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0. 나해_연중32주일
룻기 3:1-5, 4:13-17 / 시편 127 / 히브 9:24-28 / 마르 12:38-44
“선한 의지의 충만함”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豕眼見惟豕(시안견유시), 佛眼見惟佛(불안견유불)”이라는 고사성어를 들어보셔서 잘 아실 겁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는 뜻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농담에 무학대사가 농담으로 대받아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비난에 대처하는 재치가 돋보이는 말이지만, 이 말은 우리의 주관적 시각에 깊은 경종을 울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정도에서,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대상과 사건을 판단할 재료를 찾기 때문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쉽게 섣부른 판단을 합니다. 같은 범죄 현장도 형사들과 CSI와 프로파일러들이 보는 관점과 사용하는 재료가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범인을 잡으려면 이러한 각각의 전문적인 지식들을 종합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에서 읽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가장 비난하셨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자신의 불의한 의지를 숨긴 채 외적 모양만 쫓는 사람들은 모든 시선이 외향적인 것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는 사람의 내면의 선한 의지를 보고, 누구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것에 집착하게 마련입니다. 결국에는 “유유상종類類相從”, 돼지는 돼지끼리 만나고, 의인은 의인끼리 만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친구를 사귈 때 사귀고자 하는 친구의 주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 수 있다고 충고하시는 것입니다.
기원전 2세기 경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 황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헬레니즘화하여 제국을 통합하기 위해 헬레니즘 문화를 유대 땅에 강요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헬레니즘식 경기장을 만드는 등 유대교의 정체성을 뒤흔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발은 극에 달했고 결국 유다 마카베오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내용이 외경인 마카베오서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파의 기원은 이때 저항했던 한 세력인 ‘하시딤’에서 유래합니다. 그들은 마카베오 전쟁을 지원하다가 마카베오가 예루살렘을 재탈환한 이후 학구적 분파로 새롭게 출발하여 바리사이파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들은 랍비들의 구전에 대한 해석가들로 대부분 중산층과 가난한 농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의 이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성전 권력인 사두가이파 사람들 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교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의 멤버가 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지지했던 사람들과 예수님을 지지했던 계층이 겹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파는 똑같은 계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둘의 가르침은 서로를 향한 날 선 비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식적인 경건을 비난하셨고, 그들은 반대로 예수가 죄인의 친구이고 먹보이며 술주정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복음서는 이러한 둘 사이의 긴장이 결코 봉합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으로 치달았음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이러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오경에 정통했던 율법학자들은 곧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위선자”란 모욕을 받은 것은 그들이 율법조항으로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도 지킬 수 없는 율법조문 해석을 통해 남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율법을 이용했던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근본주의자들이요, 문자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그들을 비난하신 것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외향적인 것,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접받길 좋아하고, 칭찬 듣길 좋아하고, 관심받길 원하는, 요즘말로 한마디로 “관종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남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을 희생한다는 생각은 좀처럼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통해 자신들이 남보다 더 우월한 존재임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남을 섬기는 것보다 남에게 대접받는 것을 더 좋아하다 보니 그들은 결국 하느님 앞에서 조차 자기 자신들을 속였던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지닌 본질, 즉 율법의 정신을 더 중시하셨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이 바로 “사랑”에 있음을 말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충만한 상태를 우리는 “선(善, Goodness)”이라 부릅니다. 선이 충만한 상태라는 것은 그 안에 사랑이 넘쳐서 다른 타자에게로 자연스럽게 사랑이 흘러간다는 뜻입니다.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선은 더 이상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관계성 속에서 타자에게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선의 본질이고 선의 역동성입니다. 선은 관계성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을 통해 자기 순환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란 관계성 속에서 상호 선의 교환과 친교를 이루십니다. 교부들이 그토록 이단과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도 “삼위일체” 교리를 지키려 했던 것은 그들이 기도와 예배 그리고 말씀의 실천 속에서 깨달은 이러한 “선”의 본질 때문입니다. 선은 반드시 사랑을 나눌 대상을 전제합니다. 대상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본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선에 대한 의지 곧 사랑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한 존재들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선한 의지의 방향성이 잘못됐을 때 발생합니다. 정작 사랑할 대상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돈과 외형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의 대상을 반려동물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랑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랑에 인간에 대한 애정이 빠져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동물을 사랑하거나 인간을 사랑하거나 선한 의지에서 나오는 사랑은 매한가지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자식을 낳지 않으므로 그 사랑의 의지가 사람이 아닌 다른 생물로 대체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의지는 늘 사랑할 대상을 찾아 흘러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로 흘러가지 못하는 ‘선한 의지’가 사랑의 대상을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들로 대체한 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심어 놓으신 선에 대한 의지를 잃은 인간은 진실한 사랑을 왜곡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가식적인 율법학자들을 비난한 글 다음에 “과부의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편집한 것은 편집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라는 표현을 “과부의 헌금이야기”가 정확하게 이어받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과부의 헌금 전부가 몇 푼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과부에게 자신이 가진 전부를 봉헌하라고 설교하고 가르쳤을 겁니다. 이것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은” 당시 율법학자들의 교묘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의 극히 적은 부분을 내도 과부 또는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헌금보다는 훨씬 많았으므로 늘 회당과 성전에서 대접을 받았고 또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헌금에 대한 선한 의지보다 액수의 많고 적음에 더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헌금의 액수보다 그 헌금의 질을 더 강조하신 것입니다. 헌금의 질은 과부의 선한 의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과부는 순진하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자신들의 아주 적은 부분을 주님께 바쳐도 늘 충분하다 생각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성전 권력은 자기 재산의 전부를 바친 과부보다 재산의 극히 일부를 바친 부자들을 더 칭송했습니다. 외적인 모양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늘 외향적인 것을 더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과부는 사회적으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헌금을 바치기보다 오히려 성전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계층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생활비의 전부를 바치도록 헌신을 강요한 성전 권력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들 안에 있는 선한 의지가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가난한 과부를 통해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그때 여러분이 화사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하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야고 2:2-4
우리의 선한 의지가 왜곡되면 야고보서가 말한 대로 “차별 대우”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차별”에는 “선”의 자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 혐오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선을 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을 택하는 순간 선한 의지는 인간 안에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의지와 함께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의지를 오직 자기 자신 만을 위해 사용할 때 인간은 생명력을 잃고 무기력과 자기 고립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외형적인 것에 더 잘 반응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외적으로 아름답고 균형 잡힌 것이 마치 “선”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미인대회에서 외형만으로 “진선미”를 가리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름다운 외형이 선한 것, 착한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진선미는 외형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습니다. 거짓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인 척 가장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오늘 과부처럼 두 렙톤을 낸 그녀의 선한 의지에 있습니다. 그녀는 물질적으로는 비록 가난했지만 내면에서 선이 충만하게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한 의지로 선의 충만함에 이르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오늘 읽은 복음서의 가난한 과부처럼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들입니까? 하느님의 축복을 간구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복을 받을 만한 선한 의지가 충만한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하느님과 사람에게 인색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너무 관대한 우리들이라면 우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의지를 완전히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의지는 끊임없이 타자에게로 흘러가는 나눔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한 선한 의지가 하느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향할 때 우리의 삶은 조금은 더 거룩한 경건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받기 전에 먼저 남을 대접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을 갈구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런 사람이 진실로 복을 받을 자들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우리와 함께하시어 우리 모두가 선한 의지가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32주 (나해) 1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은 교만한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자를 높이시나이다. 비오니,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의 삶을 봉헌하여, 주님께서 큰 권능으로 오실 때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룻기 3:1-5, 4:13-17
1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말했다. “악아, 이젠 너도 행복을 누리며 살 보금자리가 있어야겠구나. 내가 그것을 마련해 주마. 그렇지 않느냐? 2 너는 보아즈 댁 아낙네들과 어울려 지냈지만 그분은 너도 알다시피 우리와는 친척이다. 바로 오늘 밤 그분은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를 것이다. 3 그러니 너는 목욕을 하고 향수를 바른 다음 장옷을 입고 그 댁 타작 마당에 내려가 보아라. 그분이 저녁 식사를 마치기까지는 눈치채이지 않도록 하여라. 4 그분이 잠자리에 들거든 그 잠자리를 잘 알아두었다가 살그머니 가서 그 발치께를 들치고, 거기 누워라. 그 다음에 네가 할 일은 그분이 일러줄 것이다.”
5 “어머님 말씀대로 어김없이 하겠습니다.” 룻은 이렇게 대답하고, …
13 이렇게 보아즈는 룻을 맞아 아내로 삼고 한자리에 들었다. 야훼께서 점지해 주셔서 룻이 아들을 낳자, 14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축하하여 말했다. “오늘 이처럼 당신 가문이 대를 이어 내려가게 해주셨으니 야훼께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 이 아기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림을 받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15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며느리가 낳아준 아들, 아들 일곱보다 더한 며느리가 낳아준 아들이니, 이제 그가 당신에게 살 맛을 되돌려주고 노후를 공양해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그 아기를 받아 품에 안고 자기 자식으로 길렀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구나!” 하며 그 아기에게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요, 이새의 아버지였다.
성시_시편 127
1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
.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
.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
2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
. 밤늦게야 잠자리에 드는 것도,
¶ 먹으려고 애쓰는 것도, 다 헛되고 헛되니 ◯
.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 잘 때에도 배불리신다.
3 자식은 주님의 선물이며 ◯
. 태중의 소생은 그가 주신 상급이다.
4 젊어서 낳은 자식은 ◯
. 용사가 손에 든 화살과 같으니,
5 복되어라,
. 전통에 그런 화살을 채워 가진 자, ◯
.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
. 부끄러움 없으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히브 9:24-28
… 24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하늘의 참 성소를 본떠서 만든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그 하늘의 성소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는 해마다 다른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번번이 당신 자신을 바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26 그분이 몸을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 창조 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28 그리스도께서도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주셨고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이사 53:12
복음서_마르 12:38-44
38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40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41 예수께서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때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는데 42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이었다. 43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44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건의 자리”_2024.11.3. 나해_모든 성인의 날/연중31주일 (0) | 2024.11.03 |
---|---|
“그리스도의 용사들”_2024.11.2. 나해_토_모든 별세자의 날/제주우정교회 설립 22주년 (0) | 2024.11.03 |
“중재자(仲裁者)의 자리”_2024.10.27. 나해_연중30주일 (0) | 2024.10.27 |
“존재의 자리_부여된 자리”_2024.10.20. 나해_연중29주일 (0) | 2024.10.20 |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_2024.10.6. 나해_연중27주일 (성 피데스) (0) | 2024.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