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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항상성”_2025.8.31. 다해_연중22주일

James Chae 2025. 8. 31. 06:55

 

2025.8.31. 다해_연중22주일

예레 2:4-13 / 시편 81:1, 10-16 / 히브 13:1-8, 15-16 / 루가 14:1, 7-14

 

 

양심의 항상성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히브 13:1~2

 

 

 

히브리 기자는 형제를꾸준히 사랑하라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에서사랑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저는꾸준히라는 말에 마음이 갑니다. “꾸준히 사랑하라라는 말을 직역하면형제 사랑 가운데 머물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메노우 μένω”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곳에 머물러 남는다”, “~ 머문다”, “어떤 상태나 조건을 계속한다”, “~견디다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상태를 조금도 흔들림 없이 꾸준히 지속하라는 뜻입니다. 상황이나 조건이 바뀌면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한번 형제에게 친절하면 조건이나 상황이 바뀌어도 친절함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바쁠 다르고, 한가할 다르면 그것은형제 사랑 안에 머무는 아닙니다. 사랑 안에 머문 상태를 꾸준히 이어갈 있는 . 이를 우리는사랑의 항상성이라 부릅니다. “항상성 생명체가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태를 안정적이고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특성을 뜻합니다. 형제 사랑도 어떠한 조건에도 변치 않는 항상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항상성은 우리 양심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양심에 따라 변함없이 형제를 사랑하다 보면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하는 축복도 받을 있습니다.

 

동물행동학진화 생태학으로 널리 알려진 최재천 박사의 [양심]이란 책의 시작 부분에는 TV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심 냉장고]라는 오래전 TV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번도 적이 없지만, 내용은 흥미로웠습니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교통신호를양심적으로 지키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런 양심적인 사람에게 [양심 냉장고] 선물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모든 사람이 신호를 지키지 않는 가운데, 지체장애인이 운전하는 차량이 새벽에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홀로 신호를 지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신호를 지켰냐고 진행자가 물었더니, 그는내가 지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도 핵심입니다. 어떠한 조건에도 변함없이신호를 지키는 것은 사람의 양심의 항상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양심이 행위의 동기입니다. 최재천 박사는 양심을차마, 어차피, 차라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양심이 우리 마음을 울릴 “‘차마' 외면할 없고, ‘어차피 일이라면, ‘차라리온몸으로 덤벼들자라고 그는 말합니다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교통신호를 지킨 운전사는 사회적으로 우리가 합의한 약속을 양심에 따라항상성있게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보든 말든, 누가 알아주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 양심의 울림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바로메노우라는 헬라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 가운데 변하지 않는 거처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곳이 하느님과 우리가 만나는 공간입니다.

 

“야훼여, 이 입에 문지기를 세워주시고 이 말문에 파수꾼을 세워주소서.” 시편 141:3

 

 

시편 기자가 표현한입에 문지기말문의 파수꾼 바로 우리의 양심에 대한 비유입니다. 최재천 박사는 우리의 일상에서 [양심]이란 말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했습니다. 저도 기억에 어렸을 때는양심이란 말을 매우 자주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양심 없는 사람이란 말은 어린 제게도 매우 모독적으로 느껴졌을 정도로양심 어린 마음에 도덕적 기준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저도 이런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이 사람들의 입에서 발화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양심 사회적 의미는 그대로인데,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의미가 사람에 따라 달라진 것인지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양심적인 사람이 매우 바보 취급을 받는 세상입니다. 양심이란 말이 지닌 보편적, 사회적 의미보다 이제는 발화자에게 맞춰진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로양심 의미가 축소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각 자기 마음에 합한 것이 양심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어른을 보고 인사를 하지 않는 행위는 매우 양심에 꺼려지는 행위였는데, 이제어른이란 의미도, 모르는 사람, 내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매우 개인적인 의미로 축소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어르신들을 마주하면 모른 피하는 것이 아주 익숙해졌습니다. 도시에서 지하철을 때는 자리에 앉으면 으레 눈부터 감는 것이 습관이 정도로 인색해진 자신을 보게 됩니다. 양심에 찔리지 않기 위해 눈부터 감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내면의 울림인 양심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양심에 대한 개인적인 정의가 강화되면서양심 대한 보편적 정의가 흔들립니다. 그래서 누구는 무단횡단을 해도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게 되고, 누구는 너무 쉽게 일회용 컵을 아무 데나 버립니다. 요즘 인터넷짤영상으로 종종 보게 되는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난폭운전과 보복 운전영상을 보면 우리 사회가 정말로양심 매우 자기 편의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아파트에서 경비원이 주차 딱지를 붙였다고 화가 나서 지하주차장 입구를 막고 시위하는 비양심적인 행동도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두가 보편적 양심이 아니라 각자도생하는 양심을 가진 같습니다. ‘공동체의 안녕과 정의 사라지고 모두가 개인의 안녕과 성공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히브리서의 권면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매우 진부하게 느껴질 것은 당연합니다. 모두 굳이 남을 의식하거나 양심을 논할 여유가 없습니다. 체면은 이미 사라진 오래입니다. 자신이 아쉽지 않으면 먼저 남을 배려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쉬운 사람이 현대사회에서는 먼저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되라고 권면합니다. 부담스럽습니다. 자신도 양심대로 행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이런 말씀을 설교로 선포해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당대에 유식하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사들 그리고 제사장들도 전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았지만, 시기심과 질투심에 애써 그분의 말씀에 적대적이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에 적대적이진 않았지만 대신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복음서는 여러 군데에서 제자들이 예수의 말을 전혀 이해 몰이해 이야기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자기의 죽음을 예언했을 , 뜻을 몰랐던 수제자 베드로는 그럴 없다고 예수를 만류하다가사탄이란 소리까지 주님께 들었습니다. 사실 예수의 제자들의 이해력은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여러 면에서 부족했습니다. 그들의 출신이 그랬고, 그들의 경험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오해할 때가 무척 많았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오시기 전까지 주님의 말씀을 완전히몰이해했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의 지혜대로 제대로 움직인 것은 오직 성령의 도움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자들은 알면서도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혔던 당대 엘리트들보다는 나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야기] 예로 들어 우리의 양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물론 많은 교부들이 말씀을겸손 대한 가르침으로 해석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허영을 추구하지 말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의 삶을 본받아라라는 권면으로 해석했습니다. 물론 말씀은 겸손을 전제로 하지만, 저는 여기에서 우리 양심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것은 우리 양심에 찔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남보다 대접받고 싶고, 남보다 위에 서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입니다. 이러한 본성은 사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기심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기심을 악용하는이기주의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심이 우리 양심의 통제를 벗어났을 때는 문제가 됩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성을 깨뜨리고, 자기의 체면조차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 어려우면 차선책으로염치라도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움 때문에라도 하고 싶어도 없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부끄러움으로 드러난 것이염치라고 합니다. 염치는청렴할 , 부끄러울 입니다. “염치 체면이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수치심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수치심,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나 행위는 우리 양심에 꺼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양심이 없다면, 최소한염치라도 있으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먼저 겸손해지라고 가르치십니다. 양심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는염치 호소하신 것입니다. 겸손한 선한 양심대로 모든 인간이 행동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러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차라리 수치를 피하고자 하는 염치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친절한 대접을 베풀었으면 절대로 돌려받을 생각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형편이 되지 않아 절대로 은혜를 되돌려줄 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라는 뜻입니다. 남에게 받을 생각으로 선을 베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히브리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지침이 됩니다. 이를 히브리서는형제 사랑이라 말합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말씀에서형제 사랑, “나그네 돌봄, 학대받는 교우 돌봄, 간음 금지, 자족하는 마음등으로 요약됩니다. 결국 교회 내에서 형제의 필요를 돌봐주고 서로 돕는 일을 게을리 말라는 권면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말하는공동체의 양심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 사랑을 하지 못할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어떨 때는 그것이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우리의 양심은 계속해서 그를 위해 기도하라 하고, 남의 아픔을 품으라 하며,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러한 음성에 조용히 귀를 막고 싶어집니다. 오히려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서로 대면하지 않는 편을 택합니다. 공동체의 양심에 따라 형제 사랑할 힘이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 생전에 번도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줬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누가 높으냐를 따지며 서로 티격태격했다는 이야기뿐입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오시기 전에는 전혀 서로 사랑할 없었습니다. 위대한 제자들도 형제 사랑을 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감히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힘으로는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에 굳은 용기를 주시면 가능합니다. 원수 사랑이 형제 사랑으로 바뀌어지는 것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물리적룩스(Lux)”에서 거룩함을 덧입은루멘(Lumen)”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같은 빛이지만 거룩함을 덧입으면 영광의 빛이 됩니다. 우리의 양심도 성령의 은총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의 은총의 신비 없이는 결코 우리는 형제 사랑을, 공동체의 양심을 회복할 없습니다. 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없습니다. 하늘이 나도 우리 힘으로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양심 안에 머물게 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 역사하시도록 기도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오직 은총으로 우리의 양심을 통해 형제를 사랑할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상호 사랑, 상호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인간의 의지대로, 인간의 상식대로 행동하다 보면 오히려 일이 그르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기도하십시오. 기도 없이 하느님의 역사는 절대로 이루어질 없습니다. 속으로 일상에서 아무 때나 드리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선별하여 하느님께 다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우리 성공회에는 [아침기도] [저녁기도] 좋은 기도의 전통이 있습니다. 이러한성무일과 우리 성공회 영성의 가장 근간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선별하여 거룩하게 하기. 이를 통해 맹자가 말한양기(養氣)”지언(知言)” 수양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몸의 수양법은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연중21주일 설교문을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우리 안에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양심의 항상성과 부동심이 길러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말과 행위가 거룩함을 덧입을 것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우리 양심의 눈으로 제대로 보고 분별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은총을 우리 모두에게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연중22 (다해) 1

 

 

본기도

하느님, 주님은 죄인까지도 사랑으로 부르시어 계약을 맺으시나이다. 비오니, 땅의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믿음의 가족이 되어 하느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예레 2:4-13

4 야곱 가문, 이스라엘 가문 갈래는 야훼의 말씀을 들어라.
야훼가 말한다.
.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     너희 조상은 나를 멀리하였더냐?
.     너희 조상은 허수아비를 따르다가
.     허수아비가 되지 않았더냐?
6   이집트에서 우리를 데려내오신 야훼,
.     메마른 모래땅, 가물어 풀도 나지 않는 ,
.     사람의 그림자도 어른거리지 않는 ,
.     사막에서 이끌어주시던 야훼께서 어디 가셨을까?’ 하며
.     나를 찾는 자도 없었다.
7    나는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이끌어들여
.     좋은 과일을 먹게 했는데
.     너희는 들어와서 나의 땅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     땅은 나의 것인데 너희가 더럽게 만들었다.
8    사제라는 것들은야훼께서 어디에 계시냐?’ 찾지도 않았다.
.     전문가라는 것들은 나의 뜻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     백성의 목자라는 것들은 나를 거역하기만 하였다.
.     예언자라는 것들은 바알의 말이나 전하며
.     아무 데에도 쓸모없는 것들만 따라다녔다.
9    그러므로 나는 다시 너희와 따지리라.
.     이는 말이니, 어김이 없다.
.     너희 후손과도 따질 것이다.
10  지중해의 섬나라들에 건너가 보아라.
.     케달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아라.
.     이런 일이 과연 있을 있는가를.
11  어떤 민족이 섬겨오던 신을 바꾸어
.     신도 아닌 것을 섬기는 일이 있더냐?
.     그런데 백성은 영광스럽게 모실 나를 버리고
.     아무 데도 쓸모없는 것을 잡았다.
12  하늘도 놀랄 일이다.
.     기가 막혀 몸서리칠 일이다.
.     이는 말이니, 들어라.
13  나의 백성은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리고
.     갈라져 새기만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팠다.

 

 

 

성시_시편 81:1, 10-16

1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께 즐거운 노래를 불러 드려라.
.     야곱의 하느님께 환성을 올리어라.
10너희 하느님은,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야훼 하느님이다.
.     다만 입을 크게 벌려라, 내가 채워주리라.”
11그러나 백성은 나의 말을 듣지 않았고
.     이스라엘은 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마음을 굳은 대로 버려 두어
.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였다.“
13 백성들아, 제발 말을 들어다오.
.     이스라엘아, 나의 뜻을 따라 걸어다오.
14  그리하면 당장 너희 원수들을 쳐부수리라.
.     당장 너희 압제자들에게 손을 대리라.
15  주님의 원수들이 너희 앞에서 아첨하게 것이니
.     그들의 운명은 돌이킬 없으리라.
16  그러나 백성은 기름진 밀가루로 먹이고
.     바위에서 따낸 꿀로 배불리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히브 13:1-8, 15-16

1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2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3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4 누구든지 결혼을 존중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음란한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5 돈을 위해서 살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주님께서는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겠고 버리지도 않겠다. 신명 31: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6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     “
주께서 편을 들어 도와주시니
.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    
누가 감히 나에게 손을 대랴!”
.  
  시편 118:6
7
하느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일러준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의 입으로 찬양합시다. 16 좋은 일을 하고 서로 사귀고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런 것을 제물로서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복음서_루가 14:1, 7-14

1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의 지도자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7 그리고 예수께서는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다. 8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혹시 너보다 높은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이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끝자리로 내려 앉아야 것이다. 10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여보게, 윗자리로 올라 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너는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것이다. 13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14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