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1.18 가해_연중2주일
이사 49:1-7 / 시편 40:1-11 / 1고린 1:1-9 / 요한 1:29-42
“일시 정지와 관조의 영성”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오늘 읽은 복음서 말씀에서 “엠블레포 ἐμβλέπω”라는 헬라어 동사의 중요한 역할이 돋보입니다. 엠블레포 ἐμβλέπω는 사전적 의미로 “보다, 올려다보다, 바라보다, 볼 수 있다”의 뜻이 있습니다. en과 blepo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성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바라보다, 즉 고정적으로 관찰하다, 또는 절대적으로 명확하게 분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본다”의 의미가 있는 ὁράω(호라), βλέπω(블레포), θεωρέω(테오레오)와는 달리, 이 동사는 의지가 발현되어 고도로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잠시 멈추고, 숙고하고, 분별하는 관찰적 시선입니다. 신약성서에 12번 정도 사용된 이 단어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도록 청자의 시선을 환기하도록 시킬 때나, ,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눈길, 죄를 깨닫게 하는 강렬한 시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제자들의 시선 등에 사용됐습니다. 즉, 바로 보는 것이 믿음과 순종과 직결됨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29절에 첫 번째로 “본다”의 의미로 사용한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의 “호라ὁράω”입니다. 이 단어는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을 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예수를 바라보고 소개할 때는 좀 더 구체적인 의미의 “엠블레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특히 두 명의 제자의 시선을 환기해 예수께 집중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두 번째 예수를 소개하는 세례자 요한의 시선은 첫 번째보다 더욱 진지했고 또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시선과 함께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라고 구체적인 진술을 덧붙입니다. 이로써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를 세례자 요한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 약속의 표징으로서 예수를 보게 됨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를 두 번째 만나면서 좀 더 그에 대해 구체적인 인식에 다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번째 세례자 요한의 “바라봄”은 결국 두 명의 제자의 시선을 바꿔놓았고, 그 둘은 예수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아였습니다. 결국 세례자 요한의 진지한 “바라봄”이 두 제자를 예수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 엠블레포는 예수께서 안드레아의 형제 시몬 베드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실 때도 사용됐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눈여겨보셨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예수의 지긋한 시선이 베드로에게 머물 때 베드로가 느꼈을 느낌은 어떠했을까요? 베드로를 바라본 예수의 시선에는 그에 대한 애정은 물론 예수의 권위와 베드로의 소명, 그리고 그의 앞날을 꿰뚫어 보는 예지적 시선이었습니다. 아마도 처음 예수를 만난 베드로는 그분의 진지한 시선에 압도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진지한 바라봄은 말로써 전할 수 없는 엄중한 하느님의 의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의 시선은 곧 베드로의 소명을 끌어내는 시선이었던 것이지요. 예수와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친 그 공감의 순간, 예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바꿔주셨습니다.
본다는 것은 이렇게 많은 말보다 더 큰 효과를 낼 때가 많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주 중요한 순간마다 이렇게 진지한 시선을 보이셨습니다. 마태오복음 19장과 마르코복음 10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을 만났을 때도 그의 헌신을 이끄는 이러한 시선을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애정 가득한 시선을 거부하고 다시 물질의 욕심 때문에 제자가 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진지하게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대중을 향하여 “공중의 새를 보라”라고 사람들의 시선을 환기하게 시키셨습니다(마태오 6장). 먹는 것과 입는 것에 허덕이며 고단한 실존을 이어가는 백성들에게 예수께서는 고개를 들어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보라고 그들의 시선을 환기하게 시키셨습니다. 들의 꽃을 보고, 공중의 새들을 유심히 관찰함으로써 자신들의 문제에만 머무는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시선으로 전환하라고 촉구하신 겁니다. 그리고 베싸이다 소경이 예수를 만나 완전히 세상을 “자세히 새롭게 보게 된” 사건에서도 이러한 시선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마르코복음 8장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그 소경의 치료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흐릿하게 볼 수 있었고, 예수께서 다시 제 차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제야 그가 제대로 보게 됐다고 기록됐습니다. 이 말은 영적인 시선은 이렇게 점진적으로, 단계적으로 성장함을 뜻합니다. 물론 때론 한순간에 깨닫는 시선도 있겠지만,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은총뿐만 아니라 다분히 우리의 노력도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관조(觀照)의 영성”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한 발 떨어져 어떤 현상이나 사물, 사건을 관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멈추어 서서, 사물이나 현상, 사건을 깊이 바라보고 음미함으로써 모든 사물과 사건의 이면에 있는 본질을 깨닫는 영적 수행의 방법입니다. 관망과 유사하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은 필수이지만,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진지한 애정과 진리에 대한 열정이 함께합니다. 그래서 관조의 영성은 명상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뤄집니다. 이렇게 자신의 주관적 생각이나 편견, 느낌을 떠나 완전히 빈 마음과 온전한 정신으로 편견 없는 시선을 대상에 둠으로써 대상에 감춰진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영성은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세상을 그렇게 관조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그러한 관조로 베드로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를 통해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소명을 발견하실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의 사촌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봤기에 평소와 다른 예수의 신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드레아를 비롯한 세례자 요한의 제자도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를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라봄은 결코 의심하는 도마가 보고 만지고자 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토마는 실증적인 차원에서 보고 확인하고자 했지만, 오늘 우리가 묵상한 “엠블레포”라는 단어와는 다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토마의 의심 이야기에 사용된 동사는 흥미롭게도 모두 “호라ὁράω”라는 일반적 의미의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진지하게 바라보고 관찰하는 엠블레포와는 다른 일반적인 바라봄이라고 앞에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우리의 관심을 돌리는 이 본다는 의미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특별히 보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이 살아갑니다. 듣는 것은 제대로 듣기 위해 간혹 직업 때문이라도 훈련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특히 통역사나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듣는 훈련이 매우 중요하겠죠. 외국어를 공부할 때도 듣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듣는 것은 훈련이 필요함을 모두가 공감합니다. 또한 말하기도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모두가 제대로 말하고 싶어 하고, 특히 발표력과 설득력을 기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수사법이나 웅변술을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는 것과 관련해서 훈련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미술작품을 보면서도 그 작품을 본인이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보는 시각과 경험에 따라 함부로 작품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우리의 본능으로 취급됩니다. 시각은 훈련 없이도 자기의 주관대로 보고 느끼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들어도 절대음감이 없는 사람은 음계를 구분 못 하듯이,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도 훈련 없이는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각자의 주관에 의존하는 바라봄입니다. 이는 엠블레포와 다른 일반적인 의미의 바라봄입니다. 그래서 같은 나무, 같은 꽃을 봐도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천차만별입니다. 우리가 본 것을 남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각자가 본 것의 차이를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본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믿는 습성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늘 자기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진이 잘못 찍혔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진이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자신의 얼굴을 몇 초, 또는 몇 분이나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매일 만나는 가족의 얼굴은 얼마나 뚫어지게 보시나요? 오늘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를 뚫어지게 보신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그렇게 진지하게 오랫동안 바라본 경험이 있나요? 만약 그랬다면 아마도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선의 훈련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들은 아마 화가들일 겁니다. 그들은 인물화의 모델이나, 정물, 풍경 등을 정말 오랜 시간 바라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새나 동물을 연구하는 동물학자들도 동물을 관찰하는 데 몇 시간 아니 몇 날을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고 바라본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사람들은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보다는 더 많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바라봄은 대상을 바라볼 마음의 준비와 절대 시간이 필요합니다. 즉, 여유로운 마음과 시간의 투자가 필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밤을 밝혀가면서도 일을 멈추는 법을 모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하루 3~4시간 정도 자고 나머지는 활동합니다. 그러니 좀처럼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습니다. 아니, 게으름이 아니라 쉴 수 있는 여유조차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쉬는 시간조차도 운동이나 취미 생활 등으로 우리의 감각이 쉴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우리의 시선을 늘 강탈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조용히 바라봄을 훈련할 수 있는 관조의 시간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바라본 시간이 얼마 정도 됐는지는 성서에 기록이 없지만,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보다 그 바라봄의 시간은 길었을 겁니다. 엠블레포는 시간을 두고 진지하게 대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잠시 머물러서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진지하게 관찰할 시간을 전혀 가질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너무 바쁘고 부지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부지런하지 않으면 마치 도태되는 것처럼 우리를 경쟁으로 내몹니다. 그러니 우리는 멈출 수도, 멈춰서 생각할 수도, 멈춰서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훈련에는 “시간적 게으름”이 필요합니다. “게으름”이라 하니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부연 설명해 드리면, 바라봄과 관조의 영성은 절대적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루틴에서 벗어나 자기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시간의 흐름에 쫓기지 않는 여유로운 마음의 상태를 하루 중에 가지는 훈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진정한 바라봄은 이러한 “정지의 시간”에 이뤄집니다. stop이 아니라 pause입니다. 일시 정지. 일시 정지의 순간이 바로 바라봄의 순간이고, 엠블레포라는 단어의 의미에 가장 가깝습니다. 멈추고 바라보고 관찰하며 느끼고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일시 정지”로 길러지는 관조의 영성입니다.
이제 2026년을 새롭게 시작하며 정말 많은 계획을 세우고 큰 작심을 하시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해의 시작을 이렇게 “일시 정지”에서 시작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와 세례자 요한 간의 시선, 예수와 두 제자 간의 시선, 예수와 베드로 간의 시선. 이러한 일시 정지된 순간이 우리에게도 자주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 일시 정지의 순간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는 문제가 무엇이든, 그 순간에 예수께서 주시는 진리에 대한 통찰을 우리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은총이 새해에 여러분 가운데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주 (가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이시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는 말씀과 성사로 우리를 구원하시어 모든 사람이 주님을 알고 경배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49:1-7
.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아, 내 말을 들어라.
. 먼 곳에 사는 부족들아, 정신차려 들어라.
. 야훼께서 태중에 있는 나를 이미 부르셨고
.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이름을 지어주셨다.
2 내 입을 칼처럼 날세우셨고
.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주셨다.
. 날카로운 화살처럼 나를 벼리시어
. 당신의 화살통에 꽂아두시고
3 나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나의 종,
.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4 그러나 나는 생각하였다.
. “나는 헛수고만 하였다. 공연히 힘만 빼었다.”
. 그런데도 야훼만은 나를 바로 알아주시고
. 나의 하느님만은 나의 품삯을 셈해 주신다.
5 야훼께서 나를 지극히 귀하게 보시고
.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주신다.
. 야곱을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 이스라엘을 당신께로 모여들게 하시려고
. 나를 태중에 지어 당신의 종으로 삼으신
. 야훼께서 이제 말씀하신다.
6 “네가 나의 종으로서 할 일은
.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 살아 남은 이스라엘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
7 만국이 꺼려하여 가까이하지 아니하므로
. 지배자들의 기막힌 멸시를 받으며 종살이하는 너에게
. 이스라엘을 건지신 거룩한 이,
.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 성실하신 야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 너를 뽑아 세우셨다.
. 왕들은 네 앞에서 일어서고 수령들은 땅에 엎드리리라.
성시_시편 40:1-11
1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 나를 굽어보시고 ◯
. 내 부르짖는 소리 들어주셨다.
2 죽음의 구렁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 진흙 수렁에서 나를 꺼내주시어 ◯
. 바위 위에 내 발을 세워주시고
. 내 걸음 힘차게 해주셨다.
3 내 입에서 새 노래가 터져 나와 ◯
. 우리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 사람들은 나를 보고 ◯
. 옷깃을 여미며 주님을 믿게 되리라.
4 복되어라. 허수아비 우상에 속지 않고 ◯
. 주님만 믿는 사람이여.
5 주, 나의 하느님,
. 우리를 위하여 놀라운 일을 많이도 하셨으니 ◯
. 당신과 비길 자 아무도 없습니다.
¶ 그 이야기 세상에 알리려 하지만, ◯
. 그 하신 일 이루 다 셀 길이 없습니다.
6 짐승이나 곡식의 예물은 당신께서 아니 원하시고 ◯
. 오히려 내 귀를 열어 주셨으며,
7 번제와 속죄제를 바치라 아니하셨기에 ◯,
. 다만 엎드려 주님께 아뢰옵니다.
¶“나를 들어 두루마리에 적어 두신대로 ◯
.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 몸 대령하였습니다.”
8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의 법을 ◯
. 내 마음 속에 간직하고 기뻐합니다.
9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
. 당신의 정의를 알렸습니다.
. 주께서 아시는 대로 ◯
.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10 당신의 정의를 내 마음 속에 숨겨 두지 않고 ◯
. 당신의 진실하심과 구원을 알렸습니다.
¶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
. 그 큰 모임에서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11 주여, 당신의 그 인자하심 나에게서 거두지 마시고, ◯
. 그 진실한 사랑으로, 이 몸을 언제나 지켜 주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1:1-9
1 하느님의 뜻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로가 우리 교우 소스테네와 함께 2 고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뿐만 아니라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주님이십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4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나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6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깊은 확신을 가졌으며 7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8 주께서도 여러분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끝까지 굳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복음서_요한 1:29-42
29 다음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30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31 나도 이 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33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아라.’ 하고 말씀해 주셨다. 34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35 다음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 곳에 서 있다가 36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는 뒤돌아 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39 예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때는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42 그리고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가자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는 너를 게파라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파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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