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10.19. 다해_연중29주일
예레 31:27-34 / 시편 119:97-104 / 2디모 3:14-4:5 / 루가 18:1-8
“부조리와 사랑”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 예레 12:1
요즘 성서정과에 따라 아침기도에 묵상하는 예레미야서의 한 구절입니다. 오늘도 예레미야서를 1 독서로 읽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고독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가진 예레미야는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야훼의 말씀에 담긴 부조리와 세상의 부조리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든, 세상의 부조리든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역행하는 모든 것이 부조리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처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자신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어린아이”라고 사양을 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신 야훼의 말씀은 사랑하는 가족, 친지, 친구 그리고 자기 민족에게 혹독한 심판을 선포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 예언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고독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한 부조리를 대면했던 선지자는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주님 손에 잡힌 몸으로 이렇게 울화가 치밀어올라 홀로 앉아 있습니다. 이 괴로움은 왜 끝이 없습니까?” 예레 15:17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런 절규의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에 우리같이 연약한 믿음의 사람은 위로가 됩니다. 감당할 수 없어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하느님 말씀을 그는 “입 밖에 내지 말자” 다짐하고 다짐해도 그의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 그의 입을 통해 나올 때마다 이를 주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말씀은 인간이 느끼는 부조리함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었기에 그는 불가항력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경험과 그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인데도 말입니다.
부조리(不條理, absurdism)는 불합리·모순·불가해(不可解) 등을 표현하는 단어로서, 철학에서는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뜻할 때 사용합니다. 이는 이성과 경험으로 이해 불가능한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를 직시할 때,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모순을 사르트르는 “구토”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구토”는 부조리를 경험한 사람이 세상과 단절되는 어떤 경험과 유사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물 자체가 부조리함을, 존재가 우연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알베르 카뮈는 이러한 실존의 부조리를 경험한 사람은 절망하여 자살하든지, 아니면 그냥 체제에 순응해서 아무 의미 없이 살든지, 아니면 부조리의 의미를 찾고자 도전하며 끊임없이 절망하며 나아가든지 셋 중에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무의미한 삶의 반복”이라는 실존의 부조리를 그는 다시 굴러떨어질 돌을 산꼭대기로 매일 굴려 올리는 저주받은 “시시포스 이야기”에 비유했습니다. 이성의 진보를 기대했던 근대철학이 이렇게 실존주의 안에서 종교적 질문과도 같은 “부조리”에 대해 말하게 된 것은 이성과 합리주의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분명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내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한 인간이 처음으로 부조리에 대해 눈을 뜨는 순간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존재하는 모든 실존의 양식이 이러한 부조리로 가득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저도 더 절감하게 됩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여운 아이가 갑자기 병이나 사고로 죽었을 때 느꼈을 그 부모의 참담한 심정. 그래서 아마도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유족 중에 아직도 자신의 자식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들이 겪는 아픔은 세상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 사건이나 사고로 인해 아마도 처음 이 세상의 부조리를 대면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유를 알고 싶어도 알 수 없을 때, 인간은 이러한 부조리를 경험합니다. 그 이전에는 모든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으로 믿었던 세상이 이러한 경험 후에는 모순덩어리이고, 불합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불완전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세상의 본질이며 그 안에 인간 실존의 양식이 놓여 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세상의 부조리에 신학적으로 “신정론적”인 답을 찾기 위해 많은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노력했지만, 아직도 속 시원한 답은 유보된 상태입니다. 답을 도저히 알 수 없기에 그리스도교는 침묵으로 이러한 부조리를 직면해 왔습니다.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이뤄지는 답할 수 없는 부분들을 신비의 영역에 놓아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미신에 기반을 두지 않고, 신비에 그 뿌리를 내렸습니다. 부조리한 재판과 심판 속에 침묵으로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 아무리 우리가 그분의 죽음에 대해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해도, 그 궁극적 진리는 여전히 부조리 속에 놓여 있음을 인정합니다. 예레미야나 욥이 고통 속에서 부조리에 대해 부르짖었던 기도도 여전히 응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이 부조리를 신비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누구도 그 진리를 명확하게 밝힐 사람은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교의 겸손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이야기”는 루가복음에만 나오는 “루가의 특수자료”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항구적 기도” 즉, 포기하지 않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긴 기도가 아니라 끊임없는 기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과부의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절박한 사람의 기도에 자비로 응답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가르침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고대 근동에서 자주 일어나는 법정의 일상을 담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에서는 재판관이란 특별한 직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사가 보통 재판관직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재판 도중 법정에서 누군가가 이 재판이 불의하다고 소리를 치면 재판이 일시 중지되는 것이 관례였고, 이에 따라 재판이 소란스러워지고 방해받는 일은 고대 근동에서 다반사였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여인이 재판관을 귀찮게 한 것은 이런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항구적 기도”에 대해서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도 담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한마디로 부조리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오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재판관을 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줍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그런 재판관에게 재판받은 사람들이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면 참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이익과 도움이 되는 사람들의 재판에는 집중했을 겁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재판의 공정성은 그에게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부조리한 재판관입니다. 뇌물이라도 바치면 재판관을 수행하는 서기관들이 재판관에게 청탁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 속의 과부는 그러한 기회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과부”는 고아와 더불어 그 사회에서 가장 취약 계층에 속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매일 법정에 가서 호소하면서 더 이상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부조리한 방법”으로 소리치며 재판을 방해하는 방법을 썼을 겁니다. 그로 인해 다른 재판조차도 정상적으로 진행되기가 어려웠을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들이 쫓아내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법정과 재판관 주변을 맴돌며 그를 귀찮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녀의 행동도 일반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조리이고, 또 불법이었습니다. 재판정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녀의 행동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을 겁니다. 한마디로 요즘 말로 “민폐녀”였던 것이죠.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직면한 세상의 부조리에 이렇게 부조리한 방법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그 부조리한 재판관을 괴롭혔는지 결국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그녀가 너무 성가셔서 그녀의 원수를 갚아준다고 합니다. 결국 과부의 부조리가 재판관의 부조리를 이긴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 말씀을 설명하고 끝내면 큰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무조건 매달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잘못된 교훈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루가는 “기도의 항구성”을 강조하는 주제로 이 이야기를 편집했습니다. 한번 기도하면 끝까지 중단하지 않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요.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기도를 더 강조한 루가복음의 전체적 맥락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에 끊임없이 재판관을 귀찮게 하는 과부나,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나 모두 부조리해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시각으로, 결코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기도하는데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일일이 듣고 응답하신다는 설정도 참 부조리해 보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텐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일일이 듣고 응답하는가라고. 그 기도의 내용도 기도하는 사람의 수만큼 몇억 가지는 될 텐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것을 모두 응답하시는가? 그래서 기도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매우 부조리해 보입니다. 참 의미 없는 짓 같고, 또 자기 자신에게 마치 최면을 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했던가요? 사람이 합리적이지 못 하게 만들고, 망상 속에 살게 만드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그러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따랐던 그 많은 사람들이 행한 폭력은 그들이 비판했던 “아편 같은 종교”보다 더 처참하게 폭력을 낳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종교를 비판한 모든 무신론자의 공격도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듯싶지만, 그것도 자신의 신념만을 주장하는 균형 잃은 부조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부조리한 모든 것에 대해 정말 무기력하게 방치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정말 삶의 의미도 없이 절망적인 이 실존을 견뎌야만 하는 가여운 인간일 뿐일까요? 매일 부조리에 대해 “구토”를 느끼면서, 알베르 카뮈의 말대로, 자살이나 절망하는 것밖에는 이 부조리를 넘어설 새로운 인간 실존의 양식은 과연 불가능할까요?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우리의 부르짖음에 늘 부조리로 말할 뿐입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라.”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도 줘라.” 이런 성서 구절이 바로 부조리에 부조리로 답하는 성서의 방식입니다. 모세가 처음 야훼 하느님을 만나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그는 “나는 나다”라고만 말씀하셨지, 자신의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름이 없는 신은 모든 것이 될 수 있지만 또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위험에 놓입니다. 그래서 이름 없는 신인 야훼는 그 존재 자체가 부조리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절대 무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발음하고 있지 않습니다. 침묵은 부조리에 인간이 응답하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채찍과 모욕받으며 처참한 십자가형을 당했던 갈릴래아의 30대 청년의 죽음도 부조리했습니다. 그의 죽음 자체가 부조리였습니다. 로마의 반란범에게만 내려지는 십자가형을 그가 받은 것부터 부조리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그 처형을 순순히 받았습니다. 예레미야같이, 욥처럼 항변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마지막까지 침묵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부조리였습니다. 아무도 그 청년의 침묵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후에 그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라고 교회는 선포했습니다. 이는 더 이해도 설득도 되지 않는 역설이며 또 다른 부조리를 낳았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 그것이 믿어진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 그것이 믿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도 단지 부조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자체로 부조리를 포함한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세상에 만연한 이러한 모든 부조리를 마치 구슬을 꿰듯이 하나씩 “사랑”이란 줄로 묶어냅니다. 부조리와 부조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이 부조리한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는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 불 속에라도 뛰어드는 어머니의 모성을 누가 합리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의 행위는 “공리주의”도 “자기 의로움”을 보이기 위함도 아닌 그 자체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도 그 자체에 부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합리적이지 않은 많은 것이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하고 설명이 됩니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부모는 자식을 위해, 또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또 사랑하는 자신의 조국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사람들은 목숨을 내어놓는 것일까요? 그러한 희생에는 어떠한 합리적인 것도, 이해타산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순과 부조리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 모든 부조리에 대해 침묵합니다. 대신 그 부조리에 대해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의 크기도 인간이 사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남을 위해 희생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말은 명사이지만, 성서에서는 늘 동사로 이해합니다. 이해될 수 없고 합리적이지 않은 이러한 가르침이 예수의 입을 통해, 사도들을 통해 그리고 교회를 통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신비입니다. 물론 늘 교회와 신자들은 여전히 사랑을 행하기에 미숙하지만, 그래도 교회는 그리스도교가 가진 이러한 부조리함을 인정하며, 그 부조리를 넘어서기 위해 여전히 노력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추동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아주 가까이, 그리고 매우 작은 곳에서 시작된다는 사실. 이를 잘 표현해 주는 마더 테레사의 글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난 결코 대중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마더 테레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9주 (다해) 1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언제나 보살피시고 지켜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끊임없이 기도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예레 31:27-34
27 “앞으로 이런 날이 오리라.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을 사람이나 짐승 할 것 없이 씨를 뿌려 농사짓듯이 불어나게 하리라. 28 이전에는 자나깨나 이 백성을 뽑고 부수고 허물고 멸하고 해치기만 하였으나, 그만큼 이제는 눈을 똑바로 뜨고 세우며 심어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29 그 날이 오면,
.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면,
.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리라. 30 죽을 사람은 죄지은 그 사람이다. 이가 시큼해 질 사람은 신 포도를 먹은 그 사람이다. 31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32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이집트에서 데려내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들어라. 33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34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성시_시편 119:97-104
97 당신의 법이 너무나도사랑스러워 ◯
. 자나 깨나 나는 그 말씀을 되새깁니다.
98 당신은 내편이 되시어 계명을 내게 주시고 ◯
. 원수들보다 더 지혜롭게 만드십니다.
99 당신의 언약을 되새김으로 ◯
. 나의 모든 스승보다도 더 현명해지리이다.
100 당신의 법령들을 지킴으로 ◯
. 원로들보다도 더 슬기로워지리이다.
101 온갖 나쁜 길에서 발길을 돌리리니 ◯
. 당신의 말씀대로 살기위 함입니다.
102 당신의 결정 거역하지 않으리니 ◯
. 당신께서 친히 가르쳐주시기 때문이옵니다.
103 당신 약속의 말씀은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
. 내 입에는 꿀보다도 더 답니다.
104 내가 모든 거짓된 길을 역겨워하오니,◯
. 당신의 법령을 깨우쳐 슬기를 얻었기 때문이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2디모 3:14-4:5
14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고 있는 그 진리를 지켜 나가시오. 그대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그 진리를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5 그대도 기억하다시피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익혀왔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16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17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1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과 군림하실 것을 믿고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2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자기네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음에 맞는 교사들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5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
복음서_루가 18:1-8
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3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4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5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 들어라. 7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8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인(聖人)다움의 가능성”_2025.11.2. 다해_모든 성인의 날_연중31주일 (0) | 2025.11.02 |
|---|---|
| “자기 이해와 회개”_2025.10.26. 다해_연중30주일_설교문 (0) | 2025.10.26 |
| “평범, 일상 그리고 감사”_2025.10.12. 다해_연중28주일 (0) | 2025.10.12 |
| “축복의 계보”_2025.10.5. 다해_추석별세기념&연중27주일 감사성찬례 (0) | 2025.10.05 |
| “도움이 필요한 자”_2025.9.28. 다해_연중26주일_창조절기(Creationtide) (0) | 2025.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