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게놈프로젝트 (Human Genome Project)’
-신에 대한 도전인가 아니면 신이 주신 치유의 축복인가?-
채 야고보
영화 '가타카의 포스터'
[사진출처: https://t1.daumcdn.net/cfile/146F1B10ABEDD96E5D?original]
‘G a t t a c a’
이 단어는 영화제목이면서 게놈프로젝트의 DNA 염기인 아데닌(Adenine;A), 티민(Thymine;T), 구아닌(Guanine;G), 시토신(Cytosine;C)의 알파벳 대문자의 조합이다. 게놈프로젝트의 발전으로 유전자에 의한 새로운 인간상과 사회상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는가? (전도서 7장13절)’
이와 같은 성경구절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나’라는 인물은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자연분만에 의해 탄생한 빈센트란 청년이다. 그 결과 그는 유전자 조작에 의해 시험관에서 태어난 동생인 앤턴과 비교해서 여러모로 열등한 존재이다. 선천적으로 심장질환을 갖고 태어났고 유전자 검사에 의해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판명까지 받는다. 더욱이 그는 동생에 비해 몸집도 작았고 열등한 유전자의 대표적인 현상인 ‘근시안’의 소유자인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적으로 ‘부적격한 사람(In-Valid)’인 것이다. 우여 곡절 끝에 빈센트는 우주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 ‘가타카’의 청소부로 들어가지만 우주파일럿이 되고 싶은 그의 꿈은 결코 ‘부적격자’에게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허황된 꿈을 버리지 않고 결국 비밀리에 유전자 브로커를 만나 완벽한 유전자를 지닌 ‘유진’이란 자의 아이덴터티를 빌려 그의 꿈을 실현하려 한다. 이 유진이란 사내는 완벽한 유전자를 가진 자이지만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사고 사실을 숨기고 완전한 Valid 아이덴터티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전적 열등자인 빈센트와 신체적으로는 불구이지만 유전전으로는 완벽한 유진이 결합하여 ‘제롬’이란 새로운 가상의 인간이 만들어진다. 즉 빈센트는 자신의 아이덴터티를 숨기고 유진의 유전자 아이덴터티를 빌려 ‘제롬’이란 인물로 행세하며 ‘가타카’에 당당하게 취직을 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모두 견뎌낸다. 육체적으로 열등한 그가 유능한 인자를 지닌 완벽한 사람들과 겨루는 투쟁은 정말 눈물겨운 것이다. 그는 유진의 ‘피’, ‘타액’, ‘머리카락’ , ‘비듬’ 등을 빌려 가타카의 모든 유전자 아이덴터티 감식기와 테스트를 가까스로 통과한다. 그의 노력에 의해 그는 가타카의 최우수 사원으로 인정을 받기 까지 이른다. 모든 우여곡절 끝에 결국 빈센트는 그의 꿈을 이뤄 우주로켓에 탑승할 수 있게 된다.
영화 '가타카'의 주인공 빈센트 프리먼(에단 호크)
[사진출처:https://t1.daumcdn.net/cfile/13110210A85AA687E8?original]
이와 같이 이 영화는 이러한 유전자적 결함을 뛰어 넘어 결국에는 그의 소원을 성취하는 주인공의 투혼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빈센트는 유전자 우성의 동생 앤턴과 수영 시합에서 이기고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느냐는 동생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한다. “난 되돌아갈 자리를 남겨두지 않아서야!” 유전적 열등함을 뛰어넘는 인간의 놀라운 정신력과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영화의 감독인 앤드류 니콜은 이 영화 곳곳에 유전적 열등을 뛰어넘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전자에 의해 인종차별이 이뤄지는 미래의 사회에 대해 인간의 의지의 승리를 그는 보여주려 한 것 같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인간의 참된 근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행복할 수 없는 곳이지만 떠나기 싫은 마음이 드는 건 왜 일까?
몸 속의 모든 원소도 행성의 일부라고 한다.
어쩌면 떠나는 게 아니고 고향에 가는 건지 모른다.”
빈센트가 로켓을 타고 지구를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감독은 결국 인간의 유전자들의 존재와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로 인한 인종차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넓은 우주가 우리 몸 밖에 존재하는 것 같이 우리 안에도 무수한 원소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넓은(?)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
우마 서먼 ( 이렌느 캐시니 역)
[사진출처: https://t1.daumcdn.net/cfile/15110210A85AAAA4EB?original]
나는 여기서 이 영화에서 제기된 미래 세계상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면서 나름대로의 분석을 해보았다. 이에 이언 바버의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라는 책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if !supportLists]-->1. <!--[endif]-->신의 아이?
유전자 판별이나 조작에 의하지 않고 부부간의 사랑에 의해 임신하고 자연분만에 의해 태어난 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자연적 임신분만은 현재에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영화 속의 미래에서는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의 아이’는 모두 유전적 결함이 제거되지 않은 미래의 세계에 부적합한 열등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유전자 연구가 발달하면 할수록 충분히 가능한 미래의 출산 문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이 영화는 인간 탄생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신의 아이’는 축복의 말이 더 이상 아니라 과학의 혜택을 받지 않은 불행한 인간에게 붙혀진 이름이다. 인간의 탄생마저도 조작할 수 있는 미래. 이러한 미래는 유물론자인 다니엘 데닛이 바라는 그러한 미래가 아닐까? “인간은 수조 개의 분자 기계들로 이루어진 로봇이다” 라는 그의 말은 유전자 조작에 의해 인간 인의적으로 인간 탄생을 결정할 수 있다는 이 영화의 미래상과 일치한다. 인간은 DNA 염기로 구성된 단백질 덩어리이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신경조직의 뉴런의 상호작용 즉 전기 진동을 통해 형성된 상호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인간이 단백질로 구성된 로봇이라면 유전자 조작은 아무런 윤리적 문제가 없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이언 바버는 그의 책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에서 린드 실바의 말을 인용하여 ‘인간에 대한 성서적 개념은 사람이란 하나의 통일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서적 인간관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영과 육의 이원론적 분리는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적인 것으로 결국 육을 아무렇게나 인의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위험한 결론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성서적인 개념을 들지 않더라도 유전자 조작에는 이러한 인간 존엄성 상실의 위험성이 늘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if !supportLists]-->2. <!--[endif]-->피한방울과 머리카락 하나로 사람의 운명까지 알 수 있다?
자판기 같은 기계에 자신의 애인의 머리카락을 넣어 상대의 유전자 특징과 미래 예측하는 서비스를 이 영화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비듬 하나에서 까지 유전자를 판독해 내는 것은 물론 가능하겠지만 사람의 운명까지 알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운명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행동유전학’적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행동유전학자들은 “어떤 사람의 유전자가 그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결국 범죄 행위의 근본 원인도 이 유전자의 유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언 바버는 앞에 언급한 그의 책에서 “우리의 행동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동기, 의도, 선택의 결과이다”라고 하며 행동유전학자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또 “우리는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기구가 아니며,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며, 다양한 대안적 행동 가운데 의도적으로 책임 있게 결정할 수 있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언 바버의 결론은 “아주 익숙한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변화에 대한 강한 동기를 갖게 되면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빈센트에게는 이와 같이 “되돌아갈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 강한 변화의 동기가 그를 우성적 유전자 사회와 싸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 에너지로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변화에 대한 강한 동기’가 결국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그의 미래를 바꿔놓은 것이다.
<!--[if !supportLists]-->3. <!--[endif]-->신 계급주의와 신 인종차별?
미래에는 빈부의 격차나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 보다 유전자에 의한 새로운 계급주의와 이에 따른 인종차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유무에 따라 사회적 계급이 정해지지만 미래의 사회는 자본에 의한 분류가 아니라 유전자의 우성과 열성에 따라 사회 계층이 분류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러한 유전자 공학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도 결국 자본가들임을 생각한다면, 결국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이러한 사업에 손을 대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 아니라 자본가들일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황우석 박사가 최초로 인간복제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현재 한국 사회가 들떠 있지만 그에 들어가는 막대한 연구비용은 결국 자본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게놈프로젝트의 혜택을 일반인들이 누리기까지 일반인들은 ‘신의 아들’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유전자 과학과 자본의 관계를 생각할 때 미래 사회의 새로운 신분계층의 등장이란 것도 자본이 유전자로 바뀐 것 말고는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계급과 인종차별은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며 방법과 양상이 달라질 뿐이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인간 문명의 필요악(?)인 것 같다. 나는 과학이 발달하는 미래에도 이러한 것들은 그대로 유지된 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니콜 감독이 이 영화에서 얘기하려는 것은 결국 미래에 있을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바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if !supportLists]-->4. <!--[endif]-->DNA 매매?
유전 인자로 운명이 결정되는 미래의 사회에서 열성 인자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은폐하기 위해 우성인자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DNA를 구매하려 하고 이를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주는 자가 바로 ‘DNA중개인’인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돈 만 있으면 시험관 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더욱 우성 인자를 살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DNA에 의해 자신의 미래가 결정된다는데 누가 자신의 후손들을 위해 돈을 아끼겠는가? 자기 자식을 남보다 더 잘 키우고 더 우성적으로 키우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다. 여기에 자본이 투입되며 DNA의 수요가 발생할 것이고 이에 대한 공급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것은 자명하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장논리가 아닌가? 아울러, 위의 1번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DNA의 매매는 인간을 하나의 DNA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로봇’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유물론자적인 발상인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와 유물론자들이 만들어낸 미래상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러한 부정적 방법을 동원해 가타카의 감시 시스템을 속이지만 결국 최종적으론 그의 유전자를 검시한 검시관의 도움으로 우주탐험의 꿈을 이루게 됨으로 따뜻한 인간미의 승리를 감독은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한 인간미는 인간 내면에 본연적으로 숨어있는 ‘사랑’의 정서이고 이러한 정서는 빈센트의 유전자 조작을 알게 된 빈센트의 동료이자 그를 사랑한 ‘아이린’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마치 딱딱한 바위 속에서도 작은 생명의 싹이 돋아나는 것 같이 유전자 조작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따뜻한 인간애는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인간은 로봇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영과 육이 통합된 인격적인 존재인 것이다. 결코 생명의 근원까지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허구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미래에 대한 설정 속에서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너무 과장된 감이 있긴 하지만 유전자에 따른 신분 계층의 분리가 정말로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간게놈프로젝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이러한 윤리적 위험성에 대한 염려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우리는 유전자 연구에 무조건적으로 반대만 하고 있을 수만도 없다. 이언 바버에 따르면 유전자 연구와 그 적용은 어떤 목적에 이용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질병의 치유 목적인가 아니면 우성인종의 영속 목적인가에 따라 윤리적인 평가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구별해낼 방법이 현재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종교계의 무조건 적인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도 유전자 연구는 끊임없이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음성적인 진행은 오히려 더욱 비윤리적 결과를 낳게 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음성적으로 진행되는 유전자 연구를 막을 사회적 제도 장치가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전자 연구가 ‘바벨탑’과 같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욕망의 분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 따라 우리 인간에게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해가 되거나 할 것이다. 생활에 유익한 ‘불’의 경우도 이를 적절하게 통제할 방법을 인간이 터득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것을 모조리 태우는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것과 같다. 인간 문명의 모든 이기는 적절한 윤리적 기준 하에 인간의 통제력 아래 있다. ‘핵’이 그러하고 수력발전을 위한 ‘댐’이 그러하다. 유전자 연구를 계속해서 거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에 대한 문을 이미 열려진 상태이다. 문제는 어떻게 인간의 잘못된 욕심을 통제하며 이 유전자 기술을 인류의 번영을 위해 잘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현재 유전자 연구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대의 목소리는 사실 ‘과학적 무지’와 ‘성서적 근본주의’에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을 주셨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인간의 몫이 아닐까?
현재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모의 생식세포로부터 유전된 잘못된 유전인자들 때문에 불치의 병으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유전자 과학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치료가 가능해 진다면 우리는 많은 인간들의 아픔을 과학의 힘으로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게놈프로젝트가 인간의 삶의 도와주는 고마운 ‘불’이 되느냐 아니면 인간의 모든 것을 태우는 무서운 ‘화재’가 되느냐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더 늦기 전에 ‘인간게놈프로젝트’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기독교 신학에서 제시를 해야 할 것이다. 유전자 연구를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이를 적절히 통제하고 견제할 올바른 윤리적 기준을 우리의 사회가 만든다면 게놈프로젝트가 ‘바벨탑’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유 사역의 연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앤드류 니콜 감독이 이 영화의 서두에 언급한 전도서 구절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명의 영역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가 과연 과학의 발전에 해가 될 것인가? 게놈프로젝트가 인간 불치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인간 생명의 근원에 다가간다는 과학적 자만으로 바뀔 때, 이는 결국 인간에게 위험한 결과로 돌아 올 수 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을 함 부러 바꾸려 하지만 자연도 우리를 바꾸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윌리암 게이린).
“인간의 도덕성은 문화의 산물이며, 우리는 진화론적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성향 중 어떤 것을 따르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행위는 유전자의 제약을 받지만, 그렇다고 유전자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언 바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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