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 다해_대림1주일
예레 33:14-16 / 시편 25:1-10 / 1데살 3:9-13 / 루가 21:25-36
“그때”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근대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사람입니다. 뉴튼의 주장대로 측정되고 계산 가능한 절대적 시간을 거부하고 그는 시간의 본질이 ‘지속(duree)’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시간은 시계의 초침에 의해 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계측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의식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보기에 시간은 공간으로부터 독립해 있으며 운동과 변화, 진화와 밀접하게 관계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시간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주관적인 시간을 인식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또한 이와 유사한 개념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시간은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에 따라 각각 다르게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뉴튼이 생각한 것처럼 공간 속에서 일정하게 계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 매우 상대적이란 사실을 제시한 것입니다. 자동차로 달리는 사람의 시간과 비행기로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이 각각 다르게 계측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운동과 속도가 시간을 변형시키는 것이지요. 일정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흐르는 순간의 총합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시간은 매우 다양한 변수에 의해 다르게 흐르고 다르게 인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는 학생의 1시간과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학생의 1시간은 분명 다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또한 일상에서 늘 경험하고 있는 일이 아닐까요?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단 10분도 1시간처럼 느껴지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도 시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때가 되면”
이 말씀은 재난의 때, 곧 마지막의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한 재난이 닥치면 어떤 징조들이 나타나는지 설명하는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시간은 바로 주님의 시간, 곧 “카이로스 Καιρός”입니다. 그것은 “크로노스 Κρόνος”와 같은 일반적인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고유한 시간입니다. 즉 하느님의 주관적 시간입니다. 우리가 그 시간을 뉴튼의 생각대로 이해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어떤 때일 겁니다. 그 시간의 길이는 일정하고 그 간격도 일정합니다. 그때가 되면 절대시간이 끝이 납니다. 역사가 끝나는 때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태오 사가는 이를 더욱 극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태 24:36
아들조차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라 매우 주관적인 하느님의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를 우리는 아무도 특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조차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때”는 매우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은 객관적이지 않고 매우 주관적입니다. 우리 각 개인에 따라 매우 상대적으로 하느님의 카이로스는 인지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인지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때”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인 죽음의 순간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갑자기 닥친 불행의 때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온 때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정해진 때가 매우 주관적이므로 우리는 그때를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과 유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시간을 설명하시면서 무화과나무와 계절의 변화를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때에 대한 “징조”는 우리 각 개인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징조”는 우리의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 속에서 인식되는 “징조”입니다. 이 “징조”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장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이면 모두가 알 수 있는 무화과나무의 때와 계절의 징조를 예로 드신 것입니다. “징조”는 우리의 일상에 닿아 있어서 조금만 관심을 갖고 살피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술에 매일 절어서 사는 사람에게는 알코올중독의 ‘징조’가 비칩니다. 자신의 수입보다 더 많이 돈을 흥청망청 소비하는 사람에게는 파산의 “징조”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을 늘어놓고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에게는 사기꾼의 “징조”가 보이는 법입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기 전에도 건물의 흔들림의 징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안전불감증이, 우리의 무관심이 그 “징조”를 묵살한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라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빛도 믿는 이의 경건함에 따라서 달라지지요.” 암브로시우스의 루가복음 해설 중에서
그래서 “징조”를 구분하고 각자에게 닥칠 “그때”를 준비하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각자의 “그때”가 갑자기 닥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두 사람이 똑같이 밭을 갈다가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남겨진다고 루가복음 17장은 말합니다. 여기에서의 차이는 단순히 선택받은 사람과 선택받지 못한 사람의 구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징조”를 구분한 자와 징조를 구분하지 못하고 때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자의 차이도 있습니다. 분명 둘이 똑같은 공간과 시간에 있었는데 카이로스는 둘의 운명을 이렇게 갈라놓습니다. 한 사람은 일반적인 시간, 크로노스를 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느님의 시간, 즉 카이로스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영적으로만 구분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징조”를 우리가 깨닫도록 네 가지의 지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루가 21:34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표현한 구문에서 사용한 동사는 “βαρέω바레오”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짓눌려 부담을 느끼는 상태를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이는 사람의 신체적 기능이나 정신적 반응 능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거움이나 억압감을 뜻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스트레스로 인한 강박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놓인 사람은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도 결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런 무감각의 상태는 이미 영과 육이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이렇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와 둘째에 해당하는 주의 사항입니다. 즉 방탕과 만취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흥청대며 먹고”의 뜻인 “κραιπάλη 클라이팔레”라는 헬라어와 “마시는 일, μέθη 메테”라는 헬라어는 모두 술과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절제하지 못한 방탕한 생활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무절제한 삶은 인간을 방종과 방탕으로 이끕니다. 그것은 결코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가 아닙니다. 이는 몸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각별히 주의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러한 방탕한 삶과는 반대로 매우 소극적인 삶을 경계하십니다. “세상 걱정”에 짓눌려 사는 것 말입니다. 내 돈이 없어지면 어쩌지, 내 몸이 아프면 어쩌지, 내가 원하는 것이 잘못되면 어쩌지 등등….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염려와 걱정을 더 심화시킴으로써 더욱 많은 소비를 촉진하는 마케팅을 교묘하게 하고 있습니다. 걱정과 염려가 심한 사람은 정말 엄청난 양의 영양제와 건강보조식품, 그리고 자신의 몸을 가꾸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그 몸을 지탱하는 영적인 것에는 전혀 시간도 물질도 공도 들이지 않습니다. 정작 우리의 진짜 죽음은 육신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걱정과 염려 속에 사는 사람이나 방탕과 무절제한 삶을 사는 사람이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은 것입니다. 방탕, 무절제, 염려, 걱정.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몸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뿌리인 영을 말라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뿌리가 건강하지 않은데 어떻게 우리의 몸이 건강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지 착시현상일 뿐입니다. 건강보조식품과 영양제들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염려와 걱정을 물리치는 영적인 평화와 몸을 방탕과 무절제에 빠지지 않도록 만드는 경건의 습관이 우리의 영과 육체를 동시에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네 번째는 “늘 깨어 기도하라”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늘 하느님을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아주 오래된 유행가 가사가 떠오릅니다. 현철 가수가 불렀던 노래이지요.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떠오르는 당신 모습 피할 길 없는 내 마음”. 떠나간 님을 그리는 이 애절한 마음이 곧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애인을 그리는 마음도 저렇게 절실한데 하물며 우리의 생로병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이러한 마음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우리의 전인격이 그분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한 번쯤 누군가를 연모하고 사랑했던 기억이 있으므로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잘 이해하실 겁니다. 그러한 깨어 있는 의식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흐리멍덩한 상태가 아니라 애틋하고 절실한 심정으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성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깨어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각자에게 다가올 그때의 징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조가 느껴질 때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절대로 되돌릴 수도 멈출 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해를 전례력으로 맞이합니다. 영적인 시간의 성화를 준비하는 때입니다. “그때”의 징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2025년을 맞이하길 바랍니다. 매일 똑같은 시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듯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하루가 짧고 누군가에게는 하루가 지루하고 깁니다. 이렇게 2025년 새로운 전례력은 여러분 각자에게 다른 시간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어떤 시간을 준비하고 계시든 여러분의 시간이 하느님의 시간에 맞닿아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대림1주 (다해)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밤이 깊을수록 새 아침이 더 가까워지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항상 깨어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경배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예레 33:14-16
14 나 야훼가 선언한다. 장차 내가 약속한 복을 이스라엘 국민과 유다 국민에게 그대로 내릴 날이 온다. 15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켜줄 그 날, 그 때가 온다. 그는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것이다. 16 그 날 유다는 살 길이 열려 예루살렘에서는 모두들 마음놓고 살게 되리라. 그 때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가리켜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셨음.’이라고 부를 것이다.
성시_시편 25:1-10
1 주여,
.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오며 ◯
. 나의 하느님, 당신만을 믿습니다.
2 그러므로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않게 하시고 ◯
. 원수들이 으시대지 못하게 하소서.
3 당신만을 믿고 바라면 망신을 당하지 않으나, ◯
. 당신을 함부로 배신하는 자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주여, 당신의 길을 가리켜주시고 ◯
.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소서.
5 당신만이 나를 구해 주실 하느님이시오니,
. 당신의 진리 따라
.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
.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
6 주여, 당신의 자비와 ◯
. 한결같으신 옛 사랑을 기억하시고
7 젊어서 저지른 나의 잘못과 죄를 잊어주소서. ◯
. 주여, 어지신 분이여,
. 자비하신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소서.
8 주여, 당신은 바르고 어지시기에 ◯
.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치시고
9 겸손한 자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
. 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10 당신의 계약과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
. 당신의 모든 길이 사랑이며 진리입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데살 3:9-13
… 9 우리는 여러분의 일로 해서 우리 하느님 앞에서 큰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 모든 기쁨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0 우리는 여러분을 다시 만나 여러분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게 되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11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잘 열어, 우리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12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키워주시고 풍성하게 해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를 빕니다. 13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해져서,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날,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복음서_루가 21:25-36
25 “그 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러나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볼 것이다(다니 7:13-14).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29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다. “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30 나무에 잎이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31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3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4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 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조심하여라. 35 그 날이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덫처럼 들이닥칠 것이다(이사 24:17). 36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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