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고백들[요약]
채창완
마르틴 루터 이후 전개된 로마 가톨릭의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고백들을 통해 어떻게 이 둘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지 교회론적 관점에서 서로의 차이점을 살펴본다.
[가톨릭의 종교개혁]종교 개혁의 반작용으로 로마 가톨릭은 역 종교개혁을 실시했다. 이는 덕망 있는 성직자들과 수도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창설한 ‘예수회’와 ‘오라토리오회’가 대표적이다. 여기서는 교회론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 트랜트 회의황제 찰즈 5세는 교회개혁과 관련한 종교회의를 요구했고 교황 바울3세에 의해 회의가 소집되었다. 수도원에 대한 교구 주교의 통제력의 강화, 면죄부 발행에 대한 엄격한 통제 등을 다루는 ‘개혁의 교령’(Decrees of Reformation)을 채택했다. 베드로의 권위를 교황이 승계한다는 ‘기소 교리’(Bull of Indiction)를 주장했다.
교회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믿는 자들이 모인 회중(會衆)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성령의 내적인 감동으로 교인들을 부르셨고, 외적으로는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을 통해 교인들을 부르셨다. 유한적이고 멸망 받을 이땅에서 교회는 천상적이고 영원한 것들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례전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 시키고 그분과 동역자가 되게 한다. 승리의 교회와 전투적인 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전자는 이 세상을 이긴 축복 받은 영혼들의 가장 영광스럽고 행복한 회중이고 후자는 이 세상에서 아직 전투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모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 승리의 교회와 전투적인 교회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진정한 교회는 사도로부터 유래되고 사도들에 의해 전승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사도들을 통해 교회를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사도 가운데 으뜸되는 베드로의 정당한 계승자인 교황은 교회의 최고 통치자인 것이다. 교회는 비록 죄인들을 교인으로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거룩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서 속에서 성스럽다고 일컬어지는 성찬기, 제복 등과 같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또 ‘모든 거룩함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성령에 의해 지배 받는 교회는 하나뿐이며, 이 교회는 믿음과 윤리적인 규율을 가르침에 오류가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교회의 기원, 특권, 그리고 위엄을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권세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천국 열쇠를 가진 교회는 죄를 용서하는 권세와 죄인을 추방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성례전의 열매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속한 것이다. 성도의 교제가 본질적으로 사랑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라는 사실은 ‘내 빵이 아니라 우리의 빵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들 자신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구원을 탄원할 것을 가르치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밝혀진다. 교회의 각 구성원들에게는 각각의 직무가 할당된다. 즉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교사로 봉사한다.
2. 로버트 벨라르민(1542~1621)루뱅의(Louvain)의 신학대학교 교수인 로버트 벨라르민은 가톨릭의 교리를 옹호했던 신학자로 ‘논쟁’(Controversies)이란 저서에서 그의 주장을 펴고있다. 교회론과 관련해서는 ‘교회의 가시성’과 ‘교황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기원은 교회를 세우고 그 머리에 그의 대리자를 두신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 교회는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백과 합법적인 사제, 즉 로마 교황에 의해 주재 되는 같은 성례전의 교제에 의해 묶여진 사람들의 회중이다. 이러한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지각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외적인 신앙고백(성례전)에 참여함으로써 만 이루어진다. 또한 스콜라 신학자들이 주장한 외적으로 ‘수적인 구성원’(membership numreo)과 내적으로 ‘받을 만한 공적이 있는 구성원’(membership merito)을 구분했다.또한 교황은 몸의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그리스도가 베드로 에게 주신 보편적인 권위를 상속 받아 전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교구의 주교들의 권위도 교황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교황이 가장 높은 권력을 갖고있지만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만 현세적인 문제에 간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고 하여 교황의 권위를 단지 영적인 권력만으로 한정 지음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제한 한다고 하여 교황 식스투스 5세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고백들]마르틴 루터가 95개의 테제를 발표한 이후로 종교개혁은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나고 이러한 종교개혁의 물결은 전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에 까지 확장되었다.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반까지 각 나라별로 개혁교회들은 독특한 신앙 고백들을 내놓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독자적인 개혁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다음은 이러한 신앙고백 속에 담긴 교회론에 대해서 정리한 것이다.
1. 프랑스의 신앙고백(1559)프랑스 개혁교회의 제 1차 전국 대회에서 선언되었는데 초안을 칼빈이 만들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이 가르치는 순수한 종교를 따르기로 동의한 믿는 자들의 모임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거행되는 장소이다. 그 구성원에는 죄인들도 포함되지만 이로서 교회의 이름이 파괴되지 않는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교황의 세례는 인정되어 로마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자는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모든 교회의 직책들은 하나님에 의해 위임된 것임으로 그리스도 아래에서 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로마 가톨릭의 사제직의 권위와 차별성을 두었다.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존 녹스(John Knox)가 초안을 만들었고 1567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비준되었다. 교회의 유일성을 강조하여 아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오직 ‘하나의 교회’(one Kirk)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모든 세대, 영역, 국가, 언어를 초월하여 선택된 백성들이기 때문에 보편적이라 했고 한 하나님, 한 주 예수, 한 믿음, 그리고 하나의 세례를 가진 성도들의 교제를 교회라고 정의하고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도 생명도 없다고 했으며 교회의 불가시성을 강조했다. 이 불가시적 교회에는 산자나 죽은 자, 선택 받은 자 모두를 포함한다. 교회의 역할은 말씀의 선포, 성례전의 올바른 거행, 교회의 규율의 정당한 집행을 수행하는 것이다.
3. 벨기에 신앙고백(1561)초안은 브레(Guido de Bres)가 만들었다. ‘프랑스신앙고백’을 확대한 이 고백은 제네바의 승인을 받아 여러 의회의 인증을 받았다. 1619년 도르트 회의에서 권위 있는 고백서로 선포되었고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개혁교회의 교리적 기준이 되어 왔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죄를 멀리하며, 의를 좇고,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 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 안에 결점이 존재하며 이 결점을 없애기 위해 교회와 같은 도피처에서 성령을 통해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한다. ‘거짓 교회’(로마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신의 의식(儀式)과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권한과 권위를 부여한다고 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보다도 사람에게 더 의존한다’고 로마 가톨릭을 비난했다. 그러나 프랑스 신앙고백과 같이 불가시적인 교회에 대한 언급은 없고 교회의 역할을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위해 목회자, 장로, 집사 등이 필요하며 이들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이들은 프랑스 신앙고백과 같이 동등한 권위를 인정 받았다.
4. 두 번째 스위스 신앙고백(1566)루터교와 스위스 개혁교회를 통합할 목적의 첫번째 스위스 신앙고백은 실패했지만, 독어 권의 스위스 개혁교회들을 연합하는 일은 성공했다. 두 번째는 요한 하인리히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에 의해 구성되었고 바젤을 제외한 스위스 전역의 개혁교회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교회는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이다라고 하여 도나티스트들의 고립성과 로마 교회의 보편적인 척 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교회에 대한 정의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모인 믿는 자들의 회합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심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대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회가 만일 그리스도와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기반 위에 세워졌다면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교회의 권위를 강조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즉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교회란 불가시적인 것으로서 심판 때까지 함부로 교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거나 심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악한 자들이 교회에 해를 끼치며 그들의 영역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사악한 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교인은 아닌 것이다.
교회의 일치는 외적인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성서에 의해 주어졌고, 사도신경에 요약된 보편적인 믿음의 진리 안에 있다. 교역자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관리하라고 오래 전에 이미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주교는 교회의 생활에서 영의 양식과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의 감독관과 파수꾼이다. 장로, 목회자, 교사들의 직분은 일시적이며 이들은 교회의 대표자들에 의해 선출되며 장로에 의해 안수를 받는다. 교회의 교역자는 종이지 사제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단 한 분 사제이시다. 모든 교역자들은 그들의 권위와 권능에서 동일하며 말씀과 성례전의 효력은 교역자의 자질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교회의 회의는 교역자들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도 갖고있다.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웨스트민스턴 회의에 상정되어 장로교 정치 형태를 선호하던 칼빈주의자 의원들에 의해 채택되고 1647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의회에서 받아들여져 1648년에 국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 고백은 영어권의 교회 안에서 장로교적인 교리의 표준이 되었다.불가시적이며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몸이고 세상 모든 것에 존재하신다. 복음 아래에서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가시적 교회는 세상 어디에서나 참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로 구성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가시적인 교회가 세상 끝 날까지 성도들을 모으고 온전하게 하기위해 목사의 직, 말씀, 하나님의 의식(성찬식)을 교회에 주셨다. 이 보편적인 교회는 때로는 더 가시적이었다가 때로는 덜 가시적인 교회가 되어 왔다. 이 땅의 교회는 혼합과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 위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것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영과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일이며,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을 맡은 이들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죄를 범한 교인들을 훈계하고, 비난하며, 추방할 수 있고, 또한 죄를 참회한 자들을 사면하고 공동체로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교회의 정치를 위해 교회는 여러 가지 회의가 필요하다. 이는 세속적인 통치자에 의해서 소집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교회의 적이면 교역자는 이들에게 직접 맞설 수 있다. 이 회의들의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해야 한다. 이 회의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믿음과 실천에 관한 것을 제정할 수 없고 단지 그러한 것들을 도울 수 있을 뿐이다. 이 회의는 특별한 요청이 없을 때는 세속적인 일들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세속적인 통치자의 의무는 공익을 도모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는 말씀이나 성례전 및 교회 규율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교회 내의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음으로 불경한 자들을 진압하고 부패를 막는데 힘써야 한다.
6. 사보이 선언(1658)런던의 사보이 궁전의 회중교회 대표들의 모임에서 작성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해서 만들어졌으나 교회 정치와 민정행정관에 대한 견해는 이와 다르다. ‘민정 행정관들은 복음의 교사들과 복음의 고백을 권장하고 격려하며 보호’해야만 하며 불경한 자들을 막아야 하는 반면 교리적이고 의식적인 논쟁에 관여할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가시적인 교회 밖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주장을 생략하고 그리스도의 가시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란 어떤 의식 집행에도 위임되지 아니하고 어떤 직분을 맡은 이가 통치할 수 없는 교회이다 라고 주장했다. 또한 모든 권능과 권위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지교회(local church)의 자율권을 강조한다.
7. 케임브리지 강령(1648)미국 매사추세츠의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회의에서 리처드 매더에 의해 만들어졌다. 교회의 교리, 질서와 규율을 철저히 다루고 있다. 보편적인 교회는 선택된 자들의 전체 사귐이며, 하늘의 승리하는 교회이고 땅의 전투하는 교회라고 단언하고 있다. 전투적인 교회는 가식성과 불가식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불가식성은 교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고 가식성은 교인들이 신앙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인격 안에, 그리고 특정한 교회 안에서 들어 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적이고 가시적인 교회를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 강령에는 ‘우주적이고 가시적인 교회를 부정한다’는 구절이 있음으로 서로 모순되게 나타나고 있다. 다만 교회를 어떠한 특정한 장소에 모아진 믿는 자들의 모임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만은 분명하다.
특정한 교회라는 것은 정기적으로 예배와 교육에 참석하기로 계약하고 자발적인 동의를 함으로써 성립된다. 교회의 회중의 수가 너무 적어도 안되고 너무 많아도 안 된다. 교회가 너무 비대해지면 교회를 분리해 다른 교회를 세워야 한다. 교회의 권위는 회중 자체에 있음으로 교역자들을 세우기도 하고 면직시킬 수도 있다. ‘목사, 교사처럼 주로 말씀의 교역을 담당하는 장로들’과 ‘교회의 치리(治理)를 담당하는 치리 장로’로 구분된다. 집사들은 교회의 세속적인 선한 일을 돌보는데 한정된다. 그리스도에 관련해서는 교회는 군주제이다. 반면 교회의 형제 된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점에서 교회는 민주주의적이다. 그리고 장로제도와 그들에게 위임된 권한의 관점에서 그것은 귀족정치이다.
비록 교회들은 각각 별개이며, 어느 교회나 다른 교회에 대해서 통제권을 가질 수 없지만 교회들은 상호간에 다른 교회의 복지를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시 행정관도 ‘종교 문제에서 그들과 상의하고 돕기 위해서’ 회의를 소집할 수 있으나 ‘회의 구성은 교회의 행위’이며 시 행정관의 뜻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교회의 통치와 세속적인 통치는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이 둘은 각기 구분된 통치권을 가진다. 그러나 이 둘은 상호간에 협력할 수 있으나 상호‘간섭’하는 일은 비합법적인 것이다. 세속적인 통치자는 국민들에게 교인 되기를 강요할 수도 또 교인들을 추방할 수도 없다. 세속 통치자는 우상 숭배와 불경, 그리고 이단들을 억제하는 일을 해야 한다.
[결론] 이와 같이 가톨릭의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고백들은 상당한 대립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랜트 회의와 로버트 벨라르민은 종교개혁운동가들의 비판에 대해 더욱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트랜트 회의는 ‘교회가 오류가 없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보이는 머리인 교황도 무오하다는 설을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의 전승 위에 세워진 교회를 강조’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전승을 무시하는 개혁교회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로버트 벨라르민도 교회에서의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를 옹호하여 ‘교황에 의해 집전 되는 성례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종교개혁은 개신교 종교개혁운동에 반하는 역 종교개혁(the Counter-Reformation)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교회의 직제의 권위의 동등함을 주장함으로써 교역자 직분이 섬기는 봉사직임을 강조함으로 사제의 권위를 중시하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정면으로 반대했다. 미국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인 케임브리지 강령은 교회의 권위를 교인들 개개인에게 둠으로써 민주주의적인 교회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개혁교회들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하고 있으며 교회가 모든 믿는 자들이 모인 회중 교회라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프로테스탄트 신앙 고백은 로마 가톨릭의 교황과 교회에 집중된 권위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혁교회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각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한 하나님, 한 성경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이렇게 갈라지게 된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교리를 너무 주장하다 보면 결국 성경의 진리에서 떠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닌가? 교리나 신념 보다도 사랑이 더 우선된다는 생각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너무 낭만적인 것인가?
[참고문헌] E.G.제이, 교회론의 변천사, 주재용 譯, 대한기독교서회, 2002,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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