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4. 12.가해_부활 제2주일
사도 2:14상, 22-32 / 시편 16 / 1베드 1:3-9 / 요한 20:19-31
“허무주의와 부활 그리고 인식의 대전환”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당혹감과 두려움, 실망과 좌절을 안긴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소망을 걸었고,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 기자는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 예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운동에 가담했지만, 각각 자신의 개인적 이유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와 동고동락하며 그분의 말과 행위가 일치함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신분을 넘어 가난한 자들과 상처받은 자들과 어울리셨고, 말씀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 일에 제자들은 모두 증인이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에 가장 신앙심이 깊다고 여겨지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상대로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시는 모습에서 제자들은 아마도 부푼 기대를 가졌을 겁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자신들도 모두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하느님 나라에서 자신들을 높여달라고 직접 예수께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종종 이러한 권력다툼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유대교가 말한 대로 정치적 혁명으로 성취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니 주님께서 여러 번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예언을 하셨을 때 그들은 모두 극구 말렸던 것입니다. 특히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를 막다가 “사탄”이란 비난까지 받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이니 그들이 기대했던 주님께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셨을 때 그들은 모두 무너졌습니다. 십자가 수난 앞에서 주님은 이전의 당당한 주님이 아니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아무런 권위도 없는 나약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예수를 팔았고, 한 사람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으며, 모든 제자들이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도망을 쳤습니다. 요한 기자는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성모 마리아와 여자들, 그리고 사랑하시던 제자가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제자들 중 누구도 예수의 고난에 진정으로 동참한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소망이 무너졌을 때, 모두 절망과 허무에 빠졌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님과 이전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음에 좌절했습니다. 또한 혹시 그들도 예수처럼 반역자로 처벌받지 않을까 무서워서 숨었습니다. 그들은 평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제자들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기대했던 것들이 어긋나고 실패했을 때 그러한 절망과 허무를 느낍니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열정을 쏟던 일이 무너졌을 때, 큰 시험에서 낙방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을 때 등등. 그러할 때 인간의 마음은 허무감으로 무너집니다. 아마도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무산되는 순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실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성을 잃고 심지어 삶과 이별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러한 실패의 원인을 자기 밖에서 찾아 주변 사람이나 기물에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좌절감과 허무감은 이렇게 한 개인과 그 얽힌 모든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은 “될 대로 돼라지”하며 자신의 모든 사회적 관계성을 망가뜨립니다.
이러한 허무감이 일시적일 경우에는 단순히 심리적 문제에만 머뭅니다. 그럴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일어나 허무와 좌절을 극복하고 새 출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허무가 감정의 차원을 넘어 “허무주의”로 발전할 경우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이단이나 사이비 신앙에 쉽게 빠지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순간, 사람은 그동안 자신이 믿어 왔던 모든 것, 모든 관계에 실망과 좌절을 느끼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새로운 것에 집착할 위험이 커집니다. 그들의 무너진 마음에 누군가가 거짓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순간, 그들은 망상 같은 잘못된 신앙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허무주의는 세상에 절대 진리, 보편적 가치는 없다는 신념이나 세계관입니다. 허무가 감정적 현상이라면, 허무주의는 그러한 허무를 토대로 세상을 재구성하고 해석하려는 논리와 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과 모든 가치는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데서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생각을 체계화한 사람입니다. 서구 사회를 옭아맨 종교적 절대 가치와 진리를 거부하며 인간의 완전한 독립을 그는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은 신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부조리한 세상을 당당히 맞서 싸울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로 그는 “초인 사상”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두려워하는 죽음을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로운 죽음”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뇌졸중과 정신증 등으로 결국에는 자신이 추구했던 “자유로운 죽음”을 실행하지 못하고 행동 불능 상태에서 가족의 돌봄 속에서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러한 허무감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일요일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달려와서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제자들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용기를 내어 무덤으로 뛰어갔습니다. 요한이 먼저 도착했고, 베드로가 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다음에 요한이 이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요한 기자는 그때 그들이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보고 믿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홀로 막달라 마리아가 울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제자들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이 문을 잠그고 모여 있을 때,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토마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보고 모두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신 것처럼 예수께서 그들을 파견하신다고 하시며 그들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합류한 토마는 제자들이 말하는 부활 증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손과 옆구리 상처에 손을 넣어봐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토마에게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토마에게 상처에 손을 대보라 하셨지만, 토마가 예수의 상처에 직접 손을 댔다는 기록은 성서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를 보는 순간 믿었고,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의심하는 토마 이야기”라 하여 토마에 대해 약간은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토마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에서 유대인의 위협을 무릅쓰고 유대 지방으로 가자는 예수의 말에 적극 동의했던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예수의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에 자신도 죽음을 불사할 각오가 됐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정말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을까요? 물론 그는 실증적인 사람이고 현실적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확증과 확신이 있어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보고 믿는 이성적이고 실증적인 사람을 대변하는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지 못한 것은 주님의 부활이 아니라 어쩌면 제자들의 증언을 의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앞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은 예수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좌절과 허무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허무주의”의 늪에 빠질 개연성이 매우 컸다는 말입니다.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은 기존에 가졌던 모든 세계 인식에 큰 상처를 입습니다. 이러한 상처는 그의 세계관과 모든 기존 관계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의미 있는 것을 제대로 신뢰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관계성이 단절된 인간의 절망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토마는 제자들이 이러한 허무주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집단 환영이나 환청을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로서는 충분히 의심할 만했습니다. 우리도 신비한 경험을 누가 이야기하면 선뜻 믿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토마는 허무함에 빠진 자신과 제자들이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확고한 인식적 토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허무주의를 배격하는 길은 진리가 모든 관계성의 중심임을 다시 인식하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 앞에서 허무주의적 관계성은 힘을 잃게 됩니다. 토마는 부활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관계성의 구축을 원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섣부른 확신이 아니라 부활에 관한 인식의 대전환을 말입니다. 그것은 부활 이전에 예수를 인식하던 차원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관계로 들어 가는 사건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토마의 질문과 의심을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반박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 토마가 지닌 “확고한 불신”을 버리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이는 허무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새롭게 세계를 인식하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은 우리의 인식의 대전환을 요구합니다. 부활의 증언 앞에 우리가 갖는 불신과 기존의 인식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부활은 진리와의 관계성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5장이 말하는 진리 안에 머무는 상태를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우리가 포도나무의 가지라고 말하셨습니다. 가지는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원가지와 단절된 관계성,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사회를 뒤덮는 “허무주의”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활 신앙을 토마를 통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확신하는 것, 자신의 경험을 중시하는 현대의 이러한 풍토는 모두 허무주의에 뿌리를 둡니다. “우리, 관계, 가족, 공동체, 사랑, 평등” 등과 같은 말이 점점 힘을 잃고 모두가 무한 경쟁 속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쫓아 각자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삶에 조언을 하면 꼰대 소리를 듣고, “너나 잘해”라는 반응이 돌아옵니다. 남의 삶에 전혀 타자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모두가 개체화되고, 모두가 개인화됐습니다. 그러니 진리도 모두 개체화됐습니다. 공동의 가치와 기준이 사라지고, 대신 개인적 자아가 너무 비대해졌습니다. 그러니 현대인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알 수 없는 허무감과 불안을 느끼며 정신증을 앓게 됩니다. 이러한 허무주의가 국가적으로 드러나면 오늘날과 같은 “패권주의”가 됩니다. 함께 추구하는 공동의 선과 지켜야할 공동의 가치가 없으니, 나와 나의 가족, 나의 국가만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혼란을 중재해 줄 진리가 사라지니 공허와 폭력만이 넘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께서 먼저 여신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무엇인지, 부활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구체화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활을 단순히 그리스도교 최대의 절기로만 기억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바,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성으로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 그리고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신 희생의 십자가는 이러한 진리와의 관계성을 새롭게 구축합니다. 타자의 발을 씻는 행위는 기존의 관계가 아니라 겸손과 섬김, 사랑과 희생의 관계에로의 초대입니다. 이로써 허무주의로 단절된 모든 상처받은 관계성이 치유되고 인간은 다시 진리 안에 머물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토마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라는 말씀은 이러한 진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우리 “내면 깊은 곳의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옵니다. 믿고자 한다면 분명히 주님께서 토마에게 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부활2주 (가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이를 복되다고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의심을 버리고 믿음과 사랑의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도 2:14상, 22-32
14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열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22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시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시려고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 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23 그런데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여러분의 손에 넘어간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25 그분에 관해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주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오니
. 나는 항상 주님을 가까이 뵈오며
.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쁨에 넘치고
. 내 혀는 즐거워 노래하며
. 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 것입니다.
27 당신은 내 영혼을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 당신의 거룩한 종을 썩지 않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28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으니
. 나는 당신을 모시고 언제나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 시편 16:8-11
29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의 선조이신 다윗에 관해서 분명히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그는 죽어서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땅에 남아 있습니다. 30 다윗은 예언자로서 하느님께서 자기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주시겠다고 하신 맹세를 알고 있었습니다(시편 132:11(시편 89:3-4; 2사무 7:12-13 참조)). 31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며,
. ‘하느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 그의 몸을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 시편 16:10(사도 2:25-28 참조)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바로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입니다.
성시_시편 16
1 하느님, 나를 지켜주소서. ◯
. 이 몸은 당신께로 피합니다.
2 주님께 아뢰옵니다. ◯
.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
3 이 땅에 있는 거룩하다는 신들 ◯
.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4 거짓 신을 따르는 자들은 ◯
. 실컷 고생이나 시키소서.
¶ 나는 그 우상들에게 피를 쏟아 받치거나, ◯
.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5 주여! 당신은 내가 받을 분깃이며 축복이시니 ◯
. 나의 미래는 당신이 책임지십니다.
6 당신께서 나에게 떼어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이니 ◯
. 나의 마음이 흡족합니다.
7 좋은 생각 주시는 주님, 찬미하오니 ◯
. 밤에도 좋은 생각 반짝입니다.
8 주여,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
. 내 옆에 당신 계시면 흔들릴 것 없습니다.
9 그러므로 이 마음 이 넋이 기쁘고 즐거워 ◯
. 내 육신마저 걱정없이 사오리다.
10 어찌 이 목숨을 지하에 버려두시며 ◯
. 당신만 사모하는 이 몸 썩게 버려두시리이까?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몸소 가리켜 주시니
. 당신을 모시는 흡족한 기꺼움이, ◯
. 당신 오른편에서 누릴 즐거움이 영원합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베드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4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분깃을 하늘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주십니다. 6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7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9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_요한 20:19-31
19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21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7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28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29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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