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9.14. 다해_연중24주일_창조절기(Creationtide)
예레 4:11-12, 22-28 / 시편 14 / 1디모 1:12-17 / 루가 15:1-10
“하나의 전체로서의 창조와 구원”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창세 1:28
가나안 신앙의 시작을 담은 우가리트 창조 설화나 고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문명의 창조 설화들은 창조에 관련된 매우 오래된 기록들입니다. 이러한 설화들은 모두 당시의 “삶의 자리”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왕과 귀족, 사제 집단 그리고 평민들과 노예로 구성된 신분 사회를 그 배경으로 합니다. 왕의 절대권력은 신과 사제 집단을 통해 신성시되고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통합된 문화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당연히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왕의 모든 권위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인간을 노예처럼 다스리는 것이 정당해지기 때문입니다. 고대 문명의 거대한 건축과 토목의 문화는 바로 이러한 착취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수메르의 창조 설화인 “에누마 엘리시”는, 인간은 신과 왕 그리고 귀족 집단을 섬기도록 창조된 소모품처럼 취급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신들의 몸이 분리되어 형성됐고, 이러한 모든 것들이 개미집단처럼 인간을 신분으로 구분 짓고 통제하는 시스템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 세계 고대 창조설화들이 하나의 맥락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창세기를 포함하여 모든 원시 창조 설화의 이야기에는 공통으로 “세계를 보존하고 삶에 안정을 제공해 주는 기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문명”이라 부릅니다. 노예 제도이든, 신정국가이든 창조 설화는 당 시대 인간 실존을 여가 없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창조 설화인 곰과 호랑이 이야기는 곰을 숭배하던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던 토템 신앙이 어떻게 양자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단군”을 중심으로 한 “샤머니즘” 사회로 진화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화를 단순히 신화 취급을 하여 아이들의 우화나 동화 정도로 그 의미를 격하시키는 것은 과거 문명에 대한 정보와 인간 성찰의 고리를 놓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창세기의 가장 위대한 점은 해와 달과 같이 자연을 숭배하는 것이 보편적인 시대에 그들이 섬겼던 천지 만물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선포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달을 밟은 모험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신의 몸에서 분리된 해와 달과 산과 바다가 아니라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란 선언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신적 권위를 찾았던 고대 사회를 보이지 않는 세계로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왕과 귀족을 섬기도록 창조된 인간의 노예적 실존이 이제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존재론적 승격이 이뤄집니다. 인간은 노예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권위가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의 존엄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이 바로 야훼 신앙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그 당시 다른 어떤 국가 시스템에도 어울릴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를 태생적으로 지녔던 민족입니다. 이러한 구분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의 복이 왕이나 귀족에게 한정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하느님의 복은 모든 인간과 자연에 공통으로 주어졌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축복에 이어 “땅을 정복하라”, “모든 짐승을 부려라”라는 축복을 명령으로 받았습니다. 공동번역을 약간 유하게 표현하면 “땅을 복종시키고”, “짐승들을 다스려라”가 됩니다.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고 돌과 잡초로 무성한 땅을 개간해야만 인간이 땅의 관리자가 되고, 그 소출로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로써 인간의 문명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짐승들을 다스린다는 말은 아담이 그들의 이름을 붙여준 것처럼, 그들을 관리하고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축복은 인간과 동물에게만 내려진 공통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식물에 대해서는 그러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과 동물 간에 상호 밀접한 관계성이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할 의무와 축복을 함께 받은 동반자 관계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창조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분류하여 이해하기보다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내용들은 이 세상이 “하나의 전체”로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와 달, 나무와 동물이 객체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전체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선한 의지에 합목적성을 동일하게 지닌다는 뜻입니다. 서구 르네상스 이후 인류는 인문학과 과학이 발전하면서 전체보다는 하나의 객체에 더 집중하는 편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도 매우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진 것이지요. 그 이전에,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한 개인의 실존은 씨족 체계 안에서 규정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개인보다는 가문이나 문중이 중요했지요. 과학적인 연구 방법도 모든 것들의 차이와 연속성을 구분해 내는 데 집중을 합니다. 하나의 대상을 각 객체로 분류하고, 차이와 유사성을 따지고, 성분을 분석하며 물질이 가진 특성을 객체화시켜 연구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전체”를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데 매우 둔해졌습니다. 그래서 전체보다는 “부분”이, 공동체보다는 “나”라는 개인이 더 중요하게 된 것이지요. 서구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한 이래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 객체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고 분석해 왔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중심이 “나”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인식의 진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적 사고”를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내가 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 ‘남들이 어떻게 되든 나만 잘되면 돼’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요즘은 너무 보편적입니다. 자신이 쓴 시나 글의 저작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성서가 써질 때에는 저자보다 그 당시에 권위 있는 사람의 이름을 책 제목으로 쓰는 것이 더 영광으로 여겼던 시대였습니다. 자기 창작물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나 가문의 어른 이름, 또는 권위를 가진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지요. 그것이 그 시대에서는 영광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스스로 쓰는 것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는 이러한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창조의 시작과 현재의 과정 그리고 다시 있을 새 창조까지 이러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언약에 근거한다고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모든 존재는 그분의 선한 목적에 합하게 창조되었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표현대로 모두가 창조라는 전체 속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객체는 전체 속에서 보존이 되고, 전체는 하나에 의해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객체와 전체는 상호보완적이며 상호완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도 이러한 통합적 사고 위에서 이해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가 전체를” 이란 말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 했던 당시에 대사제였던 “가야파”의 말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렇게도 아둔합니까?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 요한 11:49~50
이런 개념을 사람들은 “공리주의”라고 부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한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한 근대의 개념이지요. 근대의 개념이라고 하지만, 이미 고대에서부터 있었던 개념입니다. 고대 종교에서 “인신공양”을 했던 전례들도 바로 이러한 개념 때문이지요.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은 자신의 딸을, 승리를 위해 신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의 희생으로 전체를 구하려 했던 거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전체를 위한 한 개인의 희생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가 전체를 위해”는 강조하면서, “전체가 하나를” 위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전체가 하나에게도, 또 하나가 전체에게도 상호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이러한 배경을 “삶의 자리”로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루가 15:4
세상에 누가 양 한 마리를 잃었다고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버려두고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겠습니까?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데, 어떻게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가겠습니까? 최소한 이웃 목동을 불러서 나머지 양들을 지키게 한 후에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게 상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상식에 어긋난 극단적 비유를 “특례 비유”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에 대한 극단적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메시지의 전달 효과를 극대화한 방법입니다. 일종의 충격요법이라고 할까요? 이런 비현실적인 비유를 주님께서 든 이유는 바로 전체로서의 통합적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가 전체를, 전체가 하나를” 상호 지향할 때 창조가 “하나의 전체로서” 창조되었듯이 구원 또한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분명 창세기 이후에 두 번째 창조와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가 “하나의 전체로서” 이루어졌듯이, 구원도 “하나의 전체로서” 통합적인 어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백 마리의 양은 전체입니다. 그러나 하나가 빠진 아흔아홉 마리로서는 전체가 아닌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아흔아홉 마리는 잃어버린 하나를 충족해야 완성에 이르고, 한 마리는 아흔아홉 마리가 있어야 전체로서 구원에 이릅니다. 한 마리와 아흔아홉 마리는 양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하느님의 의미론적 관점에서는 하나이든, 아흔아홉 마리이든 불완전한 것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구원받으면 나머지 아흔아홉이 위험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아흔아홉 마리에 의해, 아흔아홉 마리는 하나로 인해 각각 “전체”를 완성하게 됩니다. 은전 열 닢도 이와 같은 개념입니다. 은전 열 닢은 구원의 완성을 뜻하는 완전수입니다. 여기에서 한 닢이 없든, 아홉 닢이 없든 구원은 똑같이 불완전한 것이 됩니다. 은전은 열 닢이라는 “전체”로 있을 때 완전합니다. 이것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를 관통하는 “전체적, 통합적 사고”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우리는 단지 공리주의적 희생으로 격하시키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하셨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 곧 아흔아홉 마리인 우리 모두의 죽음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하지 못합니다. 그냥 그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감사하다 정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위해 잘 죽지 못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우리의 죽음이고,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부활입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주님께서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이시고, 우리는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될 때, 그분의 부활도 우리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개역성경의 번역이 좀 더 시적이라 개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 2: 20
사도 바울로는 항상 이런 통합적인 사고를 지녔던 사람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와 통합된 존재라는 것. 이것이 그가 예수를 만난 후에 갖게 된 새로운 존재의 깨달음이고 또 새로운 실존의 방식이었습니다. 그와 그리스도는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상관적 실존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로와 예수 그리스도가 각각 객체이면서 전체로서 또 하나입니다. 이는 그분의 죽음이 철저히 나의 죽음이 될 때, 그분의 부활이 철저히 나의 부활이 될 가능성 또한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것을 분명 체험한 듯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창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전체로서” 이해될 때 온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9월 초부터 10월 4일까지 전 세계 교회가 “창조질서회복”을 위한 “창조절기”를 지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자연과 생태계를 보전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우리 모두가 하나의 실존을 공유한 “공동체”임을 인식하는 것. 이러한 우리의 인식 전환이 먼저 필요합니다. “하나의 전체로서”의 창조에 기반하여, 어떻게 우리가 조화롭게 공존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인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와 보존의 명령은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는 문명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공중의 날벌레와 새들, 우리를 스치는 바람과 흩날리는 꽃잎이 소중한 이유입니다. 자연과 우리는 “하나의 전체로서” 하나의 운명 공동체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의 주변을 살피고 우리의 삶을 조금씩 자연과 공존하는 길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어린양과 같은 불안한 실존 속에서 우리는 다시 전체로서의 하나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천이 우리 삶 속에서 열매 맺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연중24주 (다해) 1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선한 목자시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인내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마침내죄를 용서받아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예레 4:11-12, 22-28
11“그 때가 오면,
. 이 백성에게, 그리고 예루살렘에게
. 나는 이런 말을 일러주리라.
. 삭막한 땅 사막에서 열풍이 불어와
. 내 땅 내 백성을 덮칠 것이다.
. 낟알을 말끔히 키질하여 주려고 불어오는 것이 아니다.
12 너무 거세어 키질할 수 없는 바람이
. 나의 말 한마디에 불어닥칠 것이다.
. 나도 이제는 결판을 내야겠다.”
. …
22“내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 이렇게도 나의 속을 모르다니.
. 미련한 자식들.
. 철없는 것들.
. 나쁜 일 하는 데는 명석한데
. 좋은 일은 할 생각조차 없구나.”
23“땅을 내려다보니 끝없이 거칠고
. 하늘을 쳐다보니 깜깜합니다.
24 산을 바라보니 사뭇 뒤흔들리고
. 모든 언덕은 떨고 있습니다.
25 아무리 돌아봐도 사람 하나 없고,
. 하늘에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갔습니다.
26 아무리 둘러봐도 옥토는 사막이 되었고,
. 모든 성읍은 허물어져,
. 야훼의 노여움에 불타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27‘온 세상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
. 나는 세상을 멸망시키기로 하였다.’ 하시더니,
. 마침내 야훼 말씀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28‘위로 하늘은 상복이나 입고
. 아래로 땅은 애곡이나 하여라.’ 하시더니,
. ‘나는 한번 말하였으면 그대로 하고야 만다.
. 한번 결심한 것은 돌이키지 않는다.’ 하시더니,
. 기어이 그대로 하셨습니다.”
시편 14
1 어리석은 자들, 제 속으로 이르기를 ◯
.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말들 하면서,
¶ 썩은 일, 추한 일에 모두 빠져서 ◯
.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2 주여, 하늘에서 세상 굽어보시며
. 혹시나 슬기로운 사람 있는지 ◯
. 하느님 찾는 자 혹시라도 있는지 두루 살피지만
3 모두들 딴 길 찾아 벗어나서
. 한결같이 썩은 일에 마음 모두어 ◯
.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4 언제나 깨달으랴 저 악한들. ◯
. 떡 먹듯 내 백성 집어 삼키며,
. 주님은 부르지도 않는구나.
5 하느님께서 옳게 사는 이들과 함께 계시니 ◯
. 저자들은 겁에 질려 소스라치리라.
6 비천한 자들 생각을, 너희가 비웃지만 ◯
. 주께서 그들을 감싸주신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은 시온에서 오리니,
. 잡혀 간 당신 백성을 주께서 데려 오실 때, ◯
. 야곱은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은 기쁘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디모 1:12-17
12 내가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나는 감사합니다. 주께서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하셔서 당신을 섬기는 직분을 나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13 내가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모르고 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를 자비롭게 대해 주셨습니다. 14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총을 차고 넘치게 베푸셨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 가지는 믿음과 사랑을 나에게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사실입니다.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16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와같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앞으로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보기로 보여주시려고 먼저 나에게 한량없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 17 영원한 왕이시며 오직 한 분뿐이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불멸의 하느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영예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서_루가 15:1-10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2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5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7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여자에게 은전 열 닢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닢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볼 것이다. 9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10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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