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3.22. 가해_사순5주일
에제 37:1-14 / 시편 130 / 로마 8:6-11 / 요한 11:1-45
“생명으로의 초대”
생명이신 하느님과 생명 그리스도론
채창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3~4
가해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매주 요한복음을 통해 요한 그리스도론의 핵심을 계속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구약의 구원 신학이 어떻게 신약의 구약 신학과 하나가 됐는지에 관해서도 살펴봤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신약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 신학은 “생명 그리스도론”에서 완전한 완성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창조와 생명 그리고 말씀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며 시작합니다. 조금 전에 읽어 드렸던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바로 그러합니다. 요한 기자는 생명을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창조주로부터 흘러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어떤 것이라 말합니다. 이제 생명 그리스도론은 인간 실존에서 가장 “치명적 위협”인 죽음 가운데서 어떻게 하느님의 구원이 성취되는지를 하나의 사건을 통해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 이전에 세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으로 기록됐습니다. 첫 번째 방문에서는 유월절에 성전 정화 사건이 있었고, 두 번째 방문에서는 유대교 명절에 베짜타 연못의 병자를 치료한 사건이 있었으며, 세 번째 방문에서는 초막절에 실로암에서 시각장애인을 고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잦은 방문에서 예수 운동은 이미 유대교와 완전히 대척 상황에 놓였습니다. 요한복음 7장 1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예수나 제자들도 모두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려고 했을 때 제자들이 만류했던 이유입니다. 벌써 세 번이나 유대인들과 갈등을 빚은 후인지라, 이번에 가면 정말 무슨 일 날 것 같아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망설이는 제자 중에서 예수의 말에 찬동한 제자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토마였습니다.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 요한 11:16
나중에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던 토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참 흥미롭습니다. 아무튼 오늘 이야기를 통해 예수께서 마리아와 마르타 가족을 무척 사랑하셨음을 우리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위협을 무릅쓰고 갈 정도니 말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을 닦아드린 여인입니다. 그 이야기는 뒤에 12장에 나오는데 오늘 이야기에서 먼저 언급됩니다. 그녀의 오빠인 라자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는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요한 11:4
이 말씀은 지난주에 읽었던 말씀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요한 9:3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나 “하느님의 영광”은 모두,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건과 관련합니다. 이 말씀으로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구원 사건을 준비하고 계심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곧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5
이 말씀은 예수를 마중 나온 마리아의 언니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마르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부활이 인간 사후에 이루어질 어떤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구원하시는 하느님”은 사후가 아니라 바로 현재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예수께서는 강조하십니다.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이란 말은 예수를 믿으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과 죽음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생명은 결코 죽음이나 “치명적 위협”에 의해서도 약화하거나 제한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빛과 어둠이 함께할 수 없고, 하느님과 맘몬이 함께할 수 없으며, 의와 죄가 함께할 수 없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신앙과 “아사 상태”가 함께할 수 없고, 선과 악이 함께할 수 없으며,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은 죽음의 반대나, 그 대척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생명은 풍성해지거나 약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그 자체로 충만하며 완전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명을 뜻하는 헬라어 “조에(ζωή)”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요한복음은 “조에”가 창조주로부터 흘러나오고, 그분의 말씀으로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에 관한 계시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육신 됐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뜻입니다.
마리아를 만난 예수님은 그녀의 슬픔에 두 번이나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인간이 죽음이라는 절망적이고 “치명적인 위협”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한 사람의 모든 삶과 모든 관계를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이 가져올 모든 관계의 단절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마르타나 마리아도 모두 죽음을 이렇게 생명의 반대되는 어떤 것으로, 또 생명을 소멸시키거나 약화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죽음이 생명을 앗아갔다고 생각하니, 상실감과 함께 자기 오빠와의 영원한 이별을 슬퍼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러한 인간의 “치명적인 연약함”을 아셨기에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마르타는 이미 죽음이란 현실을 받아들이고 돌을 치우라는 예수의 말에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다음과 같이 외치셨습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요한 11:43
그러자 라자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말씀 앞에서 죽음은 생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외침은 에제키엘 선지자가 경험한 환시와 외침과 같습니다. 마른 뼈로 가득한 죽음의 들 한 가운데서 에제키엘은 야훼의 명령대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에제 37:4
그의 외침에 마른 뼈들이 서로 붙고, 살이 다시 돋아나며, 그리고 숨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그림자도 죽음의 위협도 그곳에는 없습니다. 결코 죽음은 생명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생명이 있는 곳에 죽음은 그 그림자조차 드리울 수 없습니다. 생명은 창조주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곧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이다”라고 하신 것은 철저히 구약의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표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생명”을 “빛”의 이미지로 가시화했고, 이를 통해 부활이란 사건을 우리에게 예시합니다. 치명적인 상황, 그 상황을 비추는 빛, 하느님 구원으로 인한 해방, 그리고 생명의 수여라는 이러한 구원 사건의 과정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완전한 구원은 온전한 생명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재자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이 빛과 생명을 강조한 것은 분명 역설적인 역사적 배경이 존재합니다. 즉, 신자들이 대면하는 현실 세상은 이러한 빛과 생명으로 전혀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등과 미움, 배고픔과 질병, 핍박과 환란 등. 요한복음 공동체가 처했던 상황은 이러한 빛과 생명과는 전혀 반대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요한 공동체는 유대교 공동체와 이제 막 결별하면서 다양한 고초를 겪어야 했을 겁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예수는 신성모독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을 혼란케 하는 이단들의 문제를 보면 우리는 초기 교회가 겪었던 어려움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관점에서 완전히 이단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2천 년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론과 다양한 신학과 전통이 체계화되어 그런 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제도 종교로 완전히 뿌리 내리기 전에는 교회는 끊임없는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문제로 갖은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왜 1세기 교회들이 신약성서의 기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론과 그의 신원을 증명하기 위해 집착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들이 직면했던 박해와 죽음의 치명적 위협은 그들을 두려움과 의기소침함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귀가 따갑게 반복해서 듣는 그리스도론은 이러한 치명적 위협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이 용기와 소망을 잃지 않게 하는 기능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해서 그리스도론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교인이 별 감응 없이 듣는 이러한 메시지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희망의 메시지가 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좀 길지만 지혜서 1장의 말씀을 잠깐 읽어드리겠습니다.
“빗나간 생활을 함으로써 죽음을 초래하지 말고 그릇된 행위로 파멸을 초래하지 마라.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게 마련이다. 그래서 피조물 속에는 멸망의 독소가 없고 지옥은 지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덕스러운 자들은 지옥을 모르며 의인은 죽지 않는다.” 지혜 1:12~15
많은 사람이 인간이 직면하는 절망과 좌절 그리고 죽음까지 남의 탓으로 쉽게 돌리곤 합니다. 방금 읽어드린 지혜서는 이러한 우리의 생각에 새로운 전환을 촉구합니다. 개인의 빗나간 생활이 죽음을 초래하게 하고, 그릇된 행위가 파멸을 불러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자는 매우 과감한 깨달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이미 창조 때부터 살라고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는 “멸망의 독소”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옥은 결코 현재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지혜의 선포를 전합니다.
“의인은 죽지 않는다.”
예수께서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이 지혜서를 아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지혜서도 유대인들이 핍박이란 치명적 상황에 놓였을 때 기록된 것입니다. 시리아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유린당하고, 이제 새로운 제국인 로마에 의해 식민지가 될 운명에 처한 유대민족의 절망 가운데서 이 지혜자는 자신 민족이 그 절망 가운데도 희망을 놓지 않을 지혜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지혜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절망을 이기게 할 희망은 오직 야훼에 대한 믿음뿐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아마도 요한복음을 기록했던 기자와 똑같은 절박함과 유사할 것입니다. 왜 유대인이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중재자이신 메시아를 그토록 열망했는지, 왜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신원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우리는 그들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지점을 통해 그 이면에 놓인 역설적인 그들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늘 위기는 사람을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가해 사순절 말씀은 우리를 그러한 본질적인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입니다. 이 사순절만큼은 우리도 그러한 진지한 본질에 조금은 더 가까이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 모든 크고 작은 일도 결국은 모든 원인이 우리로부터 시작됨을 인정하고 자신의 말과 행위를 겸손히 돌아보길 바랍니다. 순도 높은 신앙의 결이 이렇게 매년 사순절을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생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부활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 또한 몸으로 경험으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자로야, 나오너라.”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오늘 이야기를 묵상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주님의 명령이고 초대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의기소침함 가운데서, 자격지심 가운데서, 미움과 질투 가운데서 이제 생명 가운데로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이러한 은총이 사건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사순5주 (가해)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의 참 자유를 주시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일생 거룩한 생활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에제 37:1-14
1야훼께서 손으로 나를 잡으시자 야훼의 기운이 나를 밖으로 이끌어내셨다. 그래서 들 한가운데 이끌려 나가보니 거기에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것이었다. 2 그분이 나를 그리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들바닥에는 뼈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말라 있었다. 3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내가 “주 야훼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 하고 아뢰니, 4 그분이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5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6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7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다. 8 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었다. 9 야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10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11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12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13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14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성시_시편 130
1,2 주여,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 주여, 이 부르는 소리 들어주소서. ◯
. 애원하는 이 소리, 귀 기울여 들으소서.
3 주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
.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4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
.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5 나는 주님 믿고 또 믿어 ◯
. 나의 희망 그 말씀에 있사오니,
6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
.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7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
. 이스라엘이 주님을 기다리옵니다.
¶ 인자하심이 주님께 있고 ◯
. 풍요로운 속량이 그에게 있으니
8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
. 그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8:6-11
6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7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8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9 사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11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
복음서_요한 11:1-45
1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가 사는 베다니아 동네에 라자로라는 병자가 있었다. 2 앓고 있는 라자로는 마리아의 오빠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린 적이 있는 여자였다. 3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하고 전했다. 4 예수께서는 그 전갈을 받으시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시다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7 제자들에게 “유다로 돌아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선생님, 얼마 전만 해도 유다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그 곳으로 다시 가시겠습니까?” 하고 걱정하자 9 예수께서는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낮에 걸어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하시며 11 이어서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12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 라자로가 잠이 들었다면 곧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3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라자로가 죽었다는 뜻이었는데 제자들은 그저 잠을 자고 있다는 말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14 그래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 곳으로 가자.” 16 그 때에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가 자기 동료인 딴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 보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다. 18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오리밖에 안 되는 곳이어서 19 많은 유다인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다. 그 동안 마리아는 집 안에 있었다. 21 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 23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24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26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타는 27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이 말을 남기고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귓속말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고 일러주었다.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달려갔다. 30 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마중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던 것이다. 31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해 주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가 곡하러 무덤에 나가는 줄 알고 뒤따라 나갔다.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찾아가 뵙고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34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 하고 말하였다. 37 또 그들 가운데에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38 예수께서는 다시 비통한 심정에 잠겨 무덤으로 가셨다. 그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39 예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자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40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시자 41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2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43 말씀을 마치시고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시자 44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를 찾아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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