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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시간”_2025.12. 14. 가해_대림3주일_설교문

James Chae 2025. 12. 14. 07:54

 

2025.12. 14. 가해_대림3주일

이사 35:1-10 / 시편 146:5-10 또는 루가 1:46-55, 성모송가 / 야고 5:7-10 / 마태 11:2-11

 

 

종말의 시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마태11:3

 

세례자 요한의 질문입니다. 성서의 시간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 가운데 있습니다. 요한의 질문에서 있듯이 지금 계신 분이 바로 메시아이신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만약 아니면 미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은 이렇게 시간적인 측면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시간을 성서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Χρόνος) 아니라 하느님의 때인 카이로스(καιρός) 말합니다. 복음서가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시간관은 이렇게 현재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미래에서 현재로 침투하는 하느님의 때를 말합니다. 이러한 현재와 미래의 긴장감을 느끼고 말씀을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성서가 말하는기다림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림절을 맞아 오늘은 조금은 지루한 이야기가 있는 이러한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대림의 기다림이 무엇이고, 기다림의 종국이 어떠한지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역사의 위기 때마다 종말묵시사상 대두되곤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서가,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이러한 종말묵시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 속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종국에는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으로 부조리한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정도령이라 하여 한국형 메시아 이야기가 [정감록]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미륵불] 신앙이 이러한 종말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부조리한 권력의 횡포에 삶의 유지가 어려웠던 민중의 희망이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읽힙니다. 그것은 어쩌면 삶을 포기할 없었던 민중의 실존적 열망의 반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다윗 왕조의 영광을 회복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종말은 다음과 같은 대립적 긴장 속에서 선포되고 있습니다. 종말이현재적인 이냐, 아니면미래적인 이냐, 또는피안적인 이냐? 종말이우리 안에 있느냐?”, 아니면우리 너머또는우리 있느냐? 이러한 것을 종합해서 신학자들은 가지 종말론으로 정리합니다. , “현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그리고초월적 종말론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은현재적 종말론 특징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오는데 그것이바로 지금이 그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요한묵시록 20장은우주적, 보편적, 미래적 종말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천년왕국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루가복음은 압도적으로미래적 종말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시대가 주님 오실 그날까지 계속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은 종말이 가깝고도 동시에 멀게 묘사합니다. 마르코복음 13장에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이 있기 전에 미리 말씀하신다고 하시면서 그날이 아직 오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오복음 4장에는 예수께서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 4:17) 이러한가깝고도 종말의 시간은 사도 바울로 신학의 전형입니다. 바울로는 이미 죽음과 부활은 세례 때에 일어났다고 로마서 6장에서 말하면서도(로마 6:3~6),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종말의 미래적 부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1고린 15:12~1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새로운 창조 이미 일어났다고 고린도 후서에 언급했다가(2고린 5:17), 다시 로마서 8장에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말하여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도 말합니다(로마 8:19). 이것을 모순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성서의 시간이임박한 기대 기대 긴장감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가진종말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종말처럼 살아가고, 현재로 침투하는 미래를 현재의 희망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 이후로 하느님 나라는 끊임없이 현재로 침투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에 집중하면서도, 현재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미래를 기다리면서도, 미래에 현혹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지는종말 앞에 그리스도인의 입니다. 동시에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기본자세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현재도 미래도 결국은 현재의 시간 속에서 역사화 됨을 믿습니다. 오늘은 어제의 미래이고, 내일은 다른 현재가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인 이러한 시간적 표상들은 그대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설명해 줍니다. ,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핵심이 이러한 시간적 표상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동시에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안에 있을 것이라 누누이 말씀하신 것은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요한 14:20). 지금은 우리가 그리스도 있지만, 그때에는 요한묵시록이 표상하는바, 그분의 있게 것입니다. 그리스도 곁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실존을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됨으로써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인새로운 창조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주일 감사성찬례에서 이러한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성찬례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래적으로 오실 그분과 함께할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를 기대합니다.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는 이미 세례받은 순간부터영생을 소유한 이며, 이러한 상태는 주님께서 오실 그때에도 그대로 연장됩니다. 이미 오늘의 그리스도와 하나가 사람은 그러한 상태 그대로 그때에도 그리스도와 하나가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영접한 그리스도와 미래의 그날에 만날 그리스도는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 담긴 종말의 시간이 지닌 역설입니다. 

 

종말의 시간에 대해 살펴봤으니, 이제 종말의 장소적 개념, 세계와의 관계를 잠깐 살펴보고 넘어 가겠습니다. 

종말은 세계 안에 용해되어 세계와 동일하게 되는가? 아니면 세계를 관통하는가? 아니면 세계를 초월하는가? , 종말은 세계 속에 내재하는가? 아니면 세계를 초월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논의는 신학적으로 가장뜨거운 감자입니다. 이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땅에 실현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남미의 해방신학은 인간의 죄로부터의 해방이 정치적 해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고통받는 자들이 현세적 삶의 억압에서 제대로 해방되도록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종말론입니다. 그들에게 죄는 개인의 죄가 아니라 사회적 부조리입니다. 많은 신학자가 피안적 종말론을 말하기보다 세계 내재적 종말론을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종말을 미래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우리 앞에 있는종말의 희망으로 작동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세상과 조화를 이룰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신학자 몰트만의희망 신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신학적 주장들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것은 성서의 종말론이 우리의 위안을 위해서도 기능을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러한 종말론은하느님의 뜻이 이를 통해 관철된다는 의미가 큽니다.” 종말은 하느님의 의지의 발현입니다. 그리고 의지는 우리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때가 오면 믿음도 소망도 소멸하지만, 세상 끝까지 영원히 남는 것은 오직 사랑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지금 그러나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시간의 간격을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입니다.

 

주님께서도 종말에 대한 비유에서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러한은폐성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자만이 보고 들을 있습니다. 이는 성서가지금 그러나 아직이라는 긴장감 속에서 성서의 종말론이 매우 우리의 삶과 밀접한 일상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다가올 미래만 바라보면서 현재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이비 종말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하느님의 나라는 강탈됐다고 마태오복음 11 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말은 하느님의 약속을 먼저 받고 안일하게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제 하느님 나라를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에 의해 하느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현재 가운데 침탈당해 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원래 포도나무 가지가 아니라 접붙임 가지에 의해 점령됐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땅에 묻힌 보물처럼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은폐되어 있지만, 그것을 일상에서 발견한 사람은 땅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고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 땅을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마태 13:44~46).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종말이 세계와 역사와 완전히 동일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말에 현혹되기 쉽기 때문입니다(마태 24:3). 많은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가 이러한 종말론을 지금의 시간과 역사와 동일시 함으로써 이런 오해를 낳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을 재료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은폐성과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인 종말의 긴장감을 견뎌내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림의 시간에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질지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가 종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한계를 알라는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 물질, 시간, 세속적 소유, 지식 . 세상의 모든 것이 유한하고 유통기한이 있다고 종말론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시간은 우리의 시선을 겸손하게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돌리게 합니다. 그리고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종말은 단순히 시간의 끝과 우리 실존의 장소적 변모가 아니라 종말은 현재나 미래에나 모두그리스도와 함께함이란 형식을 강조합니다.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한 사람은 그때에도 그리스도와 함께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상태가 바로 그날의 우리의 상태가 됩니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는 현재의 모습 그대로가 바로 미래의 우리입니다. 말은 지금 땅에서 풀지 않으면 종말에도 그대로 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마태 18:18). 새로운 창조는 기존에 있던 것과 모든 면에서 가치의 전도를 드러내지만, 창조의 것이 무효가 되지는 않습니다. 번째 창조도 분명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때 이루어질 새로운 창조는 결국 인간과 하느님의 합일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를 표상화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옥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함께한 주님의 백성을 통해 이러한 것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상은 오늘 읽은 이사야도 오래전에 예언한 것입니다.

 

“야훼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이 길을 걸어 
시온 산으로 돌아오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리라.
그들의 머리 위에선 끝없는 행복이 활짝 피어나고
온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없이 스러지리라.”
이사 35:10

 

번째 창조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그날에 새로운 창조 속으로 편입되면서 모든 가치가 전도됩니다. 눈물은 기쁨으로, 고통은 행복으로 전도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위로의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 얻게 되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현재 우리는 세계 속에 은폐된 하느님의 나라를 매일 제대로 체험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돌파되어 들어오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종종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일상 속에서 경험하곤 합니다. 그래서 기쁨과 은총을 사람들과 나누고, 아름다운 시나 노래 등과 같은 다양한 형식으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성가들은 모두 이러한 은총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것이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지만, 결국 그날에 모든 것이 분명해 것입니다(1고린 13:12). 그러므로 결국 사도 바울로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나 미래나 변함없이 남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때에도 사랑할 있습니다. 지금 사랑할 없는 사람은 그때에도 없습니다. 사랑만은지금 그러나 아직이란 말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입니다. “누군가를 내일 사랑해야지라는 말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는 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아직 불완전하지만, 그때에는 사랑이 더욱 온전하게 됨을 우리는 압니다. 사랑이 위대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대림의 기다림은 우리가 종말론적인 세계관에 빠져서 살라는 뜻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그분을 알게 되는 것은 이러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1고린 13:12).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서툴지만, 우리의 사랑을 매일 조금씩 키워갑니다.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사랑이란 지표로 세워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두움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북극성같이 항상 거기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대림의 절기에 이러한 사랑의 지표가 우리 안에서 온전히 빛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대림3 (가해)

 

본기도

하느님, 다시 오실 주님 기다리는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주시나이다. 비오니, 연약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닫힌 눈을 열어주시어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35:1-10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     황무지야, 기쁨을 꽃피워라.
2    아네모네처럼 활짝 피워라.
.     기뻐 뛰며 환성을 올려라.
.     황무지도 레바논의 영광으로 빛나고
.     르멜과 사론처럼 아름다워져
.     사람들이 야훼의 영광을 보리라.
.     우리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3    늘어진 팔에 힘을 주어라.
.     휘청거리는 무릎을 꼿꼿이 세워라.
4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하여라.
.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마라.
.     너희의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5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6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     메마른 곳은 샘터가 되며
.     승냥이가 살던 곳에 갈대와 왕골이 무성하리라.
8     곳에 크고 정결한 길이 훤하게 트여
.    ‘거룩한 이라 불리리라.
.     부정한 사람은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고
.     어리석은 자들은 서성거리지도 못하리라.
9    사자가 얼씬도 못하고
.     맹수가 돌아다니지 못하는 ,
.     건짐받은 사람만이 거닐 있는 ,
10  야훼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길을 걸어
.     시온 산으로 돌아오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리라.
.     그들의 머리 위에선 끝없는 행복이 활짝 피어나고
.     온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어
.     아픔과 한숨은 간데없이 스러지리라.

 

 

 

성시_루가 1:46-55 (성모송가)

1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오며,
.      마음이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기뻐합니다.
2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     이제부터 백성이
.     나를 복되다 것입니다.
3    전능하신 분께서
.     내게 일을 행하셨으니
.     주님의 이름 거룩하십니다.
4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     대대로 구원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5    주께서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6    권세있는 자들을
.      자리에서 내치시고,
.     보잘 없는 이들을
.     높이셨습니다.
7    굶주린 사람을
.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     부요한 사람을
.      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8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     주님의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9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     약속하신 대로,
.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십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야고 5:7-10

7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때까지 끈기 있게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립니다. 8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9 형제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남을 탓하지 마십시오. 심판하실 분이 이미 앞에 계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고난을 참고 이겨낸 사람들의 본보기로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예언자들을 생각하십시오.

 

 

 

복음서_마태 11:2-11

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3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하고 묻게 하였다. 4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5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이사 61:1).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7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 군중에게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9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예언자보다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성서에,
10 ‘
너보다 앞서 사자를 보내니
.     
그가 길을 미리 닦아놓으리라.’
.   
 말라 3:1
하신 말씀은 바로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11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사람보다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