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신학이야기

왜 기독교 미술인가?_2007년

James Chae 2011. 12. 16. 02:49


왜 기독교 미술인가?

기독교와 현대미술의 새로운 관계성 찾기 

 

채창완

 

*여기에 실린 도판들은 참고자료로 진흥아트홀의 허가 하에 사용한 것입니다. 이 사진들의 모든 저작권은 작가 본인에게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상업적 사용은 민형사상의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음을 밝힙니다.

 

 


▲ 가은영 



 

 


 

들어가는 말

 

먼저 용어의 정의부터 하고 넘어가자. 미술사에서 ‘기독교 미술’이라 하면, 물론 그 기원이 카타콤의 벽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보통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경부터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 중세 미술을 일컫는데 사용된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러한 미술사적 의미로 “기독교 미술”이란 용어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날 창작을 하는 모든 기독자 작가들도 이러한 의미로 자신들의 작품을 “기독교 미술”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아는바 대로 ‘기독교 미술’이란 용어는 ‘기독교’와 ‘미술’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기독’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우리말 음역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존재를 신앙하고 따르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신학적으로 기독교의 핵심인 ‘기독론’ 즉 ‘그리스도론’에 그 뿌리를 둔다. 그러면 ‘미술’이란 말은 어떤가? ‘미술’은 시각적 미를 추구하는 예술의 한 분야이다.



 

▲ 강성용시선 위반자, 50x60cm 

 

 


 

 

그러나 여기에 ‘현대’라는 말이 붙어 ‘현대미술’이 되면 단순한 미술의 정의를 넘어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칼 융이 이미 지적한 것처럼, ‘현대’는 지금 동시대와 같은 시간적 의미라기보다는 과거와 전통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재의 문제들을 반영하며, “세계의 바로 그 낢에 서서 “미래의 절벽”을 바라보게 하는 그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대 미술’은 과거와 전통의 한계 내에서만 존재했던 기존의 미술을 포기하고, 현재와 미래의 인간 실존을 고민하는 과정 가운데 나타난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 할 때, 여기서 사용하는 ‘기독교 미술’은 바로 ‘기독교’와 ‘현대미술’의 합성어가 된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두 용어의 만남은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절대적 가치와 보편성을 추구하는 ‘기독교’와 상대적 가치와 개인의 자유와 표현을 주장하고, 대상의 ‘절대적’ 재현을 거부한 ‘현대 미술’이 어떻게 함께 어울릴 수 있을까? 이전에는 ‘기독교 미술’이란 말이 하등 문제가 없었지만 최소한 현대 문명에서는 분명 두 용어의 결합은 어색해 보인다.

 

 

 

▲ 김경주쉽지않다 그러나 재밌다, 129x72cm 

 

 




사실 현재 기독교 미술인들 사이에서도 ‘기독교 미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다. 혹자는 미술적 관점에서 기독교 미술을 논하고, 또 혹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미술을 논한다. 전자는 미술의 형식과 표현에, 후자는 기독교적 신앙에 더 무게를 둔다. 그 결과 전자의 경우는 형식과 미적 표현에 있어서 일반 현대미술과 다름이 아니고, 후자의 경우는 주제 면에서는 깊은 신앙심을 드러내나 표현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많은 한계를 보인다. 이와 같이 ‘기독교 미술’의 정의가 모호한 관계로 현재 매우 다양한 양상들이 전개되고 있다. 미술에 관련하는 기독자들 사이에서도 더욱 혼란만 가중되고, 결국 각자가 ‘기독교 미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필자는 이러한 혼란이 기독교 미술에 대한 신학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해 몇 가지 언급을 하고자 한다. 필자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미리 밝힌다.

 


 

1. 기독교와 현대미술의 재회: “신성의 원리와 솔직성의 원리

 

오늘날 현대미술과 기독교의 어색한 관계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교회의 책임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개신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 개혁 이후, ‘눈의 강조로부터 귀의 강조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 그 한 원인이다. 말씀과 설교가 중심이 된 개신교는 ‘듣는 말씀’, ‘듣는 성갗 등에 너무 의존했다. 그 결과 ‘설교’나 ‘성가'와 같이 ‘귀’와 관련된 것들이 발전하고, 결과적으로 시각적인 부분의 퇴화를 가져온 것이다.


 

 

▲ 김승희상실JF89, 37x104cm 

 

 


 


물론 그러한 원인에는 ‘우상 숭배’에 대한 기독교의 알레르기 반응도 한 몫을 한 것이 사실이다. “눈의 예술의 거부의 배후에는 우상 숭배로의 타락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존재한다”고 틸리히는 밝힌바 있다. 물론 ‘귀’ 보다는 ‘눈’이 우상 숭배의 타락에 더 가까울 수 있지만, “다차원적 통일성”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적, 영적 차원’이 결코 ‘듣는 것’에 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말’과 ‘소리’로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사에서 ‘눈의 예술’이 사라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교회와 현대 미술의 재회는 다시 가능한가? 이에 대해 틸리히는 매우 긍정적인 전망을 내 놓는다. 현대 예술의 표현적 성향이 기독교 예술의 재탄생을 위한 좋은 기회라고 그는 주장한다.

 

“표현된다면, 그것은 이미 초월된 것이다”.

 

그의 이러한 표현은 결국 죄인이 죄를 고백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기독교적 원리와 상통한다.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짐’을 받는 것은 ‘회개’라는 ‘표현’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표현의 영역에 자리하는 예술은 이미 “궁극적인 존재’와 그 자리를 공유하는 것이다.


 

 

 ▲ 김은기, Trudi & Pia, oil on canvas, 91x117cm

 

 


 

또한 그는 ‘기독교 예술’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원리를 설정하는데, “신성의 원리(principle of consecration)”와 “솔직성의 원리(principle of honesty)”가 그것이다. 전자는 교회가 예술가들에게 요구하는 정당한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교회의 요구”이며, 후자는 예술가의 예술적 양심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예술가의 정당한 요구”와 관련한 것이다.

‘신성의 원리’는 기독론과 연결되며, 결국 딕슨이 말한 성육신에 대한 ‘교회의 감수성’과도 관련한다. 그러한 ‘감수성’은 교회와 예술이 만나는 한 지점을 형성해 준다. “신성의 원리”가 너무 작가들에게 강조될 때, 교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성향이 드러나게 되고, 예술가의 창작에 대한 자유는 교리에 의해 철저히 무시된다. 이러한 성향들은 이미 중세 미술을 통해 확인된 바이다.



 

 

▲ 김재임부활의 봄, 220x600cm 

 

 


 

 

반면 “솔직성의 원리”는 이러한 예술의 경직성을 풀어주고, 작가의 창작에 무한한 영감과 자유를 부여하는 원리이다. 교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요구에 작가는 이러한 “솔직성의 원리”에 근거하여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창조성의 근원을 알고 있는 기독교는 더욱더 그래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양심과 창조성에 솔직해야만 한다.

그러나 “솔직성의 원리” 만으로는 ‘교회의 감수성’에 예술은 결코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솔직성의 원리”는 이미 현대 예술 작가들에게 무한정으로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솔직성의 원리”를 강조하다 보면, 양식적으로나 감수성 면에서 일반적인 현대 미술과 기독교 미술의 구별이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럴 경우 그냥 현대 미술이라 하면 되지, 굳이 ‘기독교 미술’이란 말을 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 김혜주꽃을 닮은 코뿔소, oil on canvas 97x26cm 

 

 


 

  혹자는 꼭 구별과 차이가 있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형식적인 차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적인 차이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론이 중심이 되는 교회에 미술 작품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교회의 감수성’과 소통할 양식이 필요함은 당연할 것이다. ‘양식’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 미술’이란 말을 어떤 창작품에 사용해야 한다면 최소한 “신성의 원리”와 “솔직성의 원리”만큼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 박설매화해-1, 72.3x65cm

 

 


 

 

 2.양식으로서의 기독교 미술

 

여기서 앞에 했던 질문을 다시 상기해보자. 왜 ‘미술’이란 말에 굳이 ‘기독교’를 붙여야 하는가? 이는 ‘양식’에 관련된 질문이다. 모든 작품들은 특정한 “주제”와 “형식”, 그리고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 세가지는 상호 연관성이 있다. 이 중 어느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떤 창작물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어렵다. 또 그러한 것이 결여된 창작품은 작품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어렵다.

“주제”는 “형식”에 의해, “형식”은 “양식”에 의해 각각 제한된다. 특히 여기서 “양식”은 한 시대의 많은 창작들을 “하나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정의하는데 유용하다. 그래서 우리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과 같은 분류로 한 시대의 작품들을 양식사적으로 정의한다. 물론 이러한 양식사적 역사 서술이 근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과거 한 시대의 예술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결국 “양식”은 한 시대의 작품들 속에 드러나는 어떤 “보편성”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보편성”은 “그 시대의 궁극적 관심”이 무엇이었는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 박정희찬송, watercolor on paper, 36x26cm, 2000

 


 

 

이와 같이 “양식”은 “형식”보다 더 폭넓은 개념이고, 모든 창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해 내는 것과 연관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기독교 미술”은 어떠한가?

지난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기독교 미술”에 대한 담론과 창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아직도 전체를 아우르는 이러한 “보편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공통점이 있다면 작가들의 창작에 대한 ‘신앙고백적’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두에서 이미 언급한 것 같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각자 자신들의 관점만을 말하고,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미술”이란 말에 “기독교”를 덧붙이려면, 우리는 최소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독론적인” 보편성과 이에 근거한 “교회의 감수성”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성육신 사건)”과 “행하심과 가르치심”, “고난 받으심”,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하심” 등과 관련한 교회의 고백은 이천 년 동안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 “보편성”과 “정당성”을 지켜왔다. 그 “보편성”은 다른 말로 “복음”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핵심축이며, 예배 때 우리의 “감수성”을 움직이는 요소들이다.



 

 

▲ 서영원겨울길 

 

 


 


메마른 우리의 “감수성”을 깨우고, 영적인 각성을 하게하는 성령의 역사는 이러한 복음의 보편성 위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미술”이 결합된 용어를 우리가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론의 신학적 근거 위에서 말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교회의 중심축일 뿐만 아니라 유무형의 교회를 하나로 묶는 매우 중요한 연결 고리이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우상숭배”와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그 동안 “눈의 예술”을 멀리 했지만, 이제 “돌아온 탕자(?)”를 품듯이 교회가 “미술”을 다시 품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교회와 미술의 재회에는 교회와 미술가들에게 동일한 책임이 요청된다.

교회는 “중세 교회”의 미술에 드러난 교리적-전체주의적 성격을 다시 답습하지 않기 위해 작가들의 “솔직성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반대로 작가들은 “신성의 원리”를 어떻게 자신의 창작 속에 적용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교회의 요구에 끌려갈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고유한 창조성에 입각하여,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솔직한” 창작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 또한 작가들의 “솔직성의 원리”를 적극 수용하여 이를 “신성의 원리”에 적용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 옌민선한목자, 61x50cm 

 

 


 

3.현대미술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지금까지 “기독교 미술”에 대해 언급했다. 그렇다면 이제 “미술” 즉 “현대미술”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기독교 미술”이란 말에 이미 “현대 미술”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앞에서 밝혔다. 그러나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현대 미술”에 대해서 편안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 만큼 현대 미술은 우리 시대의 감수성을 거스르는 것 같은 모양을 취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그것이 현대사회의 모순들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현대 미술은 이 시대의 존재의 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스 로크마커는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에서, 현대 미술(또는 예술)의 “신비주의적 요소”와 “허무주의적 요소”를 비판하면서 (물론 그의 신비주의에 대한 비판은 신비주의와 주술신앙을 혼동한 신학적 무지에서 오는 것이지만), 이러한 현대 미술의 ‘급진성’을 현대 예술의 “죽음”이란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비판한 바 있다. 그는 톨스토이와 유사하게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기독교가 인간의 삶을 갱신하듯이 기독교 미술이 “나쁜 예술”을 갱신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유명애찬양4, 24X35cm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이 다분히 ‘신앙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고,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학적이고 일반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주관적으로 치부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핀리 에버소울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현대 미술을 현대 문명의 비극과 상처의 한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준 우리의 극한 상황의 이미지들과 상징들은 성령의 ‘전도된(inverted)’ 상징들이다.

그의 이 같은 표현에는 강도 맞아 상처받은 이를 품었던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상처받은’ 현대 예술을 품고자 하는 소망이 들어있다. “성스러움의 변증법”이라 할까……그는 짙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희망을, 즉 기독교 미술의 가능성을 현대 미술 속에서 찾는다. 그에 앞선 폴 틸리히도 현대 미술의 ‘표현적’ 성향 속에서 기독교 미술의 가능성을 피력한바 있다.



 

 

 ▲ 이민전이된 시선종이 위에 디지탈프린트

 

 


 

“궁극적인 존재는 현실에 체험될 뿐 아니라 현실과의 만남 그 자체가 체험되어지는 체험들 속에 존재한다…….(중략)…….그리고 궁극적인 것은 현실의 잠재적인 완전성이 예견되고 예술적으로 표현되는 현실과의 그러한 만남들 안에 존재한다.

그는 현대 미술의 표현적 요소가 기독교와 만날 특별한 지점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현대 미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감수성과 아픔들, 그리고 상처받고 메마른 영혼들의 존재론적 위기를 우리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인의 존재의 위기를 우리는 그 속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곳이 바로 우리가 품어야 하는 선교적 비전의 장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이 현대 미술을 거시적이고 ‘계시적인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계시적’이라 함은 이 시대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성령의 역사’와 관계한다.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현대 미술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미술”은 “현대 미술”을 품에 안고, 그 속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보편적인 요소의 지점에서 “기독교”와의 만남을 시도해야 한다.


 

 

 

▲ 이에스더  

 

 


 


나오는 말

 

“현대는 중세를 닮아간다”고 했던가? 에코의 말이다. 그는 현대 문명을 비판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사용했지만, “기독교 미술”의 부흥을 꿈꾸는 자에게 이러한 말이 솔깃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물론 “기독교 미술”이 중세의 것을 다시 답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 탈합리주의, 탈중심, 신자본주의, 신제국주의 시대에 새롭게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사람들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기독교’에 집중되지 않고, 다른 종교로 옮겨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그 만큼 종교나 영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현대 예술은 이러한 사람들의 갈증에 끊임없이 응답하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해가고 있다.



 

 

▲ 이종경여름꽃, oil on canvas, 166x89cm, 2004 

 

 


 

 

그러나 교회의 현 실태는 그다지 역동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선교’와 ‘전도’의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더라도, 왠지 그러한 것이 복음을 오히려 퇴색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교세 확장’에 혈안들이다. ‘보수적’이란 말이 ‘보전하여 지키는 것’이라면 이제 더 이상 교권과 교세를 보전하고 지키기 보다, ‘복음’의 원래의 의미를 지키고 보전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개신교가 미술에 소홀했었던 만큼 이제 관심을 기울일 때가 아닐까? 현대 예술이 ‘어두움’이나 ‘죽음(?)’ 가운데 있다면, 이제 새로운 희망을 그 재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예술가들의 창작을 지원하고, 예술가들은 현대 예술의 장 속에서 자신들의 창작의 영역을 넓혀가며, 또 역으로 교회는 그러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교회 내에 적극 수용하는 그런 시스템의 구축은 과연 한 사람의 이상으로만 남을 것인가?



 

 

 ▲ 이효임, Autumn98, 30x45cm

 

 


 

 

 

 ▲ 장량, Prayer8, 105x160cm

 

 


 

 

 

 ▲ 장인희 

 

 


 

 

 

 ▲ 홍주혜, Vines, 180x9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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