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11.23. 다해_왕이신 그리스도 주일_연중34주일
예레 23:1-6 / 루가 1:68-79 (즈가리야의 노래) 또는 시편 46 / 골로 1:11-20 / 루가 23:33-43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고대 로마는 민주 공화정으로 세워진 나라였지만, 로마의 태평성대는 민주주의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다섯 명의 황제가 다스리던 왕정 시대였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대”라 하여 이 다섯 왕을 “오현제”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의 역사도 가장 태평성대를 누린 시기를 요순시대라 하여 중국 왕정의 정통성을 요임금과 순임금에게서 찾았습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 [사기]에서 이 전설적인 요임금과 순임금을 역사 속에 편입시켜 중국 왕정의 기원으로 서술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군주가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설파한 유가 전통은 이러한 중국 왕정의 권위를 세워줬습니다. 일본도 일본 헌법 1장 1조에 “천황”의 권위를 언급함으로써 입헌군주제를 합법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한제국을 끝으로 민주공화국이 되어서 왕정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 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우리 역사에서 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왕을 꼽으라면, 저의 경우는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정조대왕” 등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왕권이 제대로 서지 못한 시대에는 온갖 폭력과 무질서로 백성의 삶이 피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정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다양한 권력들이 서로 충돌함으로써 무질서가 판을 치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공동체를 이루는 무리이지만, 이 무리를 이끌 올바른 리더십이 부재할 때는 혼란과 다툼만 증가할 뿐입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는 독재자보다 더 나쁜 것이 “무정부주의”라는 말도 있습니다. 공동체의 결속과 일치를 이루는 강력한 구심력이 없으면 그 공동체는 무너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인간은 자연 상태에 놓이게 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토머스 홉스)”만 있을 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도 초기 가나안 정착 시기에 이웃 부족들의 잦은 공격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유목민이 정착 생활을 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위기 시에만 사사들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처럼 중앙집권의 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을 결속시키고 지켜줄 강력한 리더십을 원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무엘을 설득해서 “왕”을 세웠습니다. 그 첫 번째 왕이 여러분이 잘 아는 사울 왕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왕”으로 섬기던 민족에게 처음으로 가시적인 “왕”이 생긴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은 이제 “사울의 백성”이 된 것이지요. 그 이후의 역사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인 다윗과 솔로몬을 정점으로 이스라엘의 왕정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했다가,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하고, 남유다도 바빌론에 멸망하면서 결국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정은 끝이 났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유다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펼쳐 “하스몬 왕조”가 잠깐 세워지긴 했지만, 정통성을 가진 왕정은 이미 남유다의 멸망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디아스포라로 세계에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아직도 시오니즘에 따라 정치적, 종교적, 민족적 통합을 이끌 메시아를 대망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다윗 같은 강력한 왕정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유대인들과 달리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다윗의 혈통을 이은 우리의 왕,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으로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완전한 결별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공식적 죄목은 “유다인의 왕”이란 죄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칭”이란 말을 써달라고 요청했으나, 빌라도는 거부했습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로마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주장한 자를 반란죄로 처벌했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칭”이란 말을 생략함으로써 이를 합법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칭”이란 말이 죄명에 빠져서 아쉬웠지만, 예수를 죽인 것으로 소기의 성과를 이뤘으니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던 그를 로마에 의해 사형을 시켰으니, 그들은 예수 운동이 이제 끝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추종자들을 처단하는 데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지도자의 고난 앞에서 모두 도망을 가고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 운동을 다시 전개하여 예루살렘을 혼란스럽게 했을 때 비로소 스테판 부제를 죽이면서 예수 추종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한 번도 자신을 “왕”이라고 칭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셨고, 자신을 다니엘서가 언급한 “사람의 아들, 즉, 인자”라고 칭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왕으로 여기는 유대인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곧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뜻이 되므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예수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것은 갈릴래아 출신의 가난한 요셉의 아들이 결코 구약이 말하는 “메시아”일 수 없다고 그들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생깁니다. 문제가 될 수 있는 위험부담이 큰 “왕”이란 칭호를 왜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호칭으로 사용한 것일까요? 이슬람교는 마호메트를 하느님의 대변자라 불렀지, 결코 “하느님의 아들”이나, “왕”이란 칭호는 쓰지 않습니다. 이슬람교는 예수도 단지 아브라함처럼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무슬림처럼 그리스도인도 예수를 왕이 아니라 단지 선지자라고 칭했다면, 아마도 유대교로부터 핍박은 면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 정도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주장하면서, 결국 그분이 왕이심 또한 선포하게 됐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곧 왕이라 불리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들어가 보면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이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구약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는 마태오복음이 가장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는 히브리어로는 “기름 부은 자”라는 뜻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초기 교회는 바로 예수가 구약이 예언한 그 메시아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분을 왕이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시기에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의 구원은 이제 이스라엘에 한정되지 않고 온 인류를 위해 성취됐다고 믿었습니다. 이 메시아라는 호칭에는 이미 다윗왕과 같은 왕이란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케리그마의 내용에 있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일관되게 이 세속적인 삶의 지속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러한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의 개념은 예수의 메시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이 이러한 새로운 질서의 통지자, 즉 왕이시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권위가 로마 황제보다 더 월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의 아들”, “주님(Load)”, “구원자” 등과 같은 호칭들은 당시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되던 호칭이었습니다. 이러한 호칭을 예수께 적용한 것은 황제숭배를 종용하는 로마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로마의 문화에 젖어 살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와 개념으로 예수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에큐메니컬 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권위를 황제의 권위에 빗댐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로마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진정한 “왕”은 로마 황제처럼 폭력과 억압으로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백성을 섬기는 데 있다는 반 로마적인 메시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요한묵시록에서 묘사된 대로,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를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Χριστὸς Παντοκράτωρ)” 즉 “만왕의 왕”으로 고백했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현세적 세상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통치하는 “만왕의 왕”이란 개념으로 그리스도론의 개념이 확장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모두 “하느님 나라”라는 현재적이고도 종말론적인 개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 이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이는 성서 신학자 요하킴 예레미야스가 한 말로써, 예수의 메시지에는 늘 이러한 긴장감이 내재해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고통과 고난을 겪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제자들도 그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이 완전히 전복(顚覆)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써 그러한 전복을 몸소 보여주시면서 하나의 본이 되셨습니다. “칼의 때”가 오고, 핍박의 시대가 올 것이며, 그런 후에 결국에는 완전한 구원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요하킴 예레미야스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처럼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제자 됨의 길이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 길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서 어디에도 현세적 축복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라는 긴장감이 복음서 전체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삶의 전복을 체험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고, 남을 착복하던 세리는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게 되고, 귀족은 종을 형제처럼 생각하고, 종은 주인을 주님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변화가 없었다면 어떻게 초기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전복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한 개인이 완전히 달라지니 결국 세상도 달라진 것입니다. 유교에서도 강조하는바, 자기 자신을 먼저 세우는 “수신(修身)”은 우리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실천의 덕목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자신들을 생각했던 제자들의 헌신과 그들을 따르던 신자들의 열정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선포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면, 그 왕이 다스리는 백성이 있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 백성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이 소속된 나라는 예수의 메시지에서 끊임없이 언급된 “하느님의 나라” 곧 “바실레이아”입니다. 이는 민족주의도, 권위주의도, 인종주의도, 차별주의도 모두 배제된 나라입니다. 이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은, 이제까지 세상을 지배했던 모든 권위와 권력을 전복시키는 완전히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 예수를 비난했을 때,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의 상태가 그대로 연속되고 지속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대해 주님께서 표현하신 “표상” 그 이상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눈이 그분을 볼 것이며”, “유산이 나눠지고”, “새 이름이 주어지며”, “구원의 잔이 주어진다.” 등과 같은 표상에 더해서, “가난한 자들이 배부르고, 슬픈 자들이 위로받고, 나중의 것이 처음이 된다”라는 표상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종말에 이뤄진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 중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모든 은총이 모두 “공동체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개인 구원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시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치유받고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라는 공동체의 한 백성으로서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철저히 공동체적입니다. 그것은 왕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혼인 잔치”와 “잔치 음식”의 비유로 그 나라를 표상화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장막 공동체의 생활을 했던 것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움직이고, 함께 이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가 되어 하느님 보좌 앞에서 왕이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표상은 이미 우리가 요한묵시록을 통해 봤습니다. 이러한 “혼인 잔치”의 표상은 정확하게 오늘날 교회의 예배 안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구원받으며, 함께 공존하고, 함께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백성입니다.
불교처럼 우리 그리스도교는 혼자 수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개인 구원을 위해 세상을 등지고 골방에서 기도만 하는 종교도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구원받고, 함께 하느님을 예배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공동체인 하느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서 결코 아무도 소외되어서도 안 되고, 또 자기 자신을 예배 공동체로부터 소외시켜서도 안 됩니다. 우리 교회가 2026년 새해 표어를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리는 교회”라고 삼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혼자 축복받고, 혼자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전혀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축복과 은총은 모두 공동체적입니다. 그것을 복음서가 이미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장막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 후에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과 관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우리와 관계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네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언급하신 표상은 바로 이 가시적 교회와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교회 모두에 해당합니다. 교회는 공동체이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고, 그분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나의 왕이시며, 또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하느님의 백성이고 함께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지체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은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백성임을 확인하고 우리 안에 최고의 가치를 둘 분이 누구인지를 다시 환기하는 날입니다. 하느님보다 더 높아진 것이 우리 안에 있다면 이제 그것을 그분의 발 아래 내려놓고, 새로운 마음으로 왕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의 백성으로서 왕이신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삶을 새로운 전례력에도 이어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 연중34주 (다해)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어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통치를 순종하며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여 주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예레 23:1-6
1 “이 저주받을 것들아, 양떼를 죽이고 흩뜨려버리는 목자라는 것들아, 야훼의 말을 들어라. 2 내 백성을 칠 목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내 양떼를 돌보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흩뜨려서 헤매게 하니, 너희의 그 괘씸한 소행을 어찌 벌하지 않고 두겠느냐! 똑똑히 들어라. 3 나 비록 나의 양떼를 이 나라 저 나라로 헤매게 하였지만, 그 중에서 살아 남은 것을 모든 나라에서 본래의 목장으로 다시 모아들여 크게 불어나게 할 것이며, 4 그들을 위하여 참 목자들을 세워주리라. 그러면 내 양떼는 겁이 나서 무서워 떠는 일 없이 살 것이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5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킬
. 그 날은 오고야 만다.
.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 그는 현명한 왕으로서
.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펴리라.
6 그를 왕으로 모시고
. 유다와 이스라엘은 살 길이 열려 마음놓고 살게 되리라.
.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리라.
성시_루가 1:68-79 (즈가리야의 노래 Benedictus Dominus Deus)
1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
. 그 백성을 돌아보시어 구원하시고,
2 우리를 위하여 주님의 종 다윗 가문에 ◯
. 전능하신 구세주를 세우셨습니다.
3 이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
.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며,
4 우리를 원수로부터 구하시고 ◯
.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심입니다.
5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
. 그 거룩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6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대로 ◯
.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해내셨습니다.
7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기며 ◯
. 한 평생을 거룩하고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8 아가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리니, ◯
. 주님보다 앞서 그의 길을 닦으며,
9 주님의 백성에게 그 구원을 알게 하여 ◯
. 주님의 용서하심을 얻게 하여라.
10 이는 하느님의 인자하신 덕분이니 ◯
. 새벽빛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비추시어
11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고 ◯
.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골로 1:11-20
11 또 우리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권능으로부터 오는 온갖 힘을 받아 강하여져서 모든 일을 참고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12 아버지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께서는 성도들이 광명의 나라에서 받을 상속에 참여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14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15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16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18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20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복음서_루가 23:33-43
33 해골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사람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죄수 두 사람도 십자가형에 처하여 좌우편에 한 사람씩 세워놓았다. 34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가졌다(시편 22:18). 35 사람들이 곁에 서서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보고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보라지!” 하며 조롱하였다. 36 군인들도 또한 예수를 희롱하면서 가까이 가서 신 포도주를 권하고 37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보아라.” 하며 빈정거렸다. 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적혀 있었다.
39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도 예수를 모욕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 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42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43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 목소리”_2025.12. 7. 가해_대림2주일 (0) | 2025.12.07 |
|---|---|
| “ 자유의지의 유통기한”_2025.11.30. 가해_대림1주일 (0) | 2025.11.30 |
| “가장 훌륭하고 완전한 선물”_2025.11.16. 다해_추수감사주일_연중33주일 (0) | 2025.11.16 |
| “부활과 인간의 존엄성”_2025.11.9. 다해_연중32주일_설교문 (0) | 2025.11.09 |
| “성인(聖人)다움의 가능성”_2025.11.2. 다해_모든 성인의 날_연중31주일 (0) | 2025.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