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11.30. 가해_대림1주일
이사 2:1-5 / 시편 122 / 로마 13:11-14 / 마태 24:36-44
“ 자유의지의 유통기한”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근대 이래로 인간은 개인의 자유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이를 모든 근대 국가가 법의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모든 개인은 생각과 표현의 자유, 신체, 주거, 사생활 및 재산 소유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이러한 근대적 자유는 고대 로마의 시민이 가졌던 권리 이래로 가장 강력한 자유에 대한 권리가 아닐지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도 분명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장되는 것이며, 타인이나 공공의 이익과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특히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온갖 자유의 향연들은 타인의 자유를 무참히 짓밟으면서 자신들의 표현의 자유라고 이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상에서 접하게 되는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더욱 자극적인 이슈들을 생산하고 타자에 대한 비방도 서슴지 않으며, 부분적인 진실에 거짓을 섞어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허위 정보 산업 복합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허위 정보를 통해 대중을 현혹하여 SNS 또는 유튜브 조회수를 올리면, 이에 맞춰 언론이 반응하여 기사를 쓰고, 결국 관련 산업체들이 이를 자신들의 제품을 파는 광고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거짓 정보 생산자와 언론 그리고 기업이 결탁된 “허위 정보 산업 복합체”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결국 허위 정보로 인한 피해는 피해당사자뿐만 아니라, 거짓에 현혹된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합니다. 이러한 피해는 계속해서 거짓을 덮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생산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거짓 정보를 따르는 사람들은 가히 “집단 망상”에 걸린 듯하여,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의 증거가 나와도 도저히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히틀러가 말했나요?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는 엄청난 거짓말을 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더 잘 현혹된다고. 그리고 나치 선동가였던 괴벨스는 거짓말도 계속해서 반복하면 진실처럼 믿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사자성어에도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사람의 말이 결국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모든 현상은 우리의 자유의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결국에는 거짓이든 진실이든 정보에 대해 믿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선택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선택과 자기 결정권은 자유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곧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선택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 우리 내면 또는 외면에서 작동되는 모든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 학교, 직장, 교회 등과 같은 모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알게 모르게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보와 교육 그리고 관심에 더 많이 노출되느냐에 따라 사람의 선택은 여러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자유의지를 온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택이 오히려 저주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다음에 닥칠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없으니, 선택 불능의 상태에 놓이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쉽게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됩니다. 아담도 자신의 잘못을 하와의 탓으로 돌렸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것은 자유의지의 선물이 인간에게 저주가 된 한 예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자신 또는 타자에게 해가 될 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입니다. 가룟 유다는 분명 예수를 배반하지 않을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대림절은 “때”와 관련된 절기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이며, 동시에 다시 오실 “왕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를 심판하실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기다림의 영성을 배우면서, 이 시기에 우리가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절기입니다. 기다림에는 원래 믿음과 사랑이 전제됩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려 본 사람은 이 말의 뜻을 압니다. 상대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기다림은 불가능합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사랑으로 발현되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국가적으로, 경제적으로 엄중한 시기에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지금, 즉 우리의 때, 지금 현재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기다림의 때에 우리는 넘어지지 않고, “야훼의 빛을 받으며” 올바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전보다 더 경각심을 가지고 모든 정보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림절은 기다림 속에서 절제의 시간을 가지는 절기로써, 이제 우리는 무분별하게 넘쳐나는 정보들에 대한 “단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음식을 끊고,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단식처럼, 우리의 지적 활동의 단식도 이제 필요한 때입니다. 필요 이상의 정보는 오히려 독이 되고, 우리는 이미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던 헬렌 켈러의 말이 이 정보의 홍수 시대에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필요 없는 정보까지 아는 것은 오히려 불행입니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정보와 지식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대림절에 우리는 우리의 때를 올바로 분별하는 지혜로 다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로가 말한 대로, “지금이 어느 때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양심의 불꽃이 예민하게 여전히 타고 있다면, 우리는 이 시대가 어떠한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 현재를 깨어서 살다 보면 결국 다가올 “그때”도 잘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때가 도둑처럼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고 말씀하시면서 늘 깨어 대비하라 하셨습니다. 진실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세상. 지금은 “탈진실의 시대”입니다. 2천 년 전 주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이 시대를 예언하셨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마태 11:17
기쁨의 춤을 춰도, 슬픔의 곡을 해도 사람들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 완악한 세대.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남의 상황은 전혀 관심이 없는 세대. 진실보다 자기의 이익과 권리가 더 중요한 세대. 진실은 언제든지 상황 논리에 따라 변명 되고, 철면피 같은 얼굴로 부끄러움만 이겨내면 진실은 가볍게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과 권력으로 모든 진실을 호도하고,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합니다. 이익을 중시하는 집단들이 서로 연합하여 진실을 왜곡하니, 대중은 이를 제대로 알아채기도 어렵습니다. 대중은 자신들이 거짓에 선동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조 피에르(Joe Pierre)는 그의 저서 “집단 망상”에서 “거짓은 날아가고 진실은 절뚝이며 온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인터넷의 환경하에서 익명성을 방패 삼아 남을 신랄하게 거짓으로 비방하던 자들은 사과는커녕 진실이 밝혀져도 모른척하기 일쑤입니다. 거짓은 늘 진실보다 더 빠르게 퍼집니다. 그래서 유언비어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사람은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데도 진실은 여전히 더디게 밝혀집니다. 인터넷 생태계는 악을 조직적으로 결집하여 죄책감을 덜 느끼게 하는 기능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텍스트와 이미지로만 정보를 나누다 보니 맥락이나 상황은 생략되고, 어떤 게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최근 뉴스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6세 미만 미성년자는 SNS 사용을 금지하는 법이 올 12월 10일부터 시행된다고 합니다. SNS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한 학생의 자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SNS에 넘쳐나는 ‘자유의지’들이 얼마나 처참한 저주로 드러났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러한 엄중한 시기에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길 바랍니다. 이 ‘탈진실의 시대’에 우리의 자유의지는 과연 안전한가요? “자유 의지”는 결코 진실을 호도하라고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아벨을 죽였던 카인이 하느님께 불평했던 것처럼 우리는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외치며 타자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며 개인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유 의지”는 반드시 사랑에 기반하고, 상호 관계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무시하고 있습니다. 자유가 마치 자기 마음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어떤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유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반드시 타자에 대한 책임도 동반됩니다. 상호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의지와 자유 선택이 전제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관계는 불균형의 종속관계가 됩니다. 자유의지는 사랑을 추동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남을 자유롭게 사랑할 자유가 있고, 남으로부터 사랑받을 자유도 있는 사람입니다.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말의 고삐처럼 최소한의 제한을 두지 않으면 오히려 그 자유가 손상될 수 있는 역설을 품고 있습니다. 무한 자유는 결국 자유가 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유도 최소한의 제한이 주어질 때 자유가 자유임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서는 종말론적인 말씀을 이러한 자유의지와 연관시킵니다. 종말론적인 말씀은 우리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는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식품에 유통기한이 있듯이, 자유의지에도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독서 말씀에도 “그때”, “그날 그 시간”, “장차 어느 날” 등과 같은 표현들이 넘쳐납니다. 그날, 그때는 곧 우리의 모든 자유의지가 마지막이 되는 날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유의지가 완성되는 역설적인 때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그날, 그때에 하느님의 나라에서 완전한 자유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와 하느님 사랑의 완성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묵시록 21장에서 요한은 그때를 표현하면서 그 새로운 예루살렘 도성에는 하느님의 성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과 어린 양이 그 새 예루살렘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그 완성의 때에는 이미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자유로 충만하므로 사랑이나 자유의지라는 말조차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 사이에 거리감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때에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사람은 사랑의 궁극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되는 날이 바로 “그날”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종말론적 진술은 그날이 오기 전에 현재의 때를 잘 분별하여 우리의 자유의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라고 충고합니다. 이사야는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라고 표현했고, 사도 바울로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라고 표현했으며, 주님께서는 “깨어있어라.”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 올바른 선택의 순간에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상관없이, 새롭게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이전에는 나만 생각하던 사람이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이전에는 악을 저질러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던 사람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에도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는 것. 이것이 이전과 이후, 즉 현재의 때를 깨달은 사람의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현재의 때를 분별하고, 올바른 선택을 위해 우리의 자유의지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물론 그 결과에는 온전히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용기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부르실 때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훼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인간이 느꼈을 그 두려움은 중요한 선택을 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통으로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주님께서 선택의 매 순간에 우리와 함께하셔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또다시 오실 심판주 왕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다시 다듬기를 바랍니다. 귀한 하느님의 선물이 저주가 되지 않도록, 모든 일에 절제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격을 가지고 생활하길 바랍니다. 탈진실의 시대에 우리가 믿는 믿음을 더욱 공고하게 하면서, 우리의 믿음과 기다림의 신앙이 거짓에 의해 유린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집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성장해 가길 바랍니다. 대림절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늘 진리 앞에 겸허합니다. 그날과 그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미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고, 또 우리 자유의 한계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늘 깨어서 이 시대를 잘 견뎌내시길 기도합니다.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여정에 하느님께서 큰 축복으로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대림1주 (가해)
본기도
신실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어 구원의 약속을 변함없이 지켜주시나이다. 비오니,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심판과 구원을 위하여 다시 오실 때 우리가 기쁨으로 맞이하도록 항상 깨어 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2:1-5
1 이것은 아모쓰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이 어찌 될 것인지를 내다보고 한 말이다.
2 장차 어느 날엔가
.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 만국이 그리로 물밀듯이 밀려들리라.
3 그 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와서 말하리라.
.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
4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5 오, 야곱의 가문이여,
.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
성시_시편 122
1 주님 집에 가자 할 때, ◯
. 나는 몹시도 기뻤다.
2 우리는 벌써 왔다,
. 예루살렘아, ◯
. 네 문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3 예루살렘아,
. 과연 수도답게 잘도 지어졌구나. ◯
. 모든 것이 한 몸같이 잘도 짜여졌구나.
4 그 지파들이, 주님의 지파들이
. 이스라엘의 법도에 따라 ◯
. 주님의 이름 기리러 그리로 올라가는구나.
5 재판석이 거기에 있고 ◯
. 다윗 가문이 앉을 자리
. 또한 거기에 있구나.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의 소리 외쳐라. ◯
. 네 집안에 평화가 있기를!
7 네 성안에 평화가 있기를! ◯
. 네 궁궐에 평화가 있기를!
8 내 겨레, 내 벗들을 나 사랑하므로 ◯
. 크게 외치나니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9 우리의 주님이신
. 하느님의 집을 나 사랑하노니 ◯
. 너에게 복이 있으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13:11-14
11 이렇게 살아야 하는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12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복음서_마태 24:36-44
36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7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38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39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다. 그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홍수를 만났는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이렇게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43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 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44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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