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9.28. 다해_연중26주일_창조절기(Creationtide)
예레 32:1-3상, 6-15 / 시편 91:1-6 / 1디모 6:6-19 / 루가 16:19-31
“도움이 필요한 자”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요즘은 OTT 영화 서비스가 보편적으로 되어 영화를 좋아하는 저도 영화관에 갈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개봉한 영화 [얼굴]은 일부러 영화관까지 찾아가서 봤습니다. 좀비 영화 “부산행”과 넷플릭스 흥행작 감독으로 유명한 “연상호 감독”이 각본과 감독을 맡은 저예산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신학적으로나 철학적, 사회학적, 역사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토론이 가능한 수작이었습니다. 특히 인간의 “모멸감”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편견과 무관심 그리고 사악함이 매우 일상적이라는 점을 이 영화는 보여줍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악이 매우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저를 불편하게 했던 것도 모든 가해자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그 이웃 속에는 저도 포함됩니다. 사람들에게 낙인이 찍힌 한 개인은 인간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법입니다. 한번 낙인이 찍히면 사실이나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모두가 낙인찍힌 사람에게 모멸감을 주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수치와 부족함을 가려버리고 낙인찍힌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쓰레기를 쏟아 놓는 것이지요. 그러할 때 사람들은 혹시 자신에게 향할지도 모를 수치심과 모멸감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내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는 사람은 모두의 모멸감을 한 몸에 짊어지고 그 땅에서 발을 딛고 설 수가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가 만나는 "라자로"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낙인찍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부자와 비교되는 이야기 속의 가난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무관심과 차별의 모멸감을 온몸으로 겪어야 하는 모든 사람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우리는 오늘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점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 말씀은 루가복음에만 있는 ‘루가의 특수자료’입니다. 하나의 이야기인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두 파트로 나뉘어있습니다. 전반부는 19절에서 26절까지로, 현세(現世)에서 부자와 거지의 처지가 내세(來世)에서는 완전히 뒤바뀐다는 이야기입니다. 후반부는 27절에서 31절까지로, 사는 동안에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대로 회개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각각 따로 전승된 자료들일 텐데 루가는 두 이야기를 하나로 편집했습니다. 사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는 성서보다 더 오래된 이집트 문헌에서도 유사한 이야기가 발견됐고, 탈무드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집트 이야기가 유대교로, 유대교에서 예수님과 초대교회에 각각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주님께서도 그 당시에 사람들이 보통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 말씀하신 것이지요.
사실 신약성서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구원과 멸망 그리고 심판에 관한 이야기들뿐이지요. 그러나 루가복음 저자는 현세와 마지막 심판 사이에 내세를 “장소적” 의미로 언급한 유일한 복음사가입니다. 루가는 라자로가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고, 부자는 “죽음의 세계” 곧 “지옥”에 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루가는 사후 세계의 장소적 개념을 “낙원”이라 하여 십자가 도상에서 예수께 구원을 간청한 죄수 이야기에도 사용합니다. 아마도 루가는 사후세계를 둘로 나누어진, 행복한 곳과 불행한 곳으로 상상한 것 같습니다. 이 “낙원”이란 말은 사도 바울로도 한번 사용했는데, 고린도후서 12장에서입니다. “삼 층 천”을 올라간 사람에 대해 간증하면서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 7절에도 한번 나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신약성서가 사후세계에 대한 언급을 침묵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서에 언급되지 않은 것이나, 예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온전히 인간의 상상과 상식에 맡겨집니다. 그러므로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성서가 침묵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로 넣기”를 통해 신비와 믿음의 영역으로 남겨놓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성서를 해석할 때, 모른다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무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무리한 해석은 오히려 진실을 왜곡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은 “빈자의 복음”이란 별명처럼 특별히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그리고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현세에서 가난했던 라자로는 사후에도 이름이 언급된 데 반해, 부자에 대해서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교부들은 이를 라자로는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됐기 때문이고, 부자는 현세에서 이름을 날렸으나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않아서 이름이 누락됐다고 해석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승에서 부자는 충분히 이름값을 누렸던 사람일 겁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후에는 “무명”이 됐습니다. 특히 “라자로”라는 이름의 뜻이 의미심장합니다. “하느님께 도움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가 현세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도움이 필요한 자”였다는 뜻입니다. 이 개념은 무척 중요합니다. 라자로는 이 세상에서 특별히 한 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남을 도울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움을 준 자”가 아닙니다. 그의 처지는 무기력과 무능력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가난할 뿐만 아니라, 온몸이 종기투성이가 된 병자였고, 기아 상태에 빠졌으며, 심지어 개들까지 그의 종기를 핥을 정도로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무기력하고 연약한 사람에 대한 표징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을 개와 연관시키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것이었습니다. 개와 같은 취급을 받은 라자로는 한마디로 전적인 의존에 의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도움이 필요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무명의 부자”의 처지는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자포와 모시옷”을 입고 매일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사후에 아브라함 앞에서 자신이 라자로를 보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도록, 루가는 라자로가 그 “부자의 대문간”에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 부자는 자기 집 대문을 출입하면서 그를 전혀 못 봤다고 변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라자로를 개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무시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라자로만 언급됐지만, 분명 부자의 대문간에는 다른 거지들도 있었을 겁니다. 고대에 부잣집 앞에는 늘 거지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라자로는 “모든 가난한 자”들의 표징도 됩니다.
이 이야기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무자비한 부자의 탐욕도 중요한 주제이지만, 가난한 라자로와 같은 사람의 실존도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라자로는 단순히 가난한 자를 표징 하는 것을 넘어서, 모멸과 모욕을 받는 모든 사람의 표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몸에 종기가 났으며, 심지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개와 함께 나눠 먹어야 하는 사람의 처지는 어떤 것일까요? 그는 “도움이 필요한 자”였지만, 사람들에게 도움은커녕 멸시와 모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부자의 집 대문을 드나든 사람이 오직 부자 한 사람일 리는 만무하니까요. 많은 사람이 그의 처지를 무시했고, 그에게 모멸감을 줬을 겁니다. 그 모멸감은 “개가 그 상처를 핥았다”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습니다. 라자로는 자신의 육체적 고통에 더해서 모멸감이란 정신적 고통도 감내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고는 어떠한 희망도, 의지할 데도 없는 절망 속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라자로는 “도움이 필요한 자”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받은 자”가 됩니다. 물론 이야기 속에서 그의 존재는 사후에 은총을 받은 것으로 자신의 모든 모멸감을 씻어냅니다. 루가복음은 현세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사후세계에서도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행복과 불행이 서로 갈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현세와 내세의 완전한 가치의 전복이 이뤄집니다. 현세에서 고통 없이 살던 사람은 내세에서 고통을 당하고, 현세에서 존중을 받는 사람은 내세에서 버림을 받습니다. 아마도 루가는 이러한 “극단적 전복”으로 가난한 공동체였던 “루가 공동체”를 위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겁니다. 가난하지만 하느님 안에 들어온 사람들. 그들 모두가 곧 “하느님께 도움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라자로는 현재에서 가난과 모멸감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됩니다.
현세와 내세, 가난한 자와 부자, 존경받는 자와 멸시받는 자… 우리가 생각하는 이러한 모든 인간 실존의 이분법적인 것들이 사후에 완전히 가치가 전도된다는 생각. 그래서 우리는 이 지점에서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 교회에 보낸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고린 6:9~10
사도 바울로는 확실히 루가와는 다른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현재를 종말처럼 여기고 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로에게는 내세에 주어지는 미래의 축복이 아니라 현세라는 실존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위격적 결합이 그대로 구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주님께로 돌아감”과 같이 인간과 하느님의 인격적 결합을 강조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내세를 생각하기보다 현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에서 완전한 가치의 전복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완전한 전복과 가치 전도”가 가능하다는 게 사도 바울로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루가복음의 내세관보다 더 그리스도론적인 내세관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루가의 내세관과 사도 바울로의 내세관 중 어떤 것이 더 진리에 가까운가라는 물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가난과 멸시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사도 바울로의 내세관보다는 루가의 내세관에 더 큰 위로를 받는 것은 당연할 겁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라자로라는 사람은 이미 살아 있는 동안 겪은 고생으로 제 임무를 다 채웠다.”라고 말했습니다. 라자로의 현세적 삶은 볕이 하나도 들지 않는 어두운 일상의 연속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의 무능과 무기력을 전혀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조건 없이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루가가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품에 라자로가 안겨있다는 표상은 절망 속에 빠진 자들에게 커다란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이 이렇게 “도움을 받는 자”의 단계에만 머물 수는 없을 겁니다. 고통과 모멸감 속에서도 존재의 실존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로의 현세적 구원에 대한 표상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후의 위로만 쫓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을 증언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세에서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고, 들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 복음을 실천하고 그것을 살아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품과 같은 안정감은, 오직 우리가 사도 바울로의 말처럼, 그리스도와 완전한 인격적인 일치를 이룰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라자로와 같은 이웃을,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사람답게 바로 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실존은 그리스도의 존재감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이 의기소침한 우리의 마음을 더 넓게 넓혀주시어 주님의 자비를 덧입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은 자”로서 우리가 거듭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6주 (다해) 1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은 주님을 찾는 이에게 빛을 비추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의심을 버리고 구원에 이르는 좁은 길을 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예레 32:1-3상, 6-15
1 유다 왕 시드키야 십년에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그 해는 느부갓네살 십팔년으로서 2 그가 마침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였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때 유다 궁궐 근위대의 울 안에 갇혀 있었다. 3 유다 왕 시드키야가 이렇게 책망하면서 예레미야를 가두었던 것이다. …
6 야훼의 말씀이 갇혀 있는 나에게 내렸다. 7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너의 사촌이 아니냐? 그가 와서 너에게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살 권리가 있다 하고 그것을 사라고 할 것이다.” 8 그러는데 야훼의 말씀대로, 내 사촌 하나멜이 근위대 울 안으로 나를 찾아와 베냐민 지방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살 권리가 나에게 있다면서 그것을 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것이 야훼의 뜻임을 알았다. 9 그래서 아나돗에 사는 그 사촌의 밭을 은 십칠 세겔을 주고 사기로 하고 10 문서를 만들어 봉한 다음 도장을 찍고 증인 앞에서 은을 저울에 달아 주었다. 11 나는 법규에 따라 봉인된 매매계약서와 봉인하지 않은 부본을 받아, 12 내 사촌 하나멜과, 매매계약서에 서명한 증인과 근위대 울 안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증서를 마아세야의 손자이자 네리야의 아들인 바룩에게 넘겼다. 13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룩에게 이렇게 명하였다. 14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너는 이 봉인된 매매계약서와 봉인하지 않은 부본을 받아서 오랫동안 옹기그릇에 넣어두어라. 15 이 곳에 있는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팔고 사게 되리라고 이스라엘의 하느님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성시_시편 91:1-6, 14-16
1 지존하신 분의 거처에 몸을 숨기고 ◯
.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무는 사람아,
2 주께서 네 피난처시요, 네 요새이시며 ◯
. 네가 의지하는 하느님이라고 말하여라.
3 그분이 너를 사냥하는 자의 덫과 ◯
. 죽을 병에서 건져주시어,
4 당신 날개를 덮어 그 깃 아래 숨겨주시리라. ◯
. 그의 진실하심이 너의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신다.
5 밤에 덮치는 무서운 손 ◯
.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 마라.
6 밤중에 퍼지는 염병도 ◯
. 한낮에 쏘다니는 재앙도 두려워 마라.
14“나에게 부르짖는 자를 내가 건져주며 ◯
. 나의 이름을 아는 자를 내가 높여주리라.
15 나를 부르는 자에게 대답해 주고,
⋅ 환난 중에 그와 함께 있으리니 ◯
. 나는 그를 건져주고 높여주리라.
16 그로 하여금 마음껏 오래 살게 하고 ◯
.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여주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디모 6:6-19
6 물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종교가 크게 유익합니다. 7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9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11 하느님의 일꾼인 그대는 이런 것들을 멀리하고 정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시오. 12 믿음의 싸움을 잘 싸워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13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앞에서와 본티오 빌라도에게 당당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나는 그대에게 명령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대가 맡은 사명을 나무랄 데 없이 온전히 수행하시오. 15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정하신 때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복되신 주권자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고 군주 중의 군주이십니다. 16 그분은 홀로 불멸하시고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며 사람이 일찍이 본 일이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영예와 권세가 영원히 그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
17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시오. 교만해지지 말며 믿을 수 없는 부귀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이르시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18 또 착한 일을 하며 선행을 풍부히 쌓고, 있는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주라고 하시오. 19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미래를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쌓아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라고 이르시오.
복음서_루가 16:19-31
19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20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21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22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23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24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25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26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27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28 저에게 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31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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