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11.9. 다해_연중32주일
하깨 1:15하-2:9 / 시편 145:1-5, 17-21 / 2데살 2:1-5, 13-17 / 루가 20:27-38
“부활과 인간의 존엄성”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과.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 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한강 / 소년이 온다 p120)
5•18 때 광주 도청을 사수하다 잡혀 고문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한강 작가는 그의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녀는 [소년이 온다]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왜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도청을 지키려 남았는지, 왜 그들은 갖은 고문을 견뎌야 했는지, 왜 그 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죽었고, 또 왜 군인들은 같은 인간에게 쇠붙이를 관통시켰는지.… 한강 작가의 생생한 표현력으로 묘사된 인간의 몸과 고통, 그 몸에 가해지는 추악한 고문에 의해 어떻게 인간이 고귀한 존엄성을 잃게 되는지를 그녀는 잘 묘사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도 신영복 교수는 감옥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 때가 푹푹 찌는 한 여름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각자의 몸에서 나오는 체온이 인간이 인간을 가장 경멸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밉고, 인간이 몸을 가졌다는 것을 경멸하게 되는 순간이지요. 몸이 없었으면 겪지 않았을 고통과 수치. 그렇습니다.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이기에 몸이 자신의 존재를 여실히 드러낼 때는 영혼과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빈껍데기만 남는 것 같습니다. 갖은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몸.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 등”… 그것이 몸만 남은 인간의 전부였다고 한강 작가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몸이 없었으면” 느끼지 않았을 비참함입니다.
영국의 현대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러한 인간의 몸을 푸줏간에 걸린 소와 돼지의 사체처럼 표현한 작가입니다. 그가 인간에게서 몸을 해체한 순간, 거기에는 더 이상 인간은 없고 동물의 사체 같은 고깃덩어리인 인간의 몸만 남았습니다. 그 고깃덩어리가 된 몸에 원래 있었을 법한 인간의 정신과 총명함과 고귀한 영혼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썩을 단백질과 지방의 고깃덩어리. 그것이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하고자 한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단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선언하고 표현한 작가는 정말 행복했을까요? 인간이 정말 단백질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고깃덩어리일 뿐일까요? 처참한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도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몸이었다고 한강은 서술합니다. 몸이 있으니, 고통을 느끼고, 배고픔도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배고픔을 느끼는 몸이란 얼마나 구질구질한 것인지 상상해 보게 됩니다. 고통과 비참함과 살덩어리가 뒤엉키는 비참한 순간. 인간이 인간이 되게 만들지 않는, 인간이 단지 몸으로 이뤄진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고문의 잔혹성에 치가 떨립니다.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는 순간은 그 존엄성이 우리의 몸에서 사라진 바로 그때입니다.
사두가이파는 성전 중심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제사장 계급과 레위인 그리고 귀족계층으로 구성된 유대교 종파였습니다. 그들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계승을 중시하고 다윗 왕조의 가시적 상징인 성전을 신앙의 중심으로,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실제적인 장소라고 믿었습니다.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중시했던 그들은 바리사이파와 대립하는 매우 세속적이고, 합리적이며, 친로마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에게는 짐승의 몸과 경신례 등과 같이 외적인 것들, 만질 수 있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믿었던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몸뿐인 사람들이었고, 가져야만 만족하는 소유형 인간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부활을 단지 몸의 소생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부활 때에 현재의 몸이 그대로 소생한다고 생각했고, 현재의 관계성과 현재의 물질성이 사후에도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했던 것입니다. 아니면 요즘 현대인처럼 몸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오늘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듯이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들이 드리는 동물의 사체처럼 단지 몸뿐인 존재로 여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부활 때에 율법이 정한바 “형수취수법”대로 일곱 형제와 결혼한 한 여인이 일곱 형제의 아내가 동시에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한 것입니다. 부활을 육신의 소생 또는 육적인 삶의 연장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자는 사람들이 신으로 여기는 것이나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자기 자신을 그보다도 더 높이 올려놓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 잡고 앉아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2데살 2:4
이런 사람들의 특징을 사도 바울로가 정리한 말입니다. 결국 몸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숭배와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며, 마지막에는 더 큰 욕망의 대상을 하느님의 자리에 앉혀 놓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마음에 품은 것을 형상화하게 마련입니다. 광야에서 야훼를 황금송아지로 만들어 숭배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을 갈구하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문을 하는 사람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앗아가는 고문의 수치를 통해 한 인간의 모든 의지를 꺾어놓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사두가이파에게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 곧 그들에게 하느님이며, 짐승의 고통과 살과 피로 드리는 제사가 그들에게는 기도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숭고함과 생명의 존엄성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분명 더 고귀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부활의 신앙을 견지하는 이유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몸이 다시 소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살리신 라자로도 결국은 다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환기해 주신 것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관련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모든 압제와 죄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해방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세와 실존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영생입니다. 갖은 고문으로 고통에 일그러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어 해체되는 순간에도 인간의 숭고함과 존엄성은 여전히 그 몸속에 남습니다. 그것을 십자가에서 몸소 보여주신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망가진 몸, 고통에 뒤틀린 몸, 죄성에 빠진 몸, 바로 그 몸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입으셨습니다. 썩을 몸이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지요. 이렇게 성육신 교리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몸과 고통을 감내하심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나음과 해방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멸망 받을 몸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죽음을 이긴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이 썩을 몸이 “하느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때에 그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눈에 의존하는, 몸에 의존하는, 만질 수 있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인간의 존엄입니다. 부활은 그러한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께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변화되신 것처럼, 부활을 통해 우리 몸 안에 내재한 숭고한 하느님의 형상이 우리의 전존재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부활의 때가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내재해 있는 하느님의 형상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양심’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양심이란 말로도 그것의 의미를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골고타의 고난을 감내하신 것도, 많은 사도가 고문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감내한 것도, 많은 성인이 죽음을 불사한 것도,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준 것도 모두 이 숭고한 하느님의 형상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부활의 능력이며,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한강 작가가 표현한 대로, 그 어리고 여린 학생들과 많은 군중이 5•18 광주 도청 앞에서 총칼에 떠는 가운데서도 가슴 벅차게 요동치는 “집단 양심”의 웅장한 심장 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한 개인, 한 개인 안에 내재한 그 숭고한 것은 이미 인간에게 선재한 어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동물과 구분시키고, 또 썩어 없어질 몸과 구분하게 하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일반인과 그리스도인을 구분시킵니다. 그 구분은 차별을 위한 구별이 아니라 거룩함을 깨닫게 하는 구분입니다. 그만큼 죄에 대해 민감해지는 구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부활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며, 나면서부터 이미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것. 그러므로 주님께서 썩어 없어질 몸으로 친히 오셔서 고통과 죽임을 당하시고, 그 후에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도 그분의 길로 그대로 걸어갑니다. 이렇게 부활은 한 인간의 고통과 죽음 그다음에 오는 법입니다. 먼저 우리가 죽어야만 그다음에 부활이 있습니다. 몸에 얽혀있는 모든 관계성이 죽은 후에야만 인간은 참 부활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우리 인간의 존엄과 숭고함을 극대화하는 길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것보다 존재 그 자체가 지닌 존엄성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부활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 부활하는 것은 불로 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존재로서 남는 우리 인간이며, 하느님의 형상의 완전한 회복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약속이고 그 권능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루가 20:38
하느님 앞에 선 자는 몸으로 살고, 비록 몸의 고통을 느끼며, 실존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지만,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산 자의 하느님” 앞에선 우리는 모두 “산 자”입니다. “산 자의 하느님”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에도 머물지 않으며 “영원한 현재” 가운데 머무십니다. 부활은 그래서 미래에 완성될 일이면서 또한 동시에 오늘의 일이기도 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이 새로운 희망을 얻고, 고통과 비참함에 놓인 사람이 다시 삶의 의지를 얻는 것도 바로 이러한 부활의 힘 때문입니다. 그러한 힘이 있기에 본회퍼는 차가운 감옥에서도, 나치의 갖은 고문에도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일제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애국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이러한 숭고함의 힘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5•18 광주의 시민 안에도 있었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숭고함입니다.
우리는 몸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백질로만 이루어진 물질적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타자에 의해 고통도 받고, 우리의 실존은 고귀함을 잃은 채 송두리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도 많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결코 몸으로만 이뤄진 존재가 아님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결코 물질과 에너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고 부활의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이 연약한 몸으로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썩어 없어질 연약한 몸에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특별하고 신비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늘 현재형이고, 우리는 매일매일 부활의 힘으로 오늘을 느끼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는 모두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홀로서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앞에 홀로 서 본 사람만이 그러한 것을 알고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제자들과 사도들이 그 뒤를 따랐으며, 그리고 많은 성인이 그러한 길을 따르며 증거했습니다. 지난 한 해를 그렇게 살려고 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음을 돌이켜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2026년에는 매일의 일상이 부활의 힘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힘 속에 우리의 일상이 완전히 침잠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불굴의 의지와 신념,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 이것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32주 (다해) 1
본기도
의로우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잃어버린 이를 찾아 구원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며,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하깨 1:15하-2:9
1:15하 다리우스 왕 제이년이었다. 2:1 그 해 칠월 이십일일, 주께서 예언자 하깨를 시켜 말씀을 내리셨다. 2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사제와 그 밖에 살아 남은 모든 백성에게 일러라. 3 ‘이 성전이 예전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웠더냐? 너희 가운데 그것을 본 사람이 더러 남아 있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 성전은 어떠하냐? 너희의 눈에도 이 따위는 있으나마나 하지 않으냐? 4 그러나 즈루빠벨아, 힘을 내어라. 나 야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사제 여호수아야, 힘을 내어라. 이 땅 모든 백성들아, 힘을 내어라. 그리고 일을 시작하여라. 내가 너희 곁에 있어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5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너희와 계약을 맺으며 약속한 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을 터 이니, 겁내지 마라.
6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나는 이제 곧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뒤흔들고
7 뭇 민족도 뒤흔들리라.
⋅ 그리하면 뭇 민족이 보화를 가지고 오리니,
⋅ 내가 내리는 영광이 이 성전에 차고 넘치리라.
⋅ 야훼의 말이다.
8 은도 나의 것이요, 금도 나의 것이다.
⋅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9 지금 짓는 이 성전이 예전의 성전보다 더 영화로울 것이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나는 이 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성시_시편 145:1-5, 17-21
1 나의 하느님,
. 나의 임금님,
. 내가 당신을 높이 받들며 ◯
. 언제까지나 당신 이름 찬양하오리이다.
2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기리며,
.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리며 ◯
. 언제까지나 당신 이름 찬양하오리이다.
3 높으시어라, 주님.
. 끝없이 찬미받으실 분, ◯
. 그 높으심, 측량할 길 없어라.
4 당신의 업적 세세에 전해지고 ◯
. 찬란한 그 공적 대대손손 알려지리이다.
5 찬란한 당신의 명성과 이룩하신 놀라운 일, ◯
. 전하고 또 전하리이다.
17 주님 가시는 길은 언제나 바르시고 ◯
.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입니다.
18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자에게, ◯
. 진정으로 부르는 자에게 가까이 가시고
19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의 소원을 채워주시며 ◯
. 그 애원 들으시어 구해 주신다.
20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지켜주시고, ◯
. 악인들은 모두 멸하신다.
21 나는 이 입으로 주님을 찬양하리라. ◯
. 모든 사람들아,
. 그 거룩한 이름 영원토록 찬양하여라.
. 이제부터 영원토록!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2데살 2:1-5, 13-17
1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그분 앞에 우리가 모이게 될 일에 관해서 부탁할 말씀이 있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어떤 사람들이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지성을 잃고 쉽사리 흔들리거나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이나 혹은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이런 말을 편지에 써 보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3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4 그자는 사람들이 신으로 여기는 것이나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자기 자신을 그보다도 더 높이 올려놓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 잡고 앉아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다니 11:36; 에제 28:2). 5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이런 일에 관해서 누차 일러둔 일이 있는데 여러분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
13 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을 택하셔서 구원을 얻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으며 진리를 믿게 하셨습니다. 14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여러분을 불러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15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굳건히 서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전한 말이나 써 보낸 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가르쳐준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16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17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에게 힘을 주셔서 온갖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복음서_루가 20:27-38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28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 준 법에는 형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어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30 둘째가 형수와 살고 31 다음에 셋째가 또 형수와 살고 이렇게 하여 일곱 형제가 다 형수를 데리고 살았는데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2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33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3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35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36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37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3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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