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10.5. 다해_추석별세기념성찬례_연중27주일
요엘 2:21-24, 26 / 시편 104:13-15 / 1요한 3:17-18 / 마태 25:34-40
“축복의 계보”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산청을 돌아다니다 보면 법당이나 사찰이 많이 눈에 띕니다. 흥미로운 것은, 안내 간판 중에 “소원 성취 법당”이라 쓰여 있더군요. 마치 그곳을 방문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광고였습니다. 아마도 그 안내 간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니, 그러한 광고 문구에도 조금 위로받고 싶겠지요. 얼마전에 본 뉴스에서도 어떤 사람이 1억이 넘는 돈을 지급하고 굿을 벌였는데, 기도의 효과가 없다고 무당을 상대로 사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판사는 단순한 기도와 종교 행위는 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무혐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종교적 기도는 단지 “마음의 위안”을 얻는 차원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무당이 처음부터 돈을 갈취하기 위해 피해자를 속였다면 문제가 되지만 단순한 종교적 기도 행위는 위법적이지 않다는 판결입니다. 우리 사회의 한 단편을 보여주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인간이 무척 강한 듯 보이지만, 실존적으로 얼마나 연약하고 축복에 갈급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타작 마당에는 곡식이 그득그득 쌓이고 독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 이제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으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찬양하리라.” 요엘 24~26
오늘 읽은 요엘서 말씀도 이렇게 축복과 소원 성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지요. 원하던 바가 성취되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은 실존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복과 관련된 많은 약속이 넘쳐납니다. 혹자는 “기복 신앙”이라 하여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종교가 가진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바로 축복과 연관된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무병 무탈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당하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 모두가 그러한 여망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말씀은 하느님의 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생태계에 사는 모든 생명에게 복을 내려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생물이나, 식물에는 이러한 “복”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바다에 있는 생물들과 공중의 생물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것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새끼를 많이 낳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여라. 새도 땅 위에 번성하여라!’” 창세 1:22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한마디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福)”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물론 모든 포유동물에게도 해당합니다. 그리고 영장류인 인간에게도 이 축복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다른 복이 하나 더 주어집니다.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 그리고 푸른 풀들을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먹을 것이 되는 것이지요.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곧 인간에게 내려진 복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과 함께 생태계의 모든 것들을 관리하고 공생하라는 책임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하고 자연 속의 모든 생물은 이러한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축복대로 잘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사자는 자신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다른 생물을 잡아먹는다고 하지요. 사자는 탐욕을 위해 다른 동물을 잡아먹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러한 축복에 인간의 욕망을 더 담아 소유를 극대화하려는 경향이 큽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모두 맘몬(Mammon)의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맘몬은 탐욕과 소유와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생육과 생존을 위한 모든 것을 복으로 받았지만, 그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편하게”를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광야의 “만나”가 한 낮에는 썩어 벌레가 나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탐욕을 미워하시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기자는 이러한 창세기 1장이 언급한 하느님의 축복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말할 필요를 느꼈을 겁니다.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관계 속에서, 모세와 하느님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축복은 과연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구약 성서를 읽을 때 가장 지루해하는 부분이 아마도 “족보와 계보”에 대한 부분일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부분은 대충 읽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하느님의 축복이 실현된 증거로써 창세기 4장부터 나오는 “카인의 족보”, “셋의 족보” 그리고 “아담의 족보”를 읽는다면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계보에 기록된 이름들은 모두 하나의 씨족을 대표하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러한 이름들의 나열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의 축복이 카인과 셋과 아담의 후손을 통해 계승됐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대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이름은 곧 하느님의 축복의 연속성을 뜻합니다. 즉, 성서의 족보나 계보들은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더욱이 “홍수 이전의 아담의 후손들”의 족보에는 그들이 살았던 기간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노아”의 할아버지인 “므두셀라”입니다. 그는 무려 969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진짜로 그렇게 인간의 수명이 길었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 신앙을 가지신 분도 계시지만, 성서에 나오는 숫자들은 늘 상징성을 가진 것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위험합니다. 계보에서 기록한 그들의 나이는 그가 받은 축복의 양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습니다. 므두셀라가 가장 오래 산 것은 그가 하느님이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계보의 기록은 성서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보가 끊어지지 않고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계보와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신약성서 중 가장 재미없는 부분이 예수님의 족보이지요. 아무도 그것을 “축복”의 관점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구약의 족보들은 미래를 향해 계속 이어질 것을 전제로 열린 기록이었지만, 예수님의 족보는 모두 예수님에게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마태오와 루가의 차이점은 마태오는 예수의 계보를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한다는 점이고, 루가의 기록은 예수님으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아담과 하느님으로 끝이 난다는 점입니다. 마태오는 구약 예언의 성취로서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밝히고 그가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루가의 계보가 거꾸로 올라가는 것은 예수의 기원이 하느님이고 그러므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주장한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이러한 축복의 계보가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창세기의 축복의 말씀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예수 이후의 계보의 연속성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후에 그분의 계보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창세기가 언급한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하느님의 축복의 최종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루가가 루가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은 창세기의 축복이 이제 다른 차원에서 계승되고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하느님의 축복은 이제 “복음”으로 함축됩니다. 천지창조 때 선포됐던 하느님의 축복이 이제는 “복음’을 통해 온 땅에 두루 퍼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루가는 사도행전의 시대를 “복음의 시대” 곧 “교회의 시대”로 봤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축복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종말에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육과 번성하는 축복의 끝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어 가는 과정을 사도행전에서 기록한 것처럼, 하느님의 축복은 이제 교회를 통해, 각 개인에게로, 각 가정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계보나 족보가 아닌 예수를 믿는 믿음의 계보를 이어 갈 축복과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열두 제자들을 통해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고 믿음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 성공회는 이러한 “사도적 계승”을 존중하는 교회입니다. 복음을 맡은 사도들의 사명과 이를 이어가는 계보가 2천 년의 시간을 거쳐 오늘날 교회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많은 믿음의 선조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계보는 많은 믿음의 선배들, 주교들, 성인들, 사도들을 거쳐 예수를 만나게 될 것이고, 예수에서부터 세례자 요한, 선지자들, 다윗과 모세, 아브라함, 노아에게 이르며, 결국에는 아담을 거쳐 하느님께로 닿을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이 명절에 우리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살다 가신 우리의 조상, 우리의 가족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축복과 믿음의 계보와 관련이 있습니다. 단순히 유교적인 전통이나 조상 숭배의 전통이 아닌 믿음의 계보를 기억하고 이를 이어가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감사가 이 별세기념성찬례 안에 녹아 있습니다. 나의 믿음이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 기억하기. 그리고 나의 믿음을 이어갈 후손이 누구인지 알고 우리가 받은 대로 또한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계보는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하느님의 축복과 그 명령을 살아내는 실존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의 계보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끝이 날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하느님의 축복의 약속이 완전히 완성되고 성취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도 그러한 희망을 품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들의 기도와 그들이 받은 축복 위에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기도 전에 이러한 믿음의 계보가 끊어지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대에서 끊어지면 참 슬플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었지만, 자녀들의 믿음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이러한 계보를 자신의 대에서 끝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가신 분들에게도 죄송한 일이지만, 하느님의 축복의 계보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도 죄송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추석에 모인 가족끼리 서로의 신앙을 살펴보고 서로 기도 제목을 나누고 조상들과 하느님께 감사하는 그러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에게 감사를, 후손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심어줄 수 있는 그러한 추석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전부터 내려온 믿음과 축복의 계보가 우리 자손들에게도 넘치게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추석 명절이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추석 명절
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계절을 따라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시기 감사하나이다. 구하오니, 기쁜 명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조상들의 영혼에 안식을 주시고, 때에 따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언제나 그 은혜를 찬양하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요엘 2:21-24, 26
21 흙아, 두려워 마라.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야훼께서 큰일을 이루셨다.
22 짐승들아, 두려워 마라.
⋅ 들판의 목장은 푸르렀고
⋅ 나무들엔 열매가 열렸다.
⋅ 무화과나무와 포도덩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23 시온의 자녀들아,
⋅ 야훼 너희 하느님께 감사하여
⋅ 기뻐 뛰어라.
⋅ 너희 하느님께서 가을비를 흠뻑 주시고
⋅ 겨울비도 내려주시고
⋅ 봄비도 전처럼 내려주시리니,
24 타작 마당에는 곡식이 그득그득 쌓이고
⋅ 독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
26 이제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으며
⋅ 너희 하느님 야훼를 찬양하리라.
⋅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어준
⋅ 이 하느님을 찬양하리라.
⋅ 내 백성은 언제까지나 당당하리라.
성시_시편 104:13-15
13 높은 궁궐에서 산 위에 물을 쏟으시니 ◯
⋅ 온 땅이 손수 내신 열매로 한껏 배부릅니다.
14 짐승들이 먹을 풀을 기르시고 ◯
⋅ 사람은 농사지어 땅에서 채소를 얻게 하시고
15 또한 곡식을 양식으로 주시며 ◯
⋅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도 주셨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요한 3:17-18
17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18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복음서_마태 25:34-40
34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37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39 언제 주님께서 병 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부조리와 사랑”_2025.10.19. 다해_연중29주일 (0) | 2025.10.19 |
|---|---|
| “평범, 일상 그리고 감사”_2025.10.12. 다해_연중28주일 (0) | 2025.10.12 |
| “도움이 필요한 자”_2025.9.28. 다해_연중26주일_창조절기(Creationtide) (0) | 2025.09.28 |
| “선견지명 先見之明”_2025.9.21. 다해_연중25주일_창조절기(Creationtide) (0) | 2025.09.21 |
| “하나의 전체로서의 창조와 구원”_2025.9.14. 다해_연중24주일_창조절기Creationtide (0) | 2025.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