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11.16. 다해_추수감사주일_연중33주일
신명 8:1-10 / 시편 65 / 야고 1:17-18, 21-27 / 마태 6:25-33
“가장 훌륭하고 완전한 선물”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예전에는 어르신들을 방문하면 다 큰 성인인데도 용돈을 쥐여주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이셨습니다. 남자는 자고로 지갑이 두둑해야 어깨도 펴지는 법이라고. 용돈을 드리지 못하고 돈을 받아 얼떨떨하지만, 그것이 남자의 자존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고 사람들 앞에서 먼저 지갑을 열어야 할 때가 많아지면서 어른들의 지혜를 깨닫습니다. 지갑이 비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꼭 자존감뿐만이 아니라 지갑이 비면 그만큼 남을 대접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에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괜히 미안해지곤 합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사람은 “있음”과 “없음”이라는 소유에 관해 매우 민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없음”을 우리는 그 사람의 무능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존재의 “있음”만으로 사람들에게 대접받기가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유냐 존재냐를 따지는 많은 철학적 담론이 늘 있었지만, 이 문제는 실제로 사람들의 삶에서 매우 절실한 생존과 연결되어 있기에 이론적 담론으로만 간단히 취급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매년 추수감사주일이 다가오면 신자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에 많은 만감이 교차하곤 합니다. 사제는 각 가정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그 가정이 어떻게 한 해를 보냈는지 신자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어렴풋하게라도 각 상황을 인지하게 됩니다. 누구는 풍성한 한 해였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 한 해였음을 나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추수감사주일이 다가오면 늘 신자들에게 건네는 인사에 조심하게 됩니다. 혹시나 어려움에 처한 교우에게 말을 실수하여 상처를 줄까 싶어서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가 부임한지 4개월이 된 진주산청교회에서는 신자가 별로 없어 처음으로 그런 부담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추수감사주일을 맞게 됐습니다. 비교할 대상이 많지 않으면 소유와 존재에 대해서도 그만큼 고민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추수감사주일은 제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풍성한 이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며, 역설적으로 저는 제 안에서 느껴지는 어떤 결핍의 느낌에 대해 묵상하게 됐습니다. 결핍. 뭔가 허전하고 충만하지 않다는 느낌. 결핍의 느낌은 사람의 존재를 흔들어놓을 수 있습니다. 뭔가 부족하다는 것은 뭔가 불완전하고 잘못된 것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결핍이 충만하게 채워져도 사람들은 쉽게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하나의 결핍이 채워지면 인간은 또 다른 결핍을 늘 느끼게 마련입니다. 돈 많은 재벌도 더 큰 부자 앞에서는 상대적 결핍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이러한 결핍을 채우는 것을 “성장”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결핍을 없애라고 장려합니다. 성장이 멈추면 이 자본주의는 반드시 붕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년 연말에는 다음 연도 경제 성장률을 따지고 내년 경제의 규모를 가늠하는 것이죠. 인간도 성장하지 않으면 발육부진에 걸리듯이, 경제도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소유의 극대화를 통해 마치 유기체처럼 성장하려 합니다.
이러한 결핍은 “없음”, 즉 무(無)와 관련된 느낌입니다. “무”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우리 성서에서는 이를 “죄” 또는 “악”과 연결 짓습니다. 물론 성서는 무를 소유의 결핍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악과 죄를 존재론적으로 보지 않고 관계론적으로 봅니다. 즉, 하느님과 피조물 간의 관계의 단절이 바로 “무”이고 그것이 “죄”입니다. 관계성이 단절된 상태는 모든 것이 “없음”의 상태에 놓입니다. 그러한 상태 자체가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로 패배시킨 적이 바로 이러한 “무”입니다. 그 무에는 사랑도 은총도 빛도 영광도 없습니다. 그것에는 두려움과 어둠과 절망뿐입니다. 무는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는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무가 존재한다. 안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 “없음”은 오직 예수 안에서 투영된 지혜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인지됩니다. 예수께서 이 “무”에 대해 승리하신 것은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있음” 안으로 편입되었다는 뜻입니다. 늘 결핍 때문에 굶주린 인류가 이제 충만한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머물게 된 것입니다. 이를 오늘 읽은 야고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변함도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 그늘 속에 버려두시는 일도 없으십니다.” 야고 1:17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는 결핍에서 벗어났으며, 우리를 주장하던 죄로부터 “하느님의 완전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늘로부터 빛으로 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빛의 근원이십니다. 하늘의 별이 때론 밝게 보일 때도 있고 때론 흐리게 보일 때도 있듯이 우리 안에 빛나는 은총의 빛도 흐려질 때도 있고, 밝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생활을 하다 보면 기쁨과 절망의 오르내림을 심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그 빛이 흐려질 때가 있을지라도, 이미 한번 우리 안에 비춰진 하느님의 은총의 빛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은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 무관하게 전적인 하느님의 사랑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아무런 조건이 없듯이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도 절대적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은총만이 우리가 느끼는 이 모든 결핍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때론 우리 안의 은총의 빛이 흐려져 힘들 때도 있지만, 결코 어둠은 그 흐려진 빛조차도 이길 수 없습니다. 가장 어두울 때는 반딧불이의 빛조차도 환하게 비치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결핍 가운데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온 은총을 받은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온 소유에 대한 유혹으로 절대로 흔들릴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지난 한 해 동안 그러한 소유의 문제 때문에 제 안의 빛이 어두워지는 괴로운 경험을 종종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태풍이 지나간 밤 후의 아침햇살처럼 그리스도의 빛이 내면을 비추어 그러한 난간을 잘 이겨내곤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위태하면서도 동시에 은총으로 충만했던 한 해가 이제 저물어갑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후회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매 순간의 선택에, 그리고 오늘 이렇게 우리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야고보서는 이러한 “완전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그러한 선물을 받은 사람은 분노나 노하기를 더디 하고, 더러운 모든 것과 넘치는 사악함 대신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깊게 뿌리내리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완전한 선물”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 문헌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신학 학자 케빈 로우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완전한 선물”에 매우 익숙해져서 은총에 대해 둔감해졌다고 말합니다. 말씀의 가르침, 예배, 찬양, 은총, 예수, 십자가… 이러한 모든 것이 당연하게 인지되어, 전례도 예배도 모두 형식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흔한 증상이라고 말합니다. 1세기 또는 2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완전한 선물”을 우리처럼 경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았기에 세상을 놀라게 할 위대한 실천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전염병이 만연할 때 로마 시민들이 외면했던 전염병 환자들을 돌봤고, 갖은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적의나 두려움보다는 겸손과 섬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박해에 전혀 무력으로 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신중했고, 매사에 감사했으며, 자신들의 모든 것이 오직 하느님께 영광이 되도록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그들의 삶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장 핍박받던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오히려 점령하는 이러한 역설은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특별히 행동하지도 않았고,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집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전존재로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실천하는 데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온 “완전한 선물”을 받은 사람의 당연한 삶의 귀결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헌신과 사랑에 큰 빚을 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박해도 없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종교의 자유를 넘어 우리 만의 종교로 그리스도교를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면서 우리는 아무도 자신의 자유가 구속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자유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구속하며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요즘 목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이 관용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주의 종”이란 표현과는 분명 뉘앙스에 차이가 있습니다. 말은 같지만, 자신을 낮추는 종다운 종을 현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모두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이 되기보다 먼저 대접받고 싶고, 남보다 우월하다는 우월감에 좀처럼 다른 사람의 “종”이 되지 못합니다. 남의 종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의 종도 될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구속되는 느낌을 경험한 종만이 진심으로 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이 지닌 덕목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사람은 타자의 종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마더 테레사는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기꺼이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종이지만, “완전한 선물”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한 선물”은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잘남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거져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을 받았으니 당연히 감사를 표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감사의 내용과 형식은 매우 다양합니다. 모두가 느끼는 감사가 다르고 모두가 표현하는 감사의 양식이 다릅니다. 그러나 감사가 향하는 방향은 분명 “완전한 선물”이 내려온 하늘일 겁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물질적 축복과 내면적 선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돌아보시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대해 우리의 감사를 하느님께 각자 나름대로 표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느꼈던 그리스도 사랑의 “놀랍고도 새로운 감동”이 우리에게도 느껴지길 소망합니다. 다가오는 새로운 대림절을 이러한 기다림과 설렘 속에서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좀 더 이러한 “완전한 선물”을 더 잘 인지하고, 늘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풍성한 추수의 기쁨 속에 우리의 감사를 담아 이 주일예배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추수감사주일
본기도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의 필요에 따라 풍성한 수확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바다와 육지의 소산물을 기르고 수확하는 이들을 축복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허락하신 은총을 잘 관리하고 나누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신명 8:1-10
1 너희는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계명을 성심껏 지켜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행복하게 살며 번성할 것이고 야훼께서 너희의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3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것이었다. 4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이 떨어진 일이 없었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다. 5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사람이 자기 자식을 잘되라고 고생시키듯이 그렇게 너희를 잘되라고 고생시키신 것이니, 이를 마음에 새겨두어라. 6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가 보여주신 길만을 따라가도록 하여라.
7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이제 너희를 기름지고 넓은 땅,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솟아 샘이 되고 냇물이 흐르는 땅으로 이끌어들이려고 하신다. 8 그 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여는 땅이요, 올리브 나무 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 9 굶주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땅, 아쉬운 것 하나 없는 땅, 돌에서는 쇠를, 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이다. 10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너희는 배불리 먹으며 하느님을 기리게 될 것이다.
성시_시편 65
1 하느님,
. 시온에서 찬미받으심이 마땅하오니 ◯
. 당신께 바친 서원 이루어지게 하소서.
2 당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
. 죄지은 모든 사람 당신께 나아가 고백하오니,
3 우리가 지은 죄 힘겹도록 무거우나 ◯
. 당신은 그것을 씻어주십니다.
4 복되어라,
. 당신께 뽑혀 한 식구 된 사람, ◯
. 당신 궁정에서 살게 되었으니,
. 당신의 집,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
. 우리도 마음껏 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5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 놀라운 기적으로 정의를 세우시고,
. 우리 소원 들어주시니, ◯
. 땅 끝까지 먼 바다 끝까지
.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6 그 크신 힘으로 산들의 뿌리를 박으셨으며 ◯
. 권능의 띠를 허리에 질끈 동이시고
7 설레는 바다와 술렁이는 물결 ◯
. 설치는 부족들을 가라앉히셨습니다.
8 땅 끝에 사는 사람들이
. 당신의 손길을 보고 놀라며 ◯
. 해뜨는 데서 일으키신 노랫소리,
. 해지는 곳에 메아리칩니다.
9 하느님은 이 땅을 찾아오시어, ◯
. 비를 내리시고 풍년을 주셨습니다.
¶ 손수 파 놓으신 물길에서,
. 물이 넘치게 하시어 ◯
. 이렇게 오곡을 마련해주셨습니다.
10 밭이랑에 물 대시고, 흙덩이를 주무르시고
. 비를 쏟아 땅을 흠뻑 적신 다음 ◯
. 움트는 새싹에 복을 내리십니다.
11 이렇듯이 복을 내려 한 해를 장식하시니 ◯
. 당신 수레 지나는 데마다
. 기름이 철철 흐릅니다.
12 광야의 목장에도 기름기 흐르고 ◯
. 언덕마다 즐거움에 휩싸였습니다.
13 풀밭마다 양떼로 덮이고,
. 골짜기마다 밀 곡식이 깔렸으니 ◯
. 노랫소리 드높이 모두 흥겹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야고 1:17-18, 21-27
17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변함도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 그늘 속에 버려두시는 일도 없으십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온갖 악한 행실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 그러니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23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제 얼굴의 생김새를 거울에다 비추어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 사람은 제 얼굴을 비추어보고도 물러나서는 곧 제 모습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25 그러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을 잘 살피고 꾸준히 지켜 나가는 사람은 그것을 듣고 곧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며 들은 것을 실천에 옮깁니다. 이렇게 실천함으로써 그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26 ¶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 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서_마태 6:25-33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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