 본질적으로 시민운동, 시민예술 운동이며,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의 인습, 궁정예술과 수사학, 고양된 양식과 선택된 태도 등을 결정적으로 일소해 버렸다고 낭만주의를 평가했다. [참고 도판 12]
도판 12.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열차 (서기 1862년경. 캔버스에 유채. 90.2x66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낭만주의에서 19세기 자연주의(또는 사실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예술가의 혐오감과 예술과 거리가 먼 참을 수 없는 속물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변함이 없었다. 하우저는 이러한‘자연주의는 많은 점에서 새로운 징후와 수정된 인습을 지닌 낭만주의에 불과하다'고 정의 내렸다. 예술은 부분적으로 프랑스혁명이 실패하고 자유 계급인 시민계급이 거부된 후에 지식계급을 엄습한 실망의 표현이며 결과였다. 자연주의에 있어서 새로운 점은 한 때 그랬던 것처럼 냉정하게 사실에 의존하며‘사실 이외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려는 소망이다. 쿠르베와 같은 자연주의자는 유별난 형식 언어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표현을 위해 선택한 대상의 통속성과 통속성을 제공하는 천박한 직접성을 통해서 시민 청중을 분노하게 했다.[31] 그의 작품이 이전의 작품과 얼마나 달라진 것인지는 미술사를 슬쩍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미술은 이제 작가 자신의 관점과 사상을 담는 매개체로 변화된 것이다. 비록 사실주의 미술이 사회주의 운동과 결탁하며 그 의미가 선동적인 것으로 변질되긴 하지만 사실주의 본질은 사실에 의존하는 것이며 작가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더 이상 예술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포기하고 작가 자신에게로 귀의했다. [참고 도판 13]
도판 13. 구스타프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 (1849년. 캔버스에 유채. 259x160cm. 드레스덴, 구(舊)국립화랑
이러한 밀착과는 반대로 인상주의는 모든 비속성이 배제된 '귀족 스타일'이었다. 인상주의는 부드럽고 세련되었으며, 다감하고 신경과민이며, 향락적이고 감각적이며, 값진 뉘앙스와 정선된 체험을 목표로 하며, 전문가와 미식가(美識家)의 평가를 표준으로 삼는다. 인상주의는 서서히 자연주의자들의 경험주의와 물질주의와의 연관성을 잃었고, 처음에는 문학에서, 그 다음에는 회화에서 유심론적인 반응의 표현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반응은 그 후 완전히 유미주의적인 형식주의와 함께 정치적인 보수주의에 해당되고 대체로 예술계는 그것에 순응하게 되었다.[32] [참고 도판 14]
도판 14. 클로드 모네의 수련(睡蓮), 지베르니 ( 1907년. 캔버스에 유채. 73.7x92.7cm. 뉴욕, 개인소장)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미술은 낭만주의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미주의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물론 사실주의에 입각한 정치적이면서도 서민적인 경향 또한 그대로 유지되지만 낭만주의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약간의 양식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유미주의적인 경향을 절대 포기한 적이 없다. 그 원천은 낭만주의이며 인상주의에 와서 다양한 현대미술로 가지치기를 하면서 각각 변천해온 것이다. 20세기 초, 미술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사회주의와 만나 ‘러시아 아방가르드'라는 전위적인 추상작품들을 쏟아내면서 특정 정치 세력에 봉사하는 경향도 보였지만 전반적인 현대미술의 경향은 심미주의적인 범위를 넘지 않는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며 작가의 사상에 의존하여 모든 기법을 포기한 1960년대 미국의 미니멀리즘에서 유미주의는 잠시 그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후 미술은 여전히 평론가나 미술 귀족(사회적 엘리트들) 또는 작가 자신에 봉사하면서 다양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예술을 위한 예술’의 경향을 탈피하지는 못한다.
이와 같이 미술은 역사 속에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행사 되었고 이를 권력의 도구로 사용한 계층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미술은 후원자들의 권력 담론이나 오락적인 요소로 이용되어 왔음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 예술가들이 이러한 권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음 장에서 밝힐 것이다. 미술가들이 생계를 권력자들에게 의존하는 한 이러한 권력의 시녀로서의 미술의 역할은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그 지배하는 권력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전개가 될 뿐, 여전히 미술 작품들은 권력의 담론 속에 존재한다.
[4]
현대미술의 유미주의는 ‘아름다움'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님을 현대미술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이란 작가나 평론가, 화랑관계자, 그리고 수집가들에 의해 결정된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러한 특정인들에 의해 결정된 아름다움은 대중들에게는 충격적인 것일 수도 있다. 동물의 시체를 반으로 잘라 박제로 만든 작품[33]이나 남녀의 성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놓는 등의 작품[34]들은 민중의 시각에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 미술은 대중, 즉 민중과 괴리되어 존재해 온 것이다. 미술을 지배하는 과거의 절대 왕권과 교권이 사라졌어도 미술은 여전히 소수의 엘리트 계층과 결탁해 있다. 현대 미술에서도 여전히 ‘권력 담론'으로서의 미술은 여전히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현대 미술은 특권 엘리트층을 민중과 구별 짓는데 공헌한다. 민중이 현대 미술에 근접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엘리트층과 민중의 간극은 더욱 심화되어 간다. 이는 16~17세기의 귀족들의 여흥에 봉사했던 미술을 상기 시킨다. 철저히 민중이 배제된 미술. 심지어 엘리트 계층의 비호를 받지 못하는 비주류의 작가들조차도 주류 작가들의 작품을 흉내 내기 급급한 것 같다. 출세와 생계를 위해서는 열심히 엘리트 계층의 취향을 답습해야 하는 것이다. 80년대 한국에서 민중미술이 등장하며 민중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이 등장하는 듯싶었지만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나는 미술은 민중을 포함한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게 민주적으로 다가가는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은 일관된 양식적인 보편성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미술이란 매체를 소유하고 즐길 수 있는 보편성이다. 그러므로 각 계층이 소화할 수 있는 미술의 양식적인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포스트 모던사회에서 소위 엘리트 계층은 과거에 저속하게만 느꼈던 '키치[35]아트'까지도 수용을 함으로서 예술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지 아직까지도 민중은 그 흐름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저속한 것도 엘리트 계층의 손을 거치면 '특별한 것'이 되는 기이 현상이 나타난다. 과거 이발관 벽에 걸린 그림은 그들에게 더 이상 저속한 것이 아니지만 민중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엘리트들의 판단에 아직까지 의아해 한다. 이발소에 걸린 그림도 미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한 민중은 이제 더욱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남자들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포르노그래피가 미술관 벽에 걸렸을 때 민중은 약간의 수치심과 호기심을 느끼며 '아 저런 것도 미술이 될 수 있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된 미술의 결과이다. 현대 미술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왔던 민중들이 모더니즘 작품들을 이해하기도 전에 포스트 모던적인 작품들이 등장한 것도 또 다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엘리트 계층은 당황해 하는 민중을 보며 상당한 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일종의 우월주의와도 같은 그러한 것이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을 모르던 것을 우리가 너희로 그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했다'는 일종의 자부심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후기 모더니즘 시대에 엘리트 계층이 열어놓은 이러한 미술에 대한 통로를 민중을 위한 새로운 미술의 보급로로 사용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2003년도에 몇몇의 미술가들에 의해 시도됐던 '보다'라는 전시회는 시각 장애인들과 같은 민중을 미술의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과히 주목할 만 했다. 작품을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만져 '보고' 입어 '보고' 먹어 '보는' 등 시각 장애인들이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소수의 의식 있는 작가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미술가들은 더 이상 감상자들이 미술관을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들의 삶 속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갔다. 그들은 유미주의적인 현대미술의 권위를 거부했고 자신들을 특별한 사조나 철학으로 무장하지도 않았다. 단지 민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미술을 추구했다. 이는 80년 대 민중미술이 정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에 비하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것만은 분명하다. '찾아가는 미술작품과 작가들'이 얼마만큼 민중의 미술 참여에 영향을 끼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 미술이 소수 엘리트 계층의 점유물에서 민중에게로 이동을 시작한 것은 미술계 전반에서 두드러진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경계할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상업주의에 의해 훼손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보다'와 같은 전시회는 프로젝트화 된 미술 운동으로 당연히 누군가의 후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본가의 간섭의 위험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5]
그렇다면 민중에까지 이를 수 있는 미술의 보편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할 이론적 뒷받침의 필요성이 여기서 대두된다. 먼저 레우후의 언급을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자. ‘종교는 형태와 형상 없이는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예술을 필요로 한다. 반면에 예술은 그 속으로 흘러 들어갈 더 넓고 더 깊은 강으로서의 종교로 돌아오기 마련이다.[36] 아울러 ‘미(美)에 봉사하는 사람은 신에 봉사하는 것이며, 기독교 예술이란 것은 없으며 다만 성스러움 앞에 서 있는 예술이 있을 뿐이며 인간에 대한 봉사로서의 예술이 존재한다고 한다’[37]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그는 ‘예술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 참여하고, 생활의 모든 영역은 예술에 참여하며 예술가의 창조에서 신이 창조한 선과 곡면을 인식할 때 우리는 종교예술을 발견할 수 있다’[38]라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언급들은 종교적 보편성이 예술적 보편성과 일치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7,80년대 한국의 민중신학은 권력이 특권층에 집중된 것을 민중에게로 돌림으로써 권력의 보편화를 민중 속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안병무 선생은 ‘민중은 한국적인 것으로 식민지 치하에서 설움 받고 외세에 의해 수탈당하고 국내 지배층에 의해 억눌리고 빼앗기는 우리 역사 속에서의 민중이자 민족인 그들을 말한다’[39]라고 한국적인 민중의 의미를 정의했다. 민중 신학이 기독교의 보편성을 민중의 보편성과 연결한 대목은 다음 언급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으로 예수를 인격으로 파악하지 않고 예수를 하나의 사건으로, 하느님도 사건으로 파악한다. 예수와 민중이 일으킨 사건은 결코 2천년 전에 일회적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교회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역사 전반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예수 사건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민중사건으로서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집단으로서의 민중이 자기 초원을 해서 일으키는 사건이다.’[40]
그러므로 미술이 민중적 보편성을 얻는 한 방편으로 민중 신학이 대중 속에서 획득했던 보편성에 어느 정도 의지할 여지가 남는 것이다. 민중에 계시된 하느님과 예술에 계시된 하느님 그리고 인간에 봉사하는 예술이라는 삼각 등식이 성립된다. 세계 속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결국 인간 속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이신 것이다. 이러한 피조세계를 미로 표현하는 예술은 종교와 늘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그 지점이 인간의 삶이다. 미술은 삶을 표현하는 문화의 형태이며 양식이다. 삶의 대응 방식에 따라 미술은 변화하기 마련인데, 미술 활동의 중심에는 삶의 해석과 창조에 대한 언표가 놓여 있는 것으로, 미술은 미술대로의 방식 즉 가시적 형식, 혹은 조형 형식으로 삶을 표현한다.[41] 미술이 민중의 삶을 표현하는 것은 민중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맺음말]
결과적으로 우리는 미술이 역사적으로 아름다움에만 기여해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미술이 지배 권력에 의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도 살펴봤다. 미술의 기능적인 역할이 권력 담론 속에서 수행되어 왔고 민중은 여기서 늘 배제돼왔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예술과 종교의 보편성이 민중 신학에의 민중의 보편성과도 만날 수 있음을 충분하진 않지만 생각해 보았다.
이제 21세기는 20세기 후반부터 전개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 속에 있다. 혹자는 이미 포스트모던 시대가 지나갔다고도 하며 또 다른 혹자는 모더니즘의 연장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헬레니즘 시대와 유사한 혼합주의 문화 양상이 전개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예술엘리트주의의 권위를 포기하기 시작한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또 민중을 돌아보는 예술 프로젝트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한편에는 아직도 예술지상주의를 꿈꾸며 예술을 가지고 해체와 조합을 반복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미 예술이 대중에게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인 것이다. 이제 점점 예술의 주체에 대한 고민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대중에 의해 제작되는 작품도 등장하고 있으니 예술가의 미술의 주체로서의 위치까지도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면 미술의 주체가 대중에게로 이동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이러한 것들이 엘리트 예술을 포기한 결과로 주어진 민주적인 것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미술이 엘리트 계층의 손에서 민중의 손으로 이동하고 있다. 권력이 민중으로 나오는 것 같이 이러한 미술의 민주화는 민중의 보편적 삶에 뿌리를 내려야만 그 보편성이 확보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진행에는 관련된 사람들의 노력과 관심이 늘 요구된다. 그리고 민중의 삶 속에 뿌린 내린 민중 신학이 이러한 미술의 방향에 이론적 바탕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을 지는 또 다른 과제로 남는다.
[참고서적]
아놀드 하우저, 예술과 사회, 한석종 옮김,홍성사, 1982
H.W.잰슨, 서양미술사 , 이일 역, 미진사, 서울, 1996
진 빈센트, 미술의 이해, 조선미 옮김,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헤겔 미학 I , 두행숙 역, 나남출판, 서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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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놀드 하우저는 1892년 헝가리 태생의 철학자로 베를린, 이탈리아, 빈, 미국, 독일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의 미학에 대한 시각은 역사적, 문화적 토대 위에 변전된 지배적인 사회계층과 이들 계층의 삶의 표현의 근저가 무엇인지를 추구하고 있다. 그는 그의 안목에 이데올로기의 렌즈를 첨부하지도 않으며 그가 들여다본 현실에 변증법적인 상황을 도금하지도 않는다. 그의 이론은 실증적 사실에서 출발해서 귀납적 결론에 도달한다.
[2] 진 빈센트, 미술의 이해, 조선미 옮김,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 p.5
[3] 아놀드 하우저, 예술과 사회, 한석종 옮김,홍성사, 1982, p.163
[4] Ibid. p.163
[5] 김철효, ‘애드라인 하트의 미술풍자화 연구’(박사논문), 성신여대대학원 ,2000, p.54
[6] Ibid. , p.56
[7] 먼로 C. 비어즐리, 이론과 실천, 미학사 학술총서 4, 1990, pp.422~423
[8] 1917년 10월 혁명 기간에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형성에 크게 공헌한 철학자
[9] H.W.잰슨, 서양미술사 , 이일 역, 미진사, 서울, 1996, p.10
[10] 아놀드 하우저, 예술과 사회, 한석종 옮김,홍성사, 1982, pp.163~170
[11] H.W.잰슨, 서양미술사 , 이일 역, 미진사, 서울, 1996, p.21
[12] 아놀드 하우저, 예술과 사회, 한석종 옮김,홍성사, 1982, pp.170~175
[13] 아놀드 하우저, 예술과 사회, 한석종 옮김,홍성사, 1982, pp.175~194
[14] Ibid. , pp. 175~194
[15] Ibid. , pp. 175~194
[16] Ibid. , pp. 194~207
[17] H.W.잰슨, 서양미술사 , 이일 역, 미진사, 서울, 1996, p.65
[18] 아놀드 하우저, 예술과 사회, 한석종 옮김,홍성사, 1982, pp.194~207
[19] Ibid. , pp. 194~207
[20] Ibid. , pp. 207~213
[21] Ibid. , pp. 213~221
[22] Ibid. , pp. 213~221
[23] Ibid. , pp. pp.213~221
[24] Ibid. , pp. pp.213~221
[25] Ibid. , pp. 213~221
[26] Ancien régime: 1789년의 프랑스 혁명 때에 타도의 대상이 된 정치·경제·사회의 구체제. 16세기 초부터 시작된 절대 왕정 시대의 체제를 가리키나 넓은 의미로는 근대 사회 성립 이전의 사회나 제도를 가리키기도 한다.
[27] 아놀드 하우저, 예술과 사회, 한석종 옮김,홍성사, 1982, pp.221~227
[28] Ibid. , pp. 221~227
[29] Ibid. , pp. 228~231
[30] Ibid. , pp. 228~231
[31] Ibid. , pp. 231~241
[32] Ibid. , pp. 231~241
[33] 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65∼ )의 작품
[34] 뉴욕 미술계의 악동이란 별명을 지닌 사진작가 앙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의 작품
[35] Kitsch : '속악한 것', '속임주의', '모조품의' 혹은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빗나간', '사용방법을 이탈한 것'을 가리키는 용어. 영어의 'sketch' 또는 의미가 모호한 독일어의 동사 'kitschen' 등에서 그 어원을 찾아 볼 수 있는 이 용어는 19세기말 뮌헨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되었다. 어떻든 고결함의 결어를 나타내는 듯이 보이는 그림과 감상적인 중산층들의 동경심을 만족시키는 듯한 그림을 비판적인 의미에서 사용했던 개념.
[36] G.V. 레우후, ‘종교와 예술’ 열화당, 1988, p.14
[37] Ibid. , p.132
[38] Ibid. , p.154
[39]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88, pp.39~43
[40] Ibid. , p.27
[41] 최열, ‘제3세계 미술론’, 시대 상황과 미술의 논리-손장섭,김정헌 역, 한겨례, 1989,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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