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8.17. 다해_연중20주일
예레 23:23-29 / 시편 80:1-2, 8-9 / 히브 11:29-12:3 / 루가 12:49-56
“모 아니면 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윷놀이에서 윷 한 개가 뒤집어지는 차이뿐이지만 그 결과가 극명한 경우 사용하는 말입니다. 모는 5점, 도는 1점으로 차이가 큽니다. 선택에 따라 결과가 너무 극과 극으로 달라질 경우를 예상할 때 종종 이런 말을 씁니다. 물론 여기에는 내기를 거는 사람이 “모”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배팅”하는 거지요. 세상을 살다 보면 이처럼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그 운명이 극명하게 차이가 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명한 선택 후에는 후회해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두려움과 염려로 점집이나 무당을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자기 혼자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감당할 용기가 나지 않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요행을 믿어 보는 것이겠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이러한 극명한 선택을 매우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는 선택으로 그들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렸지요. 구약은 일관되게, 거칠게 표현하면, “모 아니면 도”를 선택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의 지역 신들과 야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모세도 이집트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미디안 장인 “이드로”가 섬기는 미디안 신들과 야훼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야훼는 이름도 없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분의 정체를 몰라서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고, 야훼는 “나는 나다”라고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출애굽 하여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토속신들과 야훼 간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야훼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흉년, 전염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야훼와 이방 신들 사이에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하나만 선택하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에서 언급한 구약의 인물들은 이러한 양단간 결정의 순간에 모두 야훼를 믿는 선택을 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선택. 그 갈림길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군대는 믿음이 없는 선택으로 홍해에 빠져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의 선택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여리고성의 창녀 라합은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선택했고, 대신 믿음이 없는 자기 민족을 배반했습니다.
오늘 복음서도 이러한 선택에 관한 극명한 표현들로 넘쳐납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불”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 불은 물론 구약적인 관점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예레미야 21장 9절은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말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처럼 생각됐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불”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즉, 복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마치 불이 세상을 집어삼키듯이 복음이 이 세상을 뒤덮기를 간절히 소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의 상징어 다음에 “주님이 받을 세례”에 대한 말이 이어집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상징어 구문들은 각각 따로 전승된 자료일 겁니다. 물론 출처는 모두 [예수 어록]입니다. 이 두 상징어 구문 이후에 “분열과 붕괴 현상”에 대한 예언 구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전반적으로 종말론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실 세례”는 물론 예수의 죽음을 뜻합니다. 역사적 예수도 삶과 죽음의 선택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셨습니다. 이 짧은 문장에는 선택의 순간에 역사적 예수가 느꼈을 비애와 고민이 모두 담겼습니다. 자기 죽음과 운명을 예견하고, 예수께서도 인간과 같이 매우 초조해하셨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을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가상의 육신을 가진 하느님이 아니라, 참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고통과 공포를 고스란히 느끼신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인성적 특징입니다. 이로써 십자가에서 고통받은 예수의 몸은 단지 환영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가현설주의자의 주장은 배격됩니다. 하느님의 아들도 선택의 순간에 이토록 괴로우셨다면, 하물며 우리같이 연약한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마지막 종말의 때에는, 묵시문학이 표현하는 대로, 이 우주의 붕괴 현상이 있을 것이라고 성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붕괴의 시작은 천지 만물의 붕괴와 더불어 모든 인간관계의 분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종말의 시작이므로 종말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인간 관계성의 붕괴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시스템인 가족의 붕괴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모든 사회관계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현상을 우리는 단순히 인구 감소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가족 관계가 붕괴했습니다. 자기 어머니와 가족들을 향해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냐?”(루가 8:19~21, 마르 3;31~35, 마태 12:46~50)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이제부터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혈족에 따라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가족관계가 새롭게 형성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하는 믿음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육신의 가족이냐 아니면 믿음의 가족이냐? 제자들도 가족과의 관계를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족 간에, 친구 간에 관계의 분열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 중 하나를 분명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예수 대 가족, 예수 대 부모님, 예수 대 배우자, 예수 대 자녀들… 이 말에는 둘 다를 취할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이 요청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악용하여 다양한 이단들이나 사이비종교가 사람들을 “가스라이팅”시켜 가정파탄, 가산탕진의 폐해도 있는 것입니다. 참 오해도 많고, 탈도 많고 해석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이러한 분열과 붕괴 현상은 예수 운동이 가진 독특한 특성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시하신 하느님 나라는 분명 당시의 세상 시스템과 극명하게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분법적인 접근은 늘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정반합(正反合)으로 결론에 이르는 헤겔식 변증론도 여기에서는 작동되지 않습니다. 일체의 타협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세상은 극명하게 구분된다는 것이 성서의 일관된 관점입니다. 거기에는 이 세상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이미 죄의 지배하에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하느님의 나라를 선택하든지, 인간은 분명한 양단간의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삶과 죽음, 부와 가난, 탐욕과 자기 비움, 이기심과 이타심… 마치 “강요”처럼 느껴지는 이런 표현은 종말론적인 급박함과 임박함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에 취할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서 “두 사람이 함께 맷돌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마태 24:41, 루가 17:35)는 표현은 종말의 급박함과 임박함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모 아니면 도”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가 12:51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모든 관계성의 붕괴를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정확하게 둘로 나뉩니다. 예수를 반대하는 편과 옹호하는 편으로. 물론 성서는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 선택의 순간에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분의 마지막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루가 12:50
“모 아니면 도”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 또한 예수께서 겪으신 그 고통과 고독, 두려움을 똑같이 느낍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러나 어떤 결단을 하는 순간에는 모든 사람이 가장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이 아닐지 생각됩니다. 가장 쉬운 선택에도 우리는 주저할 때가 많은데,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선택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우리는 결정적인 선택을 미루고 싶어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기독교를 공인했던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도 세례를 미루다가 마지막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의 선택은 분명 하느님의 뜻에 따른 선택이 돼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야훼 하느님이 그러했듯이, 우리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선택의 교리”를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갈라 1:15
이것을 사람들은 예정론이라 말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선택”이라 말합니다. 이는 운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선택을 “신비”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로나 예수의 제자들은 이러한 선택 받음의 의미를 알았기에 자기 자신을 예수님처럼 죽음에까지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 선 각 단독자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선택과 순종에 의해서만 확인하게 되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불”이라 표현하셨던 것처럼, 오직 성령의 불에 의해 양단간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는 불살라 버리는 불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도 전서 3장 13절~15절에서 마지막 심판의 순간을 이 “불”로 표현했습니다. 그 불은 우리가 귀하게 여겼던 모든 헛된 것들을 소멸시키는 불입니다. “마치 불을 거쳐 가듯” 살아남는 사람은 불 속에서도 살아남습니다. 그 불은 우리가 했던 모든 공적을 태워버리고, 오직 은총에 대한 감사만 남길 것입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루가 12:49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이 말씀에서 십자가 죽음을 앞둔 역사적 예수의 회한과 두려움 등과 같은 복잡한 심경이 느껴집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보고 아파하셨을 그분의 마음이 읽힙니다. “복음의 불”, “하느님 나라의 불”,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불”이 우리 안에 훨훨 타오르길 주님께서는 바라십니다. 오순절 제자들을 태웠던 성령의 불같이 우리의 일상이 이러한 불로 훨훨 타오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모든 욕망과 아집과 이기심이 이 성령의 불로 태워져 사라지길 바랍니다. 오직 은총으로,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훨훨 타오르길 바랍니다. 하늘과 땅의 징조를 알아봤지만, 그 시대의 징조를 무시했던 유다인처럼 되지 말고, 이 격변의 시기에 우리는 불을 통과하는 심정으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선택을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든, 무엇을 선택하든, 여러분의 능력이 어떠하든, 여러분이 가진 것이 얼마이든, 하느님의 선택 앞에서 절대 두렵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로 선택한 순간, 성령께서 여러분의 선택을 존중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0주 (다해) 1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구하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시어,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죄를 버리게 하시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끝까지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예레 23:23-29
23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 내가 가까운 곳에만 있고
. 먼 곳에는 없는 신인 줄 아느냐?
24 사람이 제아무리 숨어도
. 내 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 똑똑히 들어라.
. 하늘과 땅 어디를 가나 내가 없는 곳은 없다.
. 똑똑히 들어라.
25 예언자라는 것들이 내 이름을 팔아 예언하는 소리를 나는 다 들었다.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거짓말하는 것도 나는 들었다. 26 제 망상을 내 말이라고 전하는 이 거짓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제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내 말이라고 전할 것인가? 27 이 예언자라는 것들은 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내 백성을 속여 내 이름을 잊게 할 속셈이다. 그 조상들도 바알을 섬기다가 내 이름을 잊지 않았더냐? 28 꿈이나 꾸는 예언자는 꿈 이야기나 하여라. 그러나 내 말을 받은 예언자는 내 말을 성실하게 전하여라.
. 내가 똑똑히 말한다.
. 검불과 밀알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29 내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 똑똑히 들어라.
성시_시편 80:1-2, 8-9
1 이스라엘의 목자여,
. 요셉 가문을 양 떼처럼 인도하시는 이여,
. 귀를 기울이소서. ◯
. 거룹 위에 좌정하신 분이여,
2 에브라임과 베냐민, 므나쎄 가문 앞에,
. 햇빛처럼 나타나소서. ◯
. 힘을 떨치고 오시어, 우리를 도와주소서.
8 이집트에서 뺏어 온 포도나무 ◯
. 이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 자리에 심으시고,
9 그 앞의 땅을 가꾸시어 ◯
. 뿌리박고 널리 퍼지게 하셨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히브 11:29-12:3
29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집트 사람들도 그렇게 건너려고 했으나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30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으로 예리고 성을 이레 동안 돌자 그 성은 드디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31 창녀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자기 편처럼 도와주어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이 당하는 멸망을 같이 당하지 않았습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옙타,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다 하자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고 약속해 주신 것을 받았고 사자의 입을 막았으며 34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피하였고 약했지만 강해졌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35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돌아오는 식구들을 만난 여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더 나은 생명을 누리려고 석방도 거부하고 고문을 달게 받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습니다. 38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습니다.
39 ¶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제쳐놓고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2: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복음서_루가 12:49-56
49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50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51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한 가정에 다섯 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지게 될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다.”
54 예수께서는 군중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55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56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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